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내 민족을 주소서! 에 7:1-3

鶴山 徐 仁 2021. 10. 28. 13:05

내 민족을 주소서! 에 7:1-3

 

 

10월 28일 (목)

   
내 민족을 주소서! 에 7:1-3


1.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스더 7장은 대반전의 장입니다. 
강자와 약자가 바뀌고, 죽이려는 자와 죽임을 당하던 자가 서로 바뀝니다. 주도권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는 역사적인 장입니다. 마치 외통수에 걸려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가해 한순간 전세가 역전되는 형국입니다. 대적이 오히려 무방비로 방심하다 갑작스런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반전 상황입니다. 


왕과 하만이 왕후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서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2절). 왕은 왕후 에스더의 소원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대체 무슨 소원이기에 이토록 뜸을 들이는가 하며 조바심을 부렸습니다. 


놀랍게도 에스더의 소원은 금은보석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절반을 달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자기 민족의 생명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왕후 에스더의 국적이 밝혀진 것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정말 죽기를 각오한 여인이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4:16)한 그대로 일사각오의 용기로 왕을 상대하고 또 적과 마주섰습니다. 


<내 민족을 달라>는 것은 결코 허세나 만용이 아니었습니다. 가끔 <내 민족을 달라> <세계를 달라>며 기도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게 분명 귀하고 대단한 기도임에도 무책임하고 경솔한 기도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요? 그게 왜 진지하게 들리지 않을까요? 그런 기도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에스더처럼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금식하며 준비하고 민족에 대한, 생명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열정으로 죽기를 각오할 때만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도 에스더와 같은 구국의 성도들이 절실합니다. <내 민족을 주소서!>하며 사심 없이 기도하고 가장 책임적인 모습으로 평화와 상생을 구하는 피스 메이커들이 필요합니다. 


에스더에게서 배웁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와 결단과 용기와 실천을 본받읍시다.


-당신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까?
-에스더가 왕에게 <내 생명과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3절) 한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왕후 에스더가 유다인으로 밝혀진 순간 하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주님, 볼수록, 생각할수록 에스더의 용기와 지혜와 담력이 놀랍기만 합니다. 끝까지 자제하다 둘째 날 잔치자리에서, 그것도 왕이 다시 <소청이 무엇이냐>고 다그치자 그제서야 <내 생명과 내 민족을 달라>고 주문한 에스더의 그 비상한 결의와 믿음이 저희를 부끄럽게 하고 또 감동시킵니다. 지금 이 나라의 사정과 위기도 에스더와 같은 책임적인 성도들을 요구하고 있사오니 저희가 이에 바르게 응답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유발 하라리 ‘역사와 행복’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
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중략).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
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
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 저(著) 조현욱 역(譯) 《사피엔스》 (김영사, 56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역사를 ‘기술 발전’의 개념이 아
니라 인간의 행복의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현대는 분명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
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의 인류가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보다는 노는 데
보냈던 아주 옛날 인류보다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적 부와 정신적 행복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환경을 이해
하고 지배하는 지식은 늘어나 큰 진보를 이루었지만, 지혜의 측면에서
보면 현대인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옛 인류보다 더 우월하거나 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편안함’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역사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측면에서 보면 더 행복해졌고, 더 행복해 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
아가는 인류는 심판의 날을 맞이해야 하는 죄악의 역사가 깊어질 뿐입니
다. 인류의 역사는 분명 종말, 즉 하나님의 심판과 결산의 날로 다가
가고 있는 중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마다 이런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마라나타”(Maranata, “주님이 곧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 이상적인 성도를 말할 때마다 초대 교회를 말
합니다. 이 일세기 초대 교회의 생명력,성도들의 활기는 주님의 재림의
날에 대한 기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그 어느
역사의 현장에서도 거룩과 행복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
으리라.” (살전4:17)
   
에스겔 11장 20절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Then they will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They wi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관계
예수님께 아이들은 귀찮은 존재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성가시게 여기시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그래야 마땅하다. 사실, 아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르쳐 주는 최고의 스승이다. 아이들의 솔직함, 부모를 의지해서 무슨 일만 생기면 부모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를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보여 준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목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스캇 솔즈의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중에서-


아이들은 부모에게 아무 조건없이 찾아갑니다. 그냥 자신의 모든 것을 해결하고 알아주시는 분이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만나기 위한 준비와 조건들을 따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길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