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암 6:1-7)
03월 23일 (화)
백성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암 6:1-7) 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백성의 머리인 지도자들>(1절)에게 화를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에 대해 헛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이 경고하신 여러 형태의 심판으로부터 자신들을 든든히 지켜 줄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사람들의 분노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시온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더 할 수 없는 영광이자 모든 화에 대한 확실한 보호막이라고 믿었습니다.
실제 시온은 천혜의 요새였고, 또 인공적인 여러 방비시설들을 갖췄으므로 어느 나라 군대도 쉽게 허물 수 없는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더구나 시온은 다윗 가문의 왕도였으며 특히 성전이 있는 거룩한 성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거기에만 있으면 그 어떤 화도 범접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시온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곧 그들을 위한 성소라고 생각했기에 성소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소속된 성채처럼 크고 화려한 교회가 자신들을 잘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유명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성도들의 자부심은 언제나 남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도자들, 또 시온에서 산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과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는>(4-5절) 부자들을 향해 <그들이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며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7절)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존엄한 신분을 남용했던 자들은 선착순으로 남의 종과 노예가 되는 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고, 늘 교만하여 자신만만했던 시온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부끄러움을 당케 되고, 넓은 상아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온갖 호사를 다 누렸던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쪼그리고 자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도, 시온에서 태어나고 늘 시온의 자부심 속에서 사는 금수저들도, 많이 가진 부자들도 교만하거나 하나님의 경고를 비웃으면 반드시 화를 피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흉한 날이 멀다 하여>(3절) 계속 그 길을 가다가는 결국 하나님의 혹독한 진노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부디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자성의 계기가 되길 빕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지도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신 이유는?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의 부자들의 생활 수준은? -시온이 거룩한 도성이었던 이유는?
주님, 한 나라의 지도자들이나 부자들은 일반 백성의 머리기 때문에 특별히 경건하고 깨끗하고 성실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지도자들에게는 일반 백성 이상의 높은 도덕성과 인품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지도자들대로,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전혀 모범적이지 않았고, 경건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흉한 날이 멀다 하며> 포악하게 굴었고, 교만하며 든든한 성 시온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기대로 기고만장했습니다. 저희들 부디 과거 이스라엘을 반면교사로 삼아 더욱 자신을 살피며 겸허하게 살아가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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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의 망치질과 마지막 망치질
“나는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석공을 찾아간다. 그는 바위를 내 리칠 때 특별히 강한 힘을 주지 않고 백 번에 걸쳐 망치질을 한다. 마침내 백한 번째가 되면 바위가 갈라진다. 바위를 가른 것은 마지막 일격이 아니라 그 전까지 바위를 두드린 백 번의 망치질이다.” - 제이콥 리이스 - 윤성 저(著) 《좋은 글 여기 다 있네》 (이가출판사, 506족) 중에 나 오는 구절입니다. 어떤 분야이던 그 분야의 천재가 타고난 것인가 길러지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영원한 평행선입니다. 실력은 먼지처럼 쌓입니다. 이른바 ‘1만 시간’을 통과한 꾸준한 훈련과 연습을 한 사람은, 천재가 부럽지 않은 명인(名人)의 경지에 이릅니다. 천재의 분야라고 여겨 포기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가시권 안에 들어있는, 내가 품어주기를 기다리는 달걀 입니다. 최재천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피카소는 평생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는 평범한 것들도 많았고 솔직히 수준 이하의 졸작들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많이 그리다 보니 남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수작을 남기게 된 것 이다.”《통섭의 식탁》(명진출판, 65-67쪽)
구약 기드온의 군대에는 모두 1만 명의 불타는 용사가 자원했지만, 하 나님으로부터 주위를 살피며 물을 마시는 300명만 선택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전문성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손들고 자원하는 사람이 소중하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서 ‘준비된 사람’을 선택하신 겁니다. 준비된 일꾼은 백번의 망치질로 부지런히 경건과 실력을 쌓는 사람입니 다. 그 실력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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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장 13-14절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잠언 3장 13-14절> Blessed is the man who finds wisdom, the man who gains understanding, for she is more profitable than silver and yields better returns than 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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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양의 말로는 양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양순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좋게 말할 때 양순이지 이 말은 우둔하다는 말이고 미련하다는 말이기도 한다. 그래서 양은 위험이 닥쳐와도 깨닫지 못한고. 누가 와서 끌어가도 그냥 끄는 대로 끌려간다고 한다. 마치 어린 아이들과 똑같다. 어린 아이들은 과자 사 준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좇아간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아무나 따라가지 못하도록 훈련하고 길들여서 내 양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면 양은 대부분 자기 목자 외에는 따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양이 목자를 알고 잘 따라가다가도 일단 병이 들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아무나 따라가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위험을 당해서 죽는다고 한다. 이것이 무지한 양의 말로이다. 예수님의 양으로 비유되는 우리는 어떠한가? .-이정익 목사의 ‘인생의 목자’에서-
사람은 조금만 한눈을 팔면 쉽게 유혹에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사상가들을 보내시고 성현들을 보내셔서 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길을 외면하고 이탈해서 때로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건강하고 바르게 살 때는 바른 신앙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단 신앙에 병이 들게 되면 이정표를 바로 보지 않고 보아도 분간을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탈하려고 합니다.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만신창이가 된 후에야 후회하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손 들고 옵니다." 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
03월 22일 (월)
성문에서 (암 5:9-17) 9.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본문에는 <성문에서>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성문에서 ...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10절).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12절).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15절).
