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8년부터 1450년까지 흑점 기록이 하나도 없다. 또한 그때를 전
후로 150년간 흑점 기록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양홍진 한국천문
연구원 박사는 이 시기가 소빙하기와 일치하는 때로,‘태양 활동이
매우 적었고 일조량이 적어 농사 짓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 견해를 밝혔다. 실제로 세종 시대는 가뭄의 연속이었
다.”
KBS 한국사傳 제작팀 저(著) 「한국사傳3」(한겨례출판, 245-24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종 시대는 환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즉위
이후 10여년간 단 한 해도 가뭄이 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흙을
파먹는 백성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세종 6년에는 가뭄 때문에 강원도
전체 가구의 3분 1이 사라지고 농토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농
업이 국가의 기반이던 시대에, 연이은 흉년은 국가적 위기였습니다.
이에 세종은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거처하던 강녕전을 버리고
경회루 한쪽에 초가집을 짓고 무려 2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고민 속에
열하루 동안이나 앉은 채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이런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과학영농을 시작하
여 농업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측우기(測雨器), 자격루, 간의(簡
儀), 혼천의(渾天儀) 등 많은 과학기구를 발명하게 합니다. 또한 모를
옮겨 심는 이앙법을 실시하여 획기적인 농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
다. 세종 대에 정비한 이양법은「농사직설(農事直設)」 이라는 책에 잘
적혀 있습니다. 그 결과 세종 후대에 토지 1결당 생산량은 1200두까지
높아졌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골리앗을 만나면 저 큰 덩치를 감당할 수 없다고
지레 죽어 버립니다. 믿음의 사람이 골리앗을 만나면 덩치가 저렇게
크니 아무데나 돌을 던져도 맞을 거라며 눈이 반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