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세 번씩 왕상 9:23-28
10월 20일 (수)
해마다 세 번씩 왕상 9:23-28 23. 솔로몬에게 일을 감독하는 우두머리 오백오십 명이 있어 일하는 백성을 다스렸더라 24. 바로의 딸이 다윗 성에서부터 올라와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를 때에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였더라 25.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성전 짓는 일을 마치니라 26.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 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 27. 히람이 자기 종 곧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매 28. 그들이 오빌에 이르러 거기서 금 사백이십 달란트를 얻고 솔로몬 왕에게로 가져왔더라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25절). 역대하 8:13에 의하면, 이 세 번의 제사는 세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 초막절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3월 14일, 어린 양을 제물로 잡는 첫 날을 가리키고, 무교절은 그 다음의 7일간을 가리키는데 보통은 이 두 절기를 구별하지 않고 그 전체를 <무교절> 혹은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칠칠절은 보리 수확을 감사하는 맥추절로 초실절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초막절은 광야 유랑 40년을 회고하며 가을걷이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매년 이 3대 절기를 충실히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감사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인간이 전폭적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깊은 신뢰의 표현입니다. 그런 인식과 믿음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회복되는 것이며 구원은 바로 그렇게 되살려진 관계로 성취되는 사건입니다. 이와는 달리 만일 자신이 받은 은혜의 원천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것이자 관계 회복에 이르는 길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감사의 부재>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가치 인정의 궁극적 결론인 믿음이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믿음, 그리고 구원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감사 행위와 그 의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떠받치는 기본적이 토양이기도 합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과 사회는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불신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에 인색하지 맙시다. 이 가을 우리도 주님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보다 풍성하게 가꾸어 갑시다.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격려를 아끼지 맙시다. <감사의 고백>과 <감사의 기도>가 어두운 이 시대를 밝히는 한 줄기 빛입니다. -당신은 요즘 감사하며 사십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감사>와 <믿음>의 관계를 적어 보십시오. - 솔로몬이 <해마다 세 번씩>드린 제사, 곧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주님, 솔로몬이 나라의 번영을 구가하며 해마다 세 번씩 성대하게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감사의 제물도 드리고 제단에 분향도 했다고 합니다. 저희 역시 늘 감사하고, 순간마다 감사하며, 현실이 고단할수록 감사하는 믿음을 놓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감사하는 심령에 더 큰 은혜가 임하고 감사하는 삶에 더 풍성한 축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솔로몬의 감사 생활을 통해 보다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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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내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인가?”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유발 하라리 저(著) 조현욱 역(譯) 《사피엔스》 (김영사, 58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대로 인류는 인공지능 로봇까지 만들어 내며 ‘호모 데우스(神)’가 되어 갑니다. 이제 우리는 되고 싶은 것은 거의 다 된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류는 넘쳐나는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더욱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누구이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모르면서 그 힘은 헤라클레스처럼 커져가는 인류. 우리가 술에 취해 비 틀거리며 해코지를 하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며 하 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삼손은 주체 못하는 힘 때문에 타락합니다. 힘은 자기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만듭니다. 힘이 있으면 휘두르고 싶고, 힘이 있으면 누가 유 혹하지 않아도 스스로 유혹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예리한 칼은 더욱 든 든한 칼집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과 능력을 달라는 기도와 더불어, 이 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잘 쓸 수 있기를 동시에 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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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John 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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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있다가 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떡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힘써 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는 떡을 얻기 위해 경주하는 동안, 어떤 이들은 그것을 얻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평생을 달음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것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는 인생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중요한 것은 원하는 떡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떡을 얻었음에도 만족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잠시 그 떡으로 인해 행복했다 할지라도, 금 새 그로 인한 즐거움과 행복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왜 그처럼 인생을 걸고 쫓았는데 행복하지 못하고 그것이 영원하지도 못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 떡이 육신의 떡이요, 잠시 있다가 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최형숙 전도사의 ‘영생을 위해 일하라’에서- 우리는 육신을 위한 떡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그러므로 오직 영원한 생명의 떡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라 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생명의 떡이 되심을 믿고 그분을 따를 때 목마르지 않을 것이요, 영생의 떡이 된다 하셨습니다. 그 떡만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영원한 생명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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