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지치다 (삼상 14:16-30)
09월 28일 (월)
백성들이 지치다 (삼상 14:16-30) 16.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24절). 사울 왕이 블레셋을 완전히 섬멸하겠다는 의지와 결심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 맹세는 이전 여호수아의 경우(수 10:13)와는 달리 여호와에 대한 진정한 충정과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공명심과 명예심을 높이기 위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일방적으로 밀어 부친 횡포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사울 왕의 그 같은 행동은 여러 가지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고 그 전쟁에서 이기고도 백성들의 신임을 잃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열정이 가져다주는 폐단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선례로 남고 말았습니다.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들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벌집의 꿀을 찍고 그의 손을 돌려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27절).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는 중, 피곤하고 허기에 지쳤던 요나단이 수플 나뭇가지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해 먹고 기력을 다시 회복하였다는 얘깁니다. <그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28절). <피곤하다>는 히브리말 <야아프>는 <탈진하다>, <극도로 지치다>는 뜻의 <우프>에서 파생한 말로 당시 사울의 금식령으로 인해 백성들이 심히 곤비한 상태에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요나단이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29절)라고 한 것은 <이 땅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해롭게 했다> 혹은 <이 전쟁을 망쳤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실은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백성들이 저지르는 죄보다 지도자의 리더십을 더 문제 삼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세상의 공격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려 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에게는 반역이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이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18절)고 한 이유는? -본문 20절을 보고 당시 블레셋 진영에서 발생한 상황을 간략히 정리해 보십시오.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가 결국 믹마스 전투를 망치게 했다는 뜻으로 진술한 요나단의 발언은 본문 어디에 나옵니까?
주님, 사울 왕의 잘못된 금식령이 결국은 이스라엘 군사를 탈진 상태에 빠지게 했고, 그로 인해 블레셋을 철저하게 추격하여 섬멸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믹마스 전투의 승리가 불완전한 상태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아이성 전투에서 아간이 전리품을 숨겨 패배했던 것처럼, 입다가 자신의 경솔한 맹세로 사랑하는 딸을 잃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군대도 사울의 일방적인 맹세로 <곤란>에 빠졌습니다. 부디 이 땅의 모든 리더들도 그게 무엇이든 보다 신중하고, 보다 책임적이고, 보다 진지하게 결정하고 정책을 수립하여 <이 땅이 곤란에 처하는 일>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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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없는 예수님
“카타콤베의 벽화들에서 그리스도는 수염이 없는 채 로마식 의복을 입고 있는 반면,고딕 회화에서는 금발이다.”
리차드 빌라데서 저(著) 손호연 역(譯) 《신학적 미학》 (한국신학연구소, 13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카타콤(Catacomb)은 초대교회가 로마황제의 박해를 받을 때 이용한 96Km에 달하는 지하 묘소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든 사회적 신 분과 지위, 재산을 놓고 지하 카타콤으로 들어가면서 신앙을 지켰습니 다. 그곳에서 무려 300여년 동안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카타콤의 벽화들은 그런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양식과 믿음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카타콤 지하 무덤에서 초대교인들은 자기 들을 닮은 수염조차 없는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로마의 칼릭스투스 카 타콤는 선한 목자 예수상이 있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목에 매고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교회는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 오게 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초월적인 눈과 후광을 가진 범접할 수 없는 분으로 그려졌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목에 매고 돌 아오는 소박한 예수님, 그리고 초월하신 예수님. 둘 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초월하신 예수님, 그러나 그토록 위대하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과 같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찾아 목에 메고 오시는 소박하고 고마운 분이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 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1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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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 'If you can'?" said Jesus.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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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왜 그럴까요? 왜 용서는 이토록 힘이 들까요? 그것은 용서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방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 하나님처럼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용서하는 성품을 부여받았습니다. 타락하기 전에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 줄 가능성도 없었지만,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분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품을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용서가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김영봉의 [가만히 위로하는 마음으로] 중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려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안에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상처의 흔적이 우리 인생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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