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보, 권력 다툼 닮은꼴… 20~30대의 삶엔 관심 없어
작지만 확실한 행복 추구하는 젊은 세대에겐 둘 다 '꼰대'
경제학자 우석훈(50)씨를 최근 두 차례 만났다. 한 번은 인터뷰, 한 번은 저녁 자리. 2007년 낸 책 '88만원 세대'에서 불평등 경제구조에 '짱돌'을 던지라고 외쳤던 우씨는 최근 낸 에세이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에서 뒤바뀐 인생관을 피력했다.
"평생의 과업 없이도 재미있고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서 나중에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내가 배웠던 것과 다른 길을 가려 한다."
저녁 자리에선 스무 살 무렵이었던 1980년대가 '폭력의 시대'라는 데 공감했다. 필자는 우씨와 같은 해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는 달라도 경험은 비슷했다. 독재 정권만 폭력을 행사한 게 아니다. 운동권도 닮은꼴이었다. 이런 운동권 노래가 있었다. "XX놈 XXX야, 축제가 뭐냐.(중략) 매 맞고 감방 가는 형제들 있는데 XX놈 XXX야, 쌍쌍파티가 뭐냐."
독재 정권 아래선 누구도 행복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정의'를 빙자한 폭력이었다. 우씨는 더 심각한 사례를 들었다. 입으로는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하면서도 툭하면 주먹질하고 성폭력도 대수롭지 않게 저질렀던 운동권 출신들 얘기다.
우씨는 1966년 이청준 소설 '병신과 머저리'의 구도가 50년 지난 지금 더 들어맞는다고 했다. 소설에서 6·25전쟁을 겪은 형은 '병신'이고 전쟁을 겪지 않아 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은 '머저리'다. 이른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소위 보수와 진보는 저마다 정당성이 있었으나 제 경험과 이념을 절대화하고 상대를 적(敵)으로 규정하면서 '병신과 머저리'로 전락했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 양쪽은 모두 거기서 거기인 '꼰대'일 뿐이다. 둘 모두 권력을 차지하려고 '어깨싸움'만 벌일 뿐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미래 세대의 삶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한때 권력자였던 소위 보수는 탄핵에 이어 지방선거 완패로 사실상 몰락했다. 뒤늦게 비상 대책을 세운다는데 거론되는 인물 중 비상한 긴장감을 주는 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침체를 겪던 유럽의 우파는 21세기 들어 젊은 정치인을 내세워 쇄신에 성공했다. 우씨는 "이제 유럽에서 좌파는 나이 많은 사람이나 하는 것이고 젊은 사람은 우파에서 정치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한편 우리의 소위 진보는 권력 잡더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는 줄 안다. 반대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말뿐인 '비핵화'에 또 속을 수 있으니 대북 문제에 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하면 대뜸 '냉전 세력'이라고 비난한다. 소득 주도 성장 같은 정책이 오히려 경제적 약자를 힘들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저 보수 세력의 '발목 잡기'로 치부한다. 안전하게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전문가 판정에도 월성 원전 1호기를 전격 폐쇄했다.
우씨에 따르면 둘은 수준이 비슷한 '병신'과 '머저리'다. 요즘 20~30대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을 추구한다. 이들에게 선배 세대인 '산업 전사'와 '민주 투사'는 목적(이념) 지향 집단주의란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안타깝더라도 사실이 그렇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인터뷰 기사가 실린 후 우씨에게 '변절'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지 않다. 우씨의 변신은 '도약'이라 해야 옳다. '병신'과 '머저리'를 넘어 '공존'과 '배려'라는 21세기 가치로 나아간 것이다. 우씨는 책에서 "이제라도 나는 21세기로 가야겠다"고 토로했다. 아마도 미래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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