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농민의王, 치매 아내 간병 ‘한국인 슈바이처’
[아무튼, 주말] [김성윤 기자의 공복] 아프리카 식량난 해결… ‘추장’까지 된 한상기 박사
입력 2020.10.17 03:00
한상기 박사가 아프리카 추장 옷과 모자를 착용하고 추장을 상징하는 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한 박사는 카사바를 개량해 식량난 해결에 기여한 공로로 1983년 추장으로 정식 추대되면서 이 의상과 지팡이를 선물 받았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아프리카 추장이 된 한국인 식물학자’ 한상기(87) 박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식물 육종·유전학자인 한상기(87) 박사는 1971년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있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로 갔다. 아프리카인들이 주식으로 삼는 덩이뿌리 식물 카사바를 개량해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성 높은 신품종을 개발했다.
한 박사 덕분에 아프리카 여라 나라가 기아에서 벗어났다. 그가 개량한 ‘수퍼카사바(supercassava)’는 아프리카 41국에 보급됐다. 나이지리아는 세계 1위 카사바 생산국이 됐다. 카사바 외에도 그가 개량한 고구마는 66국, 얌은 21국, 바나나는 8국에서 재배되고 있다.
식량난을 해결한 공로로 그는 ‘농민의 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명예직이 아닌 정식 추장으로 추대됐다. 영국 왕실은 그를 생물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추대했고, 세계식량기구(FAO)는 고문으로 임명했다.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국인 슈바이처’라는 별명도 그를 따라다닌다. 그의 이야기는 동화책으로도 나왔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 박사는 한동안 눈에 띄는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 최근 10여 년간 그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병해왔다. 그리고 자신의 평생 연구를 총정리한 ‘작물의 고향’(에피스테메)을 펴냈다. 반세기 동안 지구를 몇십 바퀴 돌면서 연구한 세계의 농업과 작물의 역사를 집대성한 책이다.
그는 “아프리카 삼수갑산(三水甲山) 가자 하니 선뜻 따라나서서 23년간 무진 고생하며 나를 뒷바라지해 준 고마운 나의 아내 김정자 필로메나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적었다. 김 여사는 책이 출간되고 한 달여 뒤인 지난달 27일 숨졌다.
농민의 왕이었지만, 최근 10년은 한 사람의 간병인이었던 한 박사. 왕과 간병인, 각각의 삶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한 교수를 지난 12일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수원에서 만났다. 한 박사는 “23년 아프리카 생활의 외로움과 가슴 졸임이 병이 된 건 아닌지 괴롭다”고 자책하면서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선진국 연구소 대신 아프리카 선택
—IITA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식물육종연구소에서 동시에 제안을 받으셨다면서요.
“1971년 나이지리아 라고스를 경유해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어요. 김포공항을 출발해 홍콩-방콕-뭄바이-아멘(예멘)-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나이로비(케냐)-엔테베(우간다)를 경유해 나흘 만에 라고스에 도착했어요. 당시 서울에서 라고스까지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편이었죠. 라고스에 있는 영빈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자동차로 1000㎞ 거리에 있는 연구소로 갔어요. 서울에서 출발한 지 닷새 만에 본 IITA는 매우 훌륭했어요. 미국 록펠러재단과 포드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직원은 1500명이나 됐죠. ‘연구를 원 없이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당시 한국은 농업 연구에 대한 지원이 턱없이 부족했죠. IITA에 가기로 결정하고 케임브리지 행은 포기. 곧바로 귀국해 나이지리아로 가는 수속을 밟았지요.”
—열악한 제3세계 국가보다는 선진국을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1970년대는 식량난이 제일 심했던 때입니다. 인구는 증가하고, 자연재해는 많았지요. 밀 개량으로 식량난 해결에 이바지한 미국 농학자 노먼 볼로그(Borlaug)가 197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저도 농학으로 인류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에 케임브리지 대신 IITA를 선택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주식인 카사바 품종 개량을 어떻게 하게 됐나요.
“연구소장이 카사바를 맡아서 해보라고 하더군요. 당시 나이지리아에서는 카사바가 병에 걸려 말라 죽으면서 기아가 심각한 문제였거든요. 카사바는 원산지가 남미 브라질이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는 세계 8대 작물 중 하나입니다. 고구마처럼 생긴 덩이뿌리를 가공하면 밀가루처럼 돼요. 이걸 ‘가리’라고 부르죠. 가리에 더운물을 넣고 저어 떡처럼 만들어서 반찬을 찍어서 먹습니다. 25국 8억 명의 주식이에요.”
