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한림원은 왜 ‘無名 시인’에게 노벨상을 줬을까
문학상은 새 우주의 제안... 하루키보다 글릭 더 반가워
입력 2020.10.19 03:00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
’무명 시인‘이란 제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93년 퓰리처상, 2014년 전미 도서상을 받은 시인에게 무명(無名)이라는 무례라니.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77). 과문한 탓이겠지만, 발표 전에는 시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 번역된 시집 한 권이 없다. 류시화 시인 등이 엮은 시선집에 한두 편씩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만 무명이었을까. 미국에서도 글릭은 주류가 아니었다고 한다. 중요한 상을 받은 시인임에는 분명하지만, 문학 전공 교수나 학생에게도 ’노벨문학상 글릭‘은 예상 밖이었다는 것. 글릭의 시를 번역·소개한 외국어대 정은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는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메리 올리버처럼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지도 못했고, 평자들도 주목하지 않아서 학교에서도 많이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정 교수가 페이스북에 덧붙인 말이 인상적이다. “대단하지만 두루 대단하다고 인정받지는 못했던 시인”. 글릭이 10년 넘게 글을 기고했던 유력 문예지 뉴요커조차 그의 수상에 ’조금은 의외‘라는 표현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소개나 해설은 글릭을 낮추고 한림원의 선택을 깎아내릴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위로와 치유보다 소음(騷音)과 추문(醜聞)의 본거지였다. 가수 밥 딜런에게 상을 주면서 시작된 불협화음은 급기야 수상 연설 표절 논란으로 번졌고, 2년 전에는 심사위원 배우자의 성추행 스캔들로 옮아붙으며 수상자를 뽑지 못했다. 한 해 걸러 뽑은 지난해 수상자 2명 중 1인은 독재자 밀로셰비치를 옹호한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 한트케의 문학적 성취와는 별도로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이다.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 /게티이미지 연합뉴스
올해의 수상자를 한림원의 안전한 선택으로 평가절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의 큰 의미 중 하나는 오랫동안 문학계 내부에서만 인정받던 작가와 작품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린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하고 약한 우리들처럼, 글릭은 상처받기 쉬운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였다. 중간에 뛰쳐나온 대학은 결국 마치지 못했고, 감정적 혼란과 거식증으로 오래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삶의 고독과 고통에 굴복하지 않았고, 늘 다시 싸웠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글릭의 시 ’눈풀꽃‘(snowdrops)을 좋아한다. 눈 덮인 땅에서 피어나는 속성을 지녔다는 꽃.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기대하지 않았었다,/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예상하지 못했었다./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차가운 빛 속에서/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눈을 뚫고 피는 꽃, 눈풀꽃. /flciker
수상자 발표 이후 열흘.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는 많은 문학 애호가가 자발적으로 그의 시를 번역하며 퍼나르고 있다. 시집을 번역·출간하려는 출판사의 잰 발걸음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문학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향유하는 것. 오랫동안 유력 후보였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다른 유명 문인의 지지자들은 섭섭하겠지만,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시구로 새로운 우주와 인간의 치유력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이 ‘무명 시인’이 고마울 따름이다. 코로나와 진영 논리에 지친 요즘 같은 시국에는 더더욱. 시인 만세.
눈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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