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정부 '정책 不變' 입장 속 기업들은 자신감 잃어가고
리더십 난조로 나라 전반에 회복 힘든 '내리막길' 징후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현 경제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며칠 전 여당 지도부와의 송년 오찬에서 "경제 실패 프레임이 워낙 강력해 성과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까지 든다. 문 대통령은 그러나 "올해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확실히 체감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며 정책 기조 '불변' 입장을 밝혔다.
모처럼 경제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 대통령으로서는 서운하겠지만 작금의 상황은 훨씬 더 절박한 인식과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고용 지표가 양적인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자평했는데 우리 경제는 그런 정도를 넘어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잃고 내리막길로 빠져드는 징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력 산업이 흔들리는 가운데 기업이 자신감을 잃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설비와 기계류 투자 감소세가 심각한 가운데 투자 계획을 줄이거나 철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나 홀로 호황'을 누리던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가 이미 충격적인 역성장에 들어갔고 올 상반기 상황은 더 암울해 보인다. 우리를 먹여 살려온 성장 동력 전반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그 배후에는 '중국 굴기(�起)'가 상수(常數)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1997년의 외환 위기와 2008년의 금융 위기에는 없었던 실물경제의 중차대한 위기다. 김현욱 KDI 경제전망실장은 "몇% 성장률이냐보다 성장의 지속 가능성 자체가 걱정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미·중 무역 전쟁과 양국 경제의 동반 하강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일각에선 중국이 미국의 압력으로 첨단 산업 육성 전략인 '중국 제조 2025'를 속도 조절할 것이며, 이로 인해 한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러나 작년 말 중국 하이난(海南)성에서 열린 한·중·일 협력 대화에서 필자가 체감한 기류는 달랐다. 중국은 자신이 한국의 최대 수출국임을 강조하며 '중국발(發) 역내 분업'에 한국이 따라와 줄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트럼프 미 행정부 역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세계 최강 대국인 미·중의 동시 협공은 한국 경제사에 전례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지탱해왔던 '근로정신'도 흔들리고 있다. 급속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의 획일적 강행은 고용 축소와 폐업을 촉발하고 있다. 정부 정책은 국민 세금으로 철밥통 공무원 일자리와 무분별한 복지를 늘린 남미형 포퓰리즘을 닮고 있다. 반(反)기업 정책 속에서 열심히 일해 남다른 성취를 이룰 의욕마저 감퇴하면서 경쟁과 효율 같은 단어는 요즘 아예 사라졌다. 이 역시 한국의 발전 경로에 없던 일이다.
국가 리더십의 난조는 더욱 뼈아프다.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을 외치며 빅 데이터와 공유 경제, 원격 진료의 규제 혁파를 장담해 왔지만 민노총을 비롯한 현 정권의 기둥을 이루는 특정 이해 집단의 벽에 가로막혀 실제로 이뤄진 것은 거의 없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부정(否定)의 정치'다. '촛불 혁명'을 등에 업고 출범한 현 정권은 자신의 편이 아니면 '적폐'로 규정하고, 이를 처벌하고 배제하는 '내로남불'의 이분법 정치에 몰두해왔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낳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건국 논쟁'까지 일으켰다. 이전 정권과의 무조건적 차별화가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이긴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이만한 총체적 폄하는 결코 없었다.
이러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한국도 따라갈 것'이란 시각이 있는데, 한국에는 일본과 같은 축적된 기술력이나 자금력이 없다. '망해봐야 정신 차릴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지만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여기서 넘어지면 회복 불능이고 그러면 구한말(舊韓末)처럼 주변부 역사로 회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죽하면 '신한말(新韓末)'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겠는가.
위기(crisis)의 어원은 그리스어(krisis)로 판단과 결단을 뜻한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은 이제
라도 편 가르기를 그만하고 '쇠락 한국(Declining Korea)'의 징후부터 냉철하게 판단, 정책 전환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경제계에서 "천천히 삶아지던 냄비 속 개구리가 화상(火傷)을 입었다"는 말이 나오는 까닭을 살펴야 한다. 진짜 위기는 안에서 깊숙이 찾아온다. 대통령이 진정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은 정권 지지층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