한상기 박사가 추장으로
추대된다는 뉴스가 실린
나이지리아 현지 신문과
추장 지팡이,
그동안 사용한 여권 무더기.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에서
23년 근무하는 동안 한 박사는
여권에 도장 찍을 자리가 부족해
종이를 여러 장 덧대 사용해야 할
정도로 출장이 잦았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카사바를 연구한 경험이 있었나요.
“하지만 그때까지 카사바를 본 적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막막했겠어요.”
—신품종 카사바 개발은 얼마나 걸렸나요.
“1971년 시작해 1976년 개발에 성공했으니 5년 걸렸네요. 나이지리아 전역을 돌며 재래종 카사바 종자를 최대한 수집했고, 카사바 원산지인 브라질로 가서 우수한 카사바 종자를 받아왔습니다. 카사바를 공격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대한 저항성 유전자원을 찾기 위해서였죠. 브라질에서 가져온 종자의 싹을 틔워 계통을 만들었습니다. 행운이었던 건, 나이지리아 이바단 대학 농업시험장에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저항성이 있는 카사바 계통을 발견했습니다. 과거 영국 연구진이 나이지리아 카사바 재래종과 브라질 카사바 야생종을 교잡해 얻은 계통을 보존해둔 것이었죠. 이걸 브라질에서 가져온 카사바와 교배해 수천 개의 계통을 다시 만들고, 이 중에서 병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계통을 선발해 새로운 카사바를 만들어냈지요.”
—신품종을 개발하려면 종자가 다양할수록 유리하겠군요.
“필요한 유전자원을 찾을 후보가 많을수록 유리합니다. 종자 종류가 적어서 찾지 못하면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어요.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양성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신품종 카사바를 트럭에 싣고 직접 보급하러 다니셨다면서요.
“개량한 품종을 농민이 이용 못 하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트럭에 싣고 다니다가 카사바가 병든 밭이 보이면 신품종을 주삿바늘처럼 꽂았습니다. 카사바는 씨앗이 아니라 대(줄기)를 심거든요. 시골 장터에서 부녀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요. 카사바는 이들이 주로 재배하는 ‘여자 작물’이거든요.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에 진출해 있던 셸·BP 등 석유 회사들도 도왔습니다. 이 석유 회사들이 기름을 생산하는 지역에서 카사바가 죽어갔는데, 지역 주민들과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는 석유 회사들이 카사바를 개량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왔어요. 정말 몇 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나이지리아 전역으로 번져 나갔지요.”
한상기 박사가 자신이 개발한 카사바 개량종을 '수퍼카사바'라고 소개한 세계은행 책자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한 박사를 '조용한 혁명가'라고 칭송했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세계은행은 '한 박사가 개발한 ‘수퍼카사바(supercassava)’는 수확량이 헥타르(㏊)당 12t으로, 기존 재래종 카사바의 2배가 넘는다"고 1993년 평가했다. 한 박사는 “이후 다시 만들어낸 개량종은 3~4배 더 많다”고 했다. 식량난을 해결한 공로로 나이지리아 요루바족의 오요 요바(왕)는 1983년 한 박사를 추장으로 추대하고 ‘세리키 아그베(Seriki Agbe)’라는 칭호를 주었다. ‘농민의 왕’이라는 뜻이다. 한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추장은 ‘(사람뿐 아니라) 산천초목을 다스린다’며 존경받는 인물”이라며 웃었다.
—'한국인 슈바이처'라는 별명은 달갑지 않다고요.
“슈바이처 박사가 병원을 세워 구호 활동을 했던 가봉 랑바레네에는 이런 주장을 쓴 비석도 있어요. ‘슈바이처 박사, 당신이 아프리카에 와서 노벨상도 탔지만 우리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이 뭐요?’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 건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했어야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의 명성만 높였다는 얘기죠. 저도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한 박사는 아프리카인 스스로 자력갱생할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에 힘썼다. 국제기구에서 연구비와 지원금을 끌어와 농학 석·박사 50여명과 농촌 지도자 700여명을 교육시켰고, 이들이 다시 농촌 지도자를 훈련시키도록 해 농촌 지도자 1만여 명을 배출시켰다. 세계 과학지 등에 발표한 논문은 160여편. 스웨덴 국제과학재단 자문위원, 미국 코넬대·조지아대 명예교수, 국제구근작물학과 회장 등을 역임했다. 국내에서는 서울대 개교 50주년 기념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상도 받았다.
과거 돌아가도 다시 아프리카 택할 것
한상기 박사가 23년 동안 작물 육종 개량과 인류 식량난 해결에 전념할 수 있었던 건 아내와 가족의 도움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아프리카로 오면서 큰딸은 한국에 두고 아내와 그 아래 자녀 셋을 데려왔다.
—당시 4~5일이 걸리는 아프리카로, 그것도 200만명이 전쟁과 아사로 사망한 나라로 가자고 아내를 설득하기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어려웠죠. 아내가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영어도 잘 못하지, 음식도 아이들 교육도 문제지, 병도 있지….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도 있었죠. 제 결정에 따라준 아내가 고맙습니다.”