<성문>이란 유대 사회의 한복판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어느 성읍이든 <성문>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 재판은 물론 군대의 출정식과 개선 행사며 시장까지도 다 여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유대 사회가 제대로 되려면 이 <성문> 앞 광장의 질서와 문화와 정의가 바르게 확립되고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7절) 내던졌습니다. 그들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했고, 힘없는 자를 밟고 부당한 세금을 거뒀고(11절),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들을 억울하게(12절) 했습니다. 성문에서 열린 법정에서 그만큼 부당한 재판을 많이 벌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사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11절)고 하셨고,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 울음꾼을 불러다 울게 할 것>(16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문>의 정의가 제대로 서야 그 사회가 건강할 뿐 아니라 망하지 않습니다. 성문의 법정에서 뇌물이 오가고, 억울한 자들이 양산되고, 성문의 시장에서 거짓과 사기와 온갖 협잡이 판을 치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사 모든 사람들이 그 광장에서,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하며 울게 하십니다.
나부터 정의를 세웁시다. 나부터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합시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14절)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고 응답하고 결단합시다.
-<성문>이란 어떤 곳일까요?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이 시대 우리 사회와 과거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의 <성문>을 냉정하게 비교해 보십시오.
주님, <성문>이란 곧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현실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고 하셨는데,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말씀과 기대에 바르게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했습니다. 선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구했습니다. 부디 오늘 저희들의 <성문>을 살피게 하사 저희부터 분부하신 정의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반역한 과거 이스라엘의 혹독한 심판을 기억하며 저희는 그런 화를 자초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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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사랑하는 것
“‘사투리’ 라는 다분히 업신여기는 말이 암시하듯,‘방언’ 은 근대 신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의 문장과 글에 입말을 인위적으로 접목 시키면서 표준어의 세계로 발전한 문어(文語)의 하인이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워낙에 소외되고 힘없는 것들을 편애하는 성향이 있다 보니,시인들은 거개가 방언에 유별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선우 손택수 공저(共著) 《교실 밖으로 걸어 나온 시》 (실천문학사, 7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숭어는 그 이름이 백 가지도 넘는다고 합니다. 전라도 영산강변의 명산 에서는 성장 과정에 따라 ‘모쟁이 → 모치 → 무글모치 → 댕기리 → 목시락 → 숭어’라 부르고,강진에서는 ‘모치 → 동어 → 모쟁이 → 준거리 → 숭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방언 사투리란 어찌보면 표준어에 밀려난(?) 힘없는 변두리 언어입니 다. 그러나 각 지방의 고유한 본질을 간직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시인들은 이같이 밀려난 방언들을 좋아하고 깊은 애정을 쏟습니다.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들에게 깊은 사랑을 주십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그을름만 가득하기에 꺼버리는 것이 세상 입니다. 상한 갈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에 뽑아 버리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에 대한 무 한한 애정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 리고 다시 등불이 타오르게 해 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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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9편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편 7절> But now, Lord, what do I look for? My hope is in you. <Psalms 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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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뜻 있는 인생이 되겠는가 오늘 이 시대는 한번 살아 볼 만한 세상이다. 분명 오늘날은 문제도 많고 사고도 많기는 하지만 내 힘으로 내 인생을 만들어 가며 가꾸어서 이 땅에 무엇인가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뜻 있는 인생이 되겠는가? 오늘은 내가 할 일이 아직도 많은 그런 시대이다. 우리들이 조금만 깊이 생각하고 살아가다 보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 의로운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좋은 정신을 전염시켜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의로움이 그 사회를 변화시켜서 그 나라로 하여금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정익 목사의 ‘인생의 목자’에서-
이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몫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세상이 하도 시끄럽고 이기적이고 불의하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은 시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일 것입니다. 이 나라가 더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총이 이 땅에 임하고 이 사회가 더 밝고 건강해지는 그런 축복이 주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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