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아프가니스탄, 지도자의 신념, 그리고 현실
중앙선데이 입력 2021.09.11 00:30 업데이트 2021.09.11 01:11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서울대 명예교수
미군 헬리콥터가 카불의 미국대사관 상공을 나르는 장면은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TV 화면을 통해 연달아 진행되는 재앙 수준의 상황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아프간 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이 전국을 장악할 것이라는 것을, 그 경우 재앙적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것을, 왜 예측을 못 했을까? 아니면 정보 당국이나 군부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무시했던 것일까? 무시했다면 왜 그랬을까? 자세한 상황은 훗날 미 의회 청문회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현재 미국 언론은 바이든 대통령이 정보, 군사 당국의 보고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과도하게 밀어붙인 결과였다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 시절부터 아프가니스탄에의 개입에 적극적으로 반대해왔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2009년 말 아프가니스탄에의 미군 증파를 결정했다. 되돌아보건대 문제의 씨앗을 키운 셈이다.
미국의 베트남·아프간 실패 이유 민주적 중앙집중 필요 상황에서 견해차 숨기고 허술히 합의한 탓 우리 대선후보들 열린 지혜 있나 |
이때 미군 증파를 반대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는 리처드 홀브루크였다. 홀브루크는 미국 외교관 중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21세에 외교관이 되어 베트남에 파견되어 일했고 1977년에는 36세의 최연소 아시아담당차관보가 되었다. 1990년대에는 발칸분쟁에 매달려 보스니아전쟁을 협상을 통해 종식시켰다. 클린턴 행정부 마지막 18개월은 유엔대사로, 오바마 대통령 때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특별대표를 지냈다.
그는 남부 베트남에 파견되어 민간인들을 상대로 시멘트, 식용유 등을 지원하고 학교를 지어주는 등 민간 지원 활동에 참여했다. 6년간 현장을 누비며 베트남 현지인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미국의 베트남 참전과 전략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이 엄청나게 우월한 군사력을 활용하여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전투에서 패퇴하는 듯 보이는 베트콩들의 도덕적 우월성은 높아지고, 베트남 민심은 떠나가고, 미국의 참전 정당성은 약화되는 역설이 진행되었다.
선데이 칼럼 9/11
그러면서 베트콩은 미국 내 반전여론이 높아져 제풀에 지쳐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홀브루크는 베트남 주민들의 “가슴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 핵심인데 그 핵심이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없이는 평화작전도, 국가건설(nation-building)도 성공할 수 없는데 그 점을 미국 정부가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2006년과 2008년 아프가니스탄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하면서, 베트남전에서와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고 있다고 느꼈다.
아쉽게도 베트남의 경우에서나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그의 의견은 최고정책결정자에 의해 채택되지 못했다. 베트남의 경우, 그는 너무 주니어 관료였고,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클린턴 국무장관의 천거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특별대표가 되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홀브루크의 강한 개성 탓이었다.
어느 국내 언론사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홀부르크와 대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공손하고 예의 발랐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공손함이란 그가 구사하는 변화무쌍한 여러 얼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는 협상에서 상대방에게 고함지르고, 구스르고, 협박하고, 필요하면 상냥하게 비위 맞추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초, 그를 만난 자리에서 공손치 못한 자세를 취하다가 눈 밖에 났고, 그후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핵심 참모들로부터 소외당했다. 그러한 자신의 입지를 인식하고 그는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문제에 대해 입을 닫아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이나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간 문제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하여 과연 국가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쳤다. 그런데 홀브루크의 전기작가 조지 패커(Packer)에 의하면 홀브루크는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민주주의적 중앙집중 방식이다. 지도자는 다양한 견해와 의견과 제안들이 공개적으로 논의되어 위로 올라오게 하되, 한번 정책이 결정되면 그것이 아주 철저하고 기강을 갖추어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아주 빈번하게 정부 안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방에 모여앉아 자신들 간의 의견이 어떻게 다른지는 전혀 논의하지 않고, 일종의 가공적인 합의를 허술하게 만들어내면서 밑바닥의 견해 차이들은 숨겨버린다. 그리고선 제각각 자기 방으로 돌아가 일하는데, 그 일들은 서로가 손발이 안 맞고, 모순되는 일들이다.”
지도자의 신념은 중요하다. 그것은 그가 리드하는 공동체에 방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 상황의 전개는 항상 너무나 빠르고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는 점이다. 지도자의 신념이 오래되고 확신에 찰수록 현실 상황의 복잡성과 변화무쌍함을 무시하기 쉬운데, 그 경우 선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지도자가 충분히 겸손하고 충분히 열려있어 지혜롭게 결정하지 않는다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것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의 지도자가 되었든 공통의 진리이다.
바야흐로 대선 시즌이다. 우리는 미국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국제환경에 처해있다. 과연 우리의 차기 지도자 후보들은 이러한 겸손과 열린 자세와 지혜를 갖추고 있을까?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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