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4-30

鶴山 徐 仁 2021. 6. 9. 20:49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4-30

 

 

06월 09일 (수)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4-30


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25절).
다윗의 이 책망조의 질문은 므비보셋을 모함했던 시바의 말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 <시바가 왕께 아뢰되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16:4). 
 므비보셋으로서는 너무도 억울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적극 사실을 밝힙니다.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26-27절).


그렇습니다. 교활한 시바는 자기의 주인인 므비보셋을 태우고 가야 할 나귀에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다윗에게 바칠 온갖 예물을 싣고 혼자 갔습니다. 제 주인을 버리고 홀로 다윗 왕을 만나 아부하며 므비보셋을 모함했고,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라>(16:4)는 선언도 들었습니다. 시바의 거짓과 므비보셋 모함은 바로 이런 것을 노린 배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끝까지 왕의 처분만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은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28절). 그저 자기로서는 왕으로부터 어떤 처분을 받더라도 지금까지 입은 은혜에 감사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랄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통해 우리가 정작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일깨우십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안전의 축이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부족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난 때문에 늘 속을 끓이고 염려가 그치지 않는 생활보다야 낫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최종의 보장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목하고 배워야겠습니다. 


므비보셋은 역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지 않았으며 배신과 모함 앞에서 한숨을 쉬며 세상을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지키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고 당신이 이해하는 므비보셋의 당시 심경을 적어 보십시오.
-사울 왕의 종이었던 시바의 배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므비보셋의 증언을 듣고도 다윗 왕이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29절)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 므비보셋은 몹시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게 가지 아니하였더냐>(25절)고 묻는 다윗 왕에게 사실을 다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27절)하며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주님, 저희도 세상을 살며 자주 이런 억울한 일이며 모함과 배신을 당합니다. 그럴 때 저희로 하여금 므비보셋처럼 오직 주님께 그 처분을 맡기고 다만 저희가 해야 할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쓴 니콜라스 카에 따르면 첨단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은 생각하는 뇌기능을 기계에 아웃소싱하면서
인간은 깊은 사고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인터넷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窓, window)이 아니라 나를 수시로 침
범하는 ‘창(槍,lance)’이다.”


유영만 저(著) 《독서의 발견》 (카모마일북, 25-26쪽) 중에 나오는 구
절입니다.
수시로 날아드는 SNS 메시지가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어서 빨리 내 메
시지에 반응을 보여 달라고 재촉합니다. 집중하는 뇌기능이 약화되고,
수시로 날아드는 수많은 정보에 반응하기 위해 뇌는 잠시라도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검색은 사색이 아닙니다.  깊은 생각 끝에 길어 올린 사색의 샘물은,
생각 없이 간단히 건져 올린 검색의 수돗물과 그 향기와 깊이가 다릅니
다.
무엇보다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죽음과 결산의 날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성 깊은 기독교 작가 C.S.루이스도 현 세대를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우리 시대는 존재의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고 무관심하다. 오직 어
떻게 해야 성공할런지 고민할 뿐이다.”
생각이 사라져 가는 세대 가운데 영원에 대한 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
라.” (마24:44)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2 Timothy 3:16)
   
회개란 느끼고 고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좀 코믹하고 익살맞은 데가 있다고 본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죽여 달라”는 요나에게 
“그래 한번 죽을 맛을 볼래?”하고 그냥 죽여 버리지 않고 
물고기를 준비시켜놓았다가 
뱃속에 집어넣어 죽을 맛을 보게 하신다. 
상상해 보라. 요나 물고기 뱃속, 
온갖 가스냄새에 꼼짝 달싹 못하는 어두캄캄한 상항에 
진짜 죽음을 맛보는 상황을
“날 잡아 잡수쇼” 하는 요나에게
 죽음의 맛을 살짝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최일환 목사의‘ 죄인을 추적하시는 하나님’에서-


어찌 보면 그 죽음의 맛은 지옥의 고통일 것입니다.
 거기서 요나가 손을 듭니다.
잘못되었다고 느끼거든 속히 돌아서면 됩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悔改란 느끼고 고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했을 때
 영어 성경은 Repent 라는 단어도 썼으나
 어떤 성경은 “Turn back to God” 이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권 안으로 돌아가 순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