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2-17

鶴山 徐 仁 2021. 10. 9. 11:51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2-17

 

 

10월 09일 (토)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2-17


12.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궁궐에 있는 왕후 에스더가 궁 밖 모르드개에게 이렇게 회답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 그렇습니다. 당시 에스더로서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11절). 왕의 마음이 더 이상 에스더에게 있지 않았거나 혹은 나랏일이 바빠 미처 왕후를 부를 겨를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만 어느 쪽이든 당시 에스더로서는 바사 왕국의 법도를 어기면서까지 왕 앞에 나가기가 극도로 꺼려지는 상황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미 와스디를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킨 전력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이번에는 왕후라 할지라도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왕 앞에 나설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 에스더는 혼자 왕궁에서 숨죽이고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습니다. 왕궁에서는 누구도 그녀가 유다인 포로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말처럼 하나님이 그녀를 유다 족속을 구하시기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해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하신 것이라면 결코 그 하나님의 사명과 부르심을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희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도 에스더와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며 나서는 용감한 믿음의 사람들을 구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모두가 희생을 두려워하는 시대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가 십자가를 가장 경계하고 기피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죽지 않고 살겠다고 하면 죽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면 사는 종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민족을 구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결단하면 영원히 사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요 역설적인 하나님 신앙임을 깨닫고 에스더처럼 결단하는 성도가 되시길 빕니다. 


-본문 16절을 옮겨 적어 보십시오.
-당시 에스더의 심경을 당신이 이해한 대로 적어 보십시오.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고 한 에스더의 말에서 당신이 느낀 바를 적어 보십시오.


주님, 어느 시대나 하나님은 에스더와 같은 사람,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며 결단하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또 나라도 그 민족도 구원하십니다. 지금 이 나라와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또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이런 헌신자, 이런 희생을 각오하는 자가 꼭 필요함을 깨닫사오니 저희 모두가 이 시대의 에스더가 되고, 모르드개가 되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가 먼저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며 희생을 각오하고 결단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소설의 매력


스탕달은 소설을 가리켜 “거리로 메고 다니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거울을 메고 거리를 걸어 다닌다고 합시다. 그 거울에는 나와 다를 것이
없는 친근한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 비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설은
나와 같은 이웃들의 민낯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닌 ‘小’ ‘소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
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소설이 이렇듯 작은 자들과 더불어 같이 울어줄 수는 있으되 ‘생명’
을 주지는 못합니다. 생명까지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공감하실 뿐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살아감에 대한 존재의 가치를 부여해 주십니다.
마리아에게 따라 다니는 꼬리표는 ‘일곱 귀신 들린 여자’였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귀신들렸던 마리아’가
아닌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로 새로운 자리 매김을 해 주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보다도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증인
이 되고, 하늘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16:9)


“소설은 시처럼 아름답지가 않습니다. 음악처럼 신비한 힘도,드라마
처럼 숨 막히는 스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처럼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팩트나 수학처럼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공식도 가지고 있지 않
습니다. 그런데도 소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거
리로 메고 다니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세상살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삶의 민낯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령 저(著)「소설로 떠나는 영성 순례(포이에마, 5쪽)」 중에 나
오는 구절입니다.
   
'마땅히 맞아야 할 자'임을 인정하라
감히 하나님을 대항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 자만이 낮아지고 겸비해질 수 있다. 
'자식에게 이길 부모는 없다'는 육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님께 대비시켜 하나님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대항하는 자녀에게는 단계별로 
7배씩의 채찍을 가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채찍은 회개의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다. 
죄를 깨닫고 자복하며 마음이 낮아져서 형벌을 순히 받으며 
자신이 '마땅히 맞아야 할 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여야 멈추신다.
-윤희주 목사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비해 
하나님의 채찍이 가벼움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채찍이 정당한 징계임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십시오. 
회개하는 심령에는 어떤 원망도, 불평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원망이나 불평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순순히 인정하지 못함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