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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안동 ‘슈바이처’ 마지막까지 사람 살리려다…

鶴山 徐 仁 2021. 9. 25. 09:22

진주 대안동 ‘슈바이처’ 마지막까지 사람 살리려다…

 

교통사고 부상자 돕던 이영곤씨, 빗길 미끄러진 車에 치여 사망… 동료·지인·옛 환자들까지 조문

 

김준호 기자


입력 2021.09.25 03:00

 

 

지난 22일 교통사고 현장에서 사고 운전자를 도우려다 참변을 당한 의사 이영곤 씨의 진료실에 고인의 친구와 환자들이 가져다 놓은 국화꽃이 놓여 있다./김동환 기자

 

“데려갈 사람을 데려가야지. 하늘도 참 무심하네요.”

 

지난 23일 오후 7시 경남 진주시 경상대병원 장례식장. 검은색 옷을 입은 70대 여성이 내과 의사 이영곤(62)씨 영정 앞에서 통곡했다. 그는 고인의 유족도, 지인도 아니었다. 문상을 마치고 나온 그는 “나는 이 원장님과 30여 년 전 의사와 환자로 만난 일흔두 살 우영순”이라며 이씨 사망 소식을 듣고 무작정 장례식장을 찾아왔다고 했다. 울음을 삼키던 그가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원장님은 형편이 어려워 검사받을 돈도 없었던 제게 ‘돈 걱정 하지 말고 검사받고 가시라’며 사비를 털어 치료해주시던 분입니다. 병원에서 저 같은 환자를 돌봐야 할 분을 여기서 봐야 한다니 마음이 무너집니다.”

 

이날 빈소엔 생전 이씨가 보살폈던 환자 10여 명이 찾아와 영정 앞에 머리를 숙였다. 또 다른 70대 환자는 “어떻게 제 형편을 아셨는지, 원장님은 비싼 약값 때문에 우물쭈물하던 제게 ‘꼭 약국에 가보라’고 하셨다. 약국에 가보니 ‘원장님이 다 계산하셨다’며 약사가 약통 여러 개를 줬다”고 했다. 이성분(56)씨는 “아파서 찡그린 얼굴로 병원을 찾았지만 늘 웃으면서 나왔던 기억이 많다”고 했다.

 

고 이영곤 원장. /가족 제공

 

 

이씨는 1996년부터 경남 진주시 대안동 중앙시장 인근에서 작은 내과를 운영한 ‘동네 병원 원장’이었다. 그런 그가 교통사고 부상자를 도우려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인과 동료 의료인은 물론이고 그의 진료실을 찾았던 환자 등이 빈소를 찾아 추모의 뜻을 전했다.

 

이씨는 개인 병원을 차린 뒤 돈이 모자라거나, 치료비가 없어 머뭇거리는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5년 전부터 이씨 병원에서 일했던 송숙희(56) 간호사는 “병원이 시장 주변에 있고, 내과 특성상 만성 질환자가 많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 환자가 상당수”라며 “원장님은 치료비를 받지 않는 것은 예사였고, 몇 년째 폐결핵 환자에게 무료로 약을 처방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1998년부터 매주 3번씩 진주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를 진료해 왔다. 고교 친구이자 치과 의사인 김법환(62)씨는 “병원 근무와 비교하면 열악하고 처우도 낮아 의사 사이에선 꺼리는 일인데 영곤이는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진주교도소 관계자는 “진료해줄 의사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원장님은 20년 넘게 이 일을 맡아주셨다”고 했다. 이씨는 점심 식사 시간을 쪼개 교도소 왕진을 갔고, 차 안에서 빵이나 계란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운전자를 도우려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영곤씨가 운영하던 경남 진주시 내과의원에서 24일 송숙희 간호사가 진료실 책상 위에 놓인 국화꽃 다발을 어루만지고 있다./김동환 기자

 

 

평생 주변 사람을 도우며 살았던 그의 죽음도 남을 돕다 생긴 사고 때문이었다. 진주경찰서와 유족 등에 따르면, 그는 지난 22일 오전 11시 53분쯤 진주시 정촌면 남해고속도로 진주나들목 인근 편도 4차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사천에 있는 부친의 묘소에 홀로 가던 길이었다. 그는 빗길에 미끄러진 SUV 차량이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를 목격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씨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고 차량에 다가갔다. 생명이 위급할 수도 있는 운전자를 두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운전자가 가벼운 상처만 입은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차에 타려는 순간, 뒤에서 오던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그의 차를 덮쳤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오후 1시 40분쯤 숨을 거뒀다.

 

발인이 끝난 24일 오후 이씨의 내과 의원에는 진주고 48회 동기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영곤이라서 (사고를 목격하고)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부산대 의대에 진학했고, 당시 공중보건의 장학금 제도를 통해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지역 공공 기관에서 5년간 의무 근무를 했다. 그는 진주의료원에서 환자를 보면서, 동생 학업을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은 부산고법 판사를 지내고 지금은 로펌에서 활동하는 이영갑(58) 변호사다.

 

이씨는 자신에겐 돈 쓸 줄 몰랐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진료실에는 20년 넘게 사용한 청진기, 1996년 개원 당시부터 사용한 1994년산(産) ‘골드스타’(LG) 선풍기가 놓여 있었다. 문서함이나, 소파 등 집기도 개원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진료실에서 ‘새것’은 이날 환자들과 친구들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하얀색 국화꽃 다발이 전부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미처 전해 듣지 못한 환자들은 이날 진료를 위해 병원을 찾아왔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한 달에 한 번씩 함양에서 의원을 찾는다는 정영자(79)씨는 “우짤꼬, 우리 원장님. 왜 그래 됐노”라며 간호사 손을 붙잡고 울었다. 이씨는 이날 사고 당일 미처 찾아뵙지 못한 부친의 묘소 옆에 안장됐다. 그는 동갑내기 아내와 30대 남매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