—음식이나 자녀 교육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한국에서 먹는 찰기 있는 쌀이 없어서 ‘안남미’라고 흔히 부르는 인디카 계열 길쭉하고 풀풀 날리는 쌀로 밥 지어 먹었어요. 김치는 한국에서 가져간 고춧가루에 양배추를 버무려 담갔고요. 아이들은 나이지리아 아이들 다니는 현지 중학교에 보냈어요. 그러다가 아내가 연구소 직원 부인들 몇 명과 함께 통신 교육을 했어요. 미국에서 교육 매뉴얼을 보내주면 그걸 가지고 집에서 가르쳤어요. 요즘처럼 화상 교육은커녕 전화 통화도 힘들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고등학교 올라갈 때 미국으로 아이들을 보냈죠.”
—큰딸은 왜 한국에 두고 가셨나요.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아프리카로 데려가기가 힘들었습니다. 나머지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다니거나 막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여서 데려갈 수 있었고요.”
—따님이 ‘왜 나만 떼어놓고 갔냐’며 섭섭해하지는 않던가요.
“섭섭했겠지, 하지만 말을 하지는 않더라고요(웃음). 큰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한 건 뭔가요.
“병(치매)에 걸린 거죠. 아내에게 잘해준 건 하나도 없어요. 고생만 시켰지. 아프리카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아프리카 생활은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깨진 플라스틱 양동이를 기워 사용하고 슬리퍼가 해지도록 신었습니다."
2010년대 초 한상기 박사와
김정자 여사 부부. /한상기
—아내의 치매가 본인 탓이라고 자책하시나요.
“아내 혼자 연구소 사택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릴 때가 많았어요. 연구를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등으로 출장을 수천 번 다녀올 때마다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출장 다니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정비도 되지 않은 싸구려 비행기에다 기상 예보도 없어서 출장 나가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걱정했지요. 실제 같은 연구소 동료 셋이 출장 갔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죽었습니다. 게다가 피 묻은 손에 커다란 칼 들고 들어오는 강도도 많아 연구소에 경비가 있어도 사택에 혼자 있기가 위험했어요.”
한상기 박사는 61세이던 1994년 IITA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갔다. “어려서 미국으로 보낸 두 아들 곁에서 지내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이었다. 부부는 클리블랜드에서 21년 살았다. 한 박사는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는 걸 2010년 알았다.
—어떻게 치매인 걸 아셨나요.
“평생 써오던 일기를 갑자기 쓰지 못하더라고요. 그리고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됐고요.”
—치매인 아내를 간병하면서 뭐가 제일 힘드셨나요.
“초기가 제일 어려웠어요. 자꾸 ‘집으로 가자’며 보채요. 밖으로 나와서 차를 타고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오면 조금 나아졌지요. 미국에서 살 때는 저 혼자 아내를 돌봤습니다. 그러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간병인이 필요해지면서 2015년 한국에 돌아왔어요. 큰딸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우리가 제일 돌보지 못한 딸이 제일 고생했기 때문에 더 미안하지요. 폐렴 등 치매가 악화하면서 2018년부터 요양원에 있다가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갔죠. 너무 오래 고생했는데, 이제 고통은 없겠지요.”
—'아프리카에 가지 말았을걸' 하는 후회는 없나요.
“전혀 없어요. 과거로 돌아가도 다시 갈 겁니다. 서산대사의 ‘일왕불퇴’(一往不退·한번 갔으면 물러서지 말라)와 조주 스님의 ‘일진불퇴’(一進不退·한번 나갔으면 돌아오지 말라)를 평생 좌우명으로 살았습니다.”
한 박사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이야기했다. “어떤 길을 택해야 하나, 젊을 때는 저도 불안했습니다. 아프리카를 택한 것은 편한 길이 내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다져놓은 길은 찌꺼기 길입니다. 편하긴 하지만 내 길은 아니었습니다. 시체로 돌아오더라도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 한다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23년간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렇게 연구해서 식량 문제를 해결했으니 보람 있고 후회 없어요. 감사하고 또 행운이지요.”
—사회생활을 가정보다 앞세우기 힘든 세상이 됐습니다. 어떻게 균형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하는 일이 인류에게 유용한 일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성취만큼이나 가족과 가족의 삶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이제는 듭니다. 병과 싸우는 아내 머리는 제가 잘랐습니다. 신품종 카사바를 개발했을 때 만큼이나 뿌듯하더군요.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의 균형,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야 명예나 성취도 의미 있겠지요.”
생전 아내 김정자 여사의 머리를 다듬는 한상기 박사. /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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