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대표하는 국민 시인 푸시킨은 20대의 7년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전반부는 남쪽 오데사 부근에서, 후반부는 북쪽 시골 영지에서 지냈는데 북쪽 유배가
끝나갈 무렵 그는 한 편의 짧은 시를 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 찾아오리라. /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괴로운 법. / 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리니 /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우리."
26살의 푸시킨은 이웃 살던 15살짜리 귀족 소녀의 앨범(시화첩)에 이 시를 써주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아저씨'가 연하디 연한 삶의 꽃봉오리에 인생 조언을 해준 셈이다.
머지않아 밀어닥칠 거친 비바람은 상상 못한 채 마냥 밝고 행복하기만한 어린 처녀가
사랑스럽고도 안스러웠을 법도 하다.
시는 '쨍하고 해 뜰 날 돌아 온단다' 식의 무턱댄 희망가가 결코 아니다. 앞부분만 잘라
읽으면 희망가지만, 끝까지 읽으면 절망가가 되기도 한다.
"현재는 괴로운 법"이라는 '인생 고해'의 직설 때문이다. 오늘을 견디며 꿈꿔온 그 미래도
막상 현재 위치에 오면 꿈꾸던 것과는 달라 괴로울 수 있다. 삶이 나를 속였다는 배반감은
거기서 온다.
그런데도 시인은 '다 지나간다'는 덧없음의 치유력에 기대어 현재를 견뎌낸다. 그리고
과거가 된 아픔과 화해한다. 지나간 것이라고 어찌 모두 아름답겠는가? 철없던 지난날의
회한이 "혼탁한 숙취처럼 괴롭다"고 시인 자신도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삶이고, 삶 자체가 소중해서다.
푸시킨도 지금의 우리처럼 '콜레라 시대'를 경험한 적이 있다. 1830년, 치사율 50%의
역병으로 모스크바는 봉쇄되었고, 시인은 약혼녀를 그곳에 남겨둔 채 3달간 작은 영지에서
자가 격리를 했다. 죽음이 코앞까지 밀어 닥쳤던 그때, 그는 또 쓴다.
"그러나 죽고 싶지 않다. / 살고 싶다, 생각하고 고통받고자 / 슬픔과 걱정과 불안 한가운데
/ 내게도 기쁨이 있으리니."
그는 삶을 사랑했다. 예전엔 푸시킨 시가 너무 평범하고 산문적이어서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런데 이만큼 살고 보니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짜고 진리다. 나 역시 어린 삶 앞에 서면
지나간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또 행여 그 삶이 꺾일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학생들과
시를 읽을 때면, 그들이 헤쳐가야 할 고통이 걱정돼 예방약이라도 발라주고 싶어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는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다.
해방기에 처음 소개되어 개발연대기를 거치면서는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의 깃대였다.
공장 작업대에, 만원 버스 문짝에, 고시생 책상 귀퉁이에 누구 시인지도 모른 채 붙어있곤
했다. 90년대 들어 세월이 좋아졌는지(1995년 당시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행복하다'고
답했다는 여론 조사 기록이 있다) 눈에 덜 띄더니만, 근래 다시 국민시로 자리 잡았다.
번안시에 곡을 붙인 노래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옆 나라 일본에서 이 시는 인기가 없다. 반면 중국은 초·중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
온 국민이 한 소리로 낭송할 정도다. 내일을 향해 일치단결 전진하는 붉은 인민의 짱짱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푸시킨 시는 달리 읽힌다. 오늘 우리가 애송하는 시는 1960~70년대
그 희망가가 아닐 것이다. 삶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고달픔은
과거의 역경과는 거리가 멀다. 예전에는 미래를 향해 달리느라 괴로웠는데, 요즘 청년들은
'미래가 없다'며 괴로워한다.
전에는 앞만 보느라 정신없었는데, 이제는 '지나간 것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미래를 향한 마음이 없으면, 현재를 이겨낼 도리가 없다. 오늘의 절망감은 물리적 실존
너머로 뻗쳐 있다.
그래서 푸시킨의 시를 다시 읽는다. 현실이 차단해버린 희망의 불씨를 시 (노래)로써
되살리면서, 낙심한 서로를 위로한다. 그렇게 우리는 치유 없는 시대를 치유해가는
것이다.
- 김진영 /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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