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승리의 축제 (에 9:15-19)외 1

鶴山 徐 仁 2018. 6. 1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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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월 16일 (토)
말씀 큐티더 보기
성경 본문 승리의 축제 (에 9:15-19)

15. 아달월 십 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인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16. 왕의 각 도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인을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7. 아달월 십 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 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18. 수산에 거한 유다인은 십 삼일과 십 사일에 모였고 십 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19. 그러므로 촌촌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 고을에 거하는 자들이 아달월 십 사일로 경절을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본문 해석

이미 수산성에서 대적 오백 명을 진멸하고 하만의 열 아들마저 도륙하여 그 시신을 장대에 높이 달기까지 했는데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했다>(15절)고 합니다. 

1차 때 미처 처단하지 못했던 원수들을 색출하여 추가로 진멸한 것인데 이번에도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역시 유다인들의 자위권 행사와 응징의 정당성을 위해서 였습니다. 유다인들의 관심이 남의 재산이 아니라 대적들에 대한 응징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로써 전국의 유다인들이 <대적들에게서 벗어났다>(16절)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그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했다>(16절)고도 합니다. 

 

마침내 유다인들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기적적이고 감격적으로 이긴 싸움이었습니다. 완벽한 승리였고, 완전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감사하고 감격하여 <그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19절)고 했습니다. 

그 구원의 날이 너무도 감사하고 기뻐서 이렇게 잔치를 베풀며 즐기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나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은 은혜와 구원의 원천에 대해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기뻐하며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행위이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이르는 길을 외면하는 처사에 다름 아닙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며 받은 은총을 기념하는 축제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떠받치는 기본적인 토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사 기적 같은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 진실한 감사의 고백으로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보람을 느끼시고 

우리 또한 감동과 무한한 격려를 받습니다. 

그래서 감사와 더불어 느끼는 기쁨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힘이며 또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 풍성한 공동체와 사회는 웬만한 

갈등도 큰 힘 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저력 있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감사의 원천을 생각할 줄 아는 신앙적 풍토가 두터워지기 때문입니다. 

결단과 적용

-당시 유다인들이 대적 총 <칠만 오천 명을 도륙했다>(16절)는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다인들을 살육하려 했던 하만의 죽음과 그 아들들의 최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감사와 기쁨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오.

오늘의 기도

주님, 수산성을 비롯해 바사 왕국 전역에서 모든 유다인들의 대적들이 다 진멸됐습니다. 무려 그 수가 칠만 오천이었다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들이 모두 색출되어 도륙 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다 백성들에게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크고 감사가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부디 저희도 베풀어 주시는 은총에 대해 더욱 기뻐하며 감사하며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도서 큐티더 보기
휴식

적당한 휴식 없이 계속 밀어붙이는 생활은

일견 영웅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사역하면 온전히 살아갈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진정한 효과는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도 집중하지 못하고

사람에게도 집중하지 못한다.

더욱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게

무엇인지 분별할 힘도 잃어버린다. 

결국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그저 이 모든 것을

해내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상태에 빠진다.

이러면 진짜 통찰력과 영적 리더십을

온전히 발휘하기가 어려워진다.

-고든 맥도날드 외의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리더를 떠난다] 중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많은 사역을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 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시간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휴식, 안식이 없이는

주님을 다시 만날 힘을 얻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주님을 먼저 만나고,

내 영혼의 성숙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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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월 15일 (금)
말씀 큐티더 보기
성경 본문 유다인의 칼 (에 9:5-14)

5.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고
6. 유다인이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인을 죽이고 멸하고
7. 또 바산다다와 달본과 아스바다와
8. 보라다와 아달리야와 아리다다와
9. 바마스다와 아리새와 아리대와 왜사다
10. 곧 함므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11. 그 날에 도성 수산에서 도륙한 자의 수효를 왕께 고하니
12.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인을 죽이고 멸하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니 왕의 다른 도에서는 어떠하였겠느뇨 이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또한 시행하겠노라
13. 에스더가 가로되 왕이 만일 선히 여기시거든 수산에 거하는 유다인으로 내일도 오늘날 조서대로 행하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게하소서
14.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달리니라

본문 해석

<유다인이 칼로 그 모든 대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 또 도성 수산에서 오백 명을 죽이고 진멸하고 ...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5-10절). 

<대적>들이란 유다인들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며 하만의 조서에 근거하여 유다인들을 학살하려고 모의했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바뀌어 유다인들이 그들에게 <마음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미 장대에 높이 달려 죽은 하만의 <열 아들>까지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 도성 수산에서 도륙한 자들만 해도 수효가 오백 명이었다는 것입니다(12절).

그러니 다른 지방까지 합치면 그 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다시<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또 시행하겠노라>(12절)고 합니다. 

<에스더가 이르되 ...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13-14절). 

에스더는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므로써 유다인의 대적 하만 일가가 완전히 진멸되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분명히 알리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유다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세력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그렇게 도륙하고 진멸한 자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의 살육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자위권 발동의 정당한 행위였음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남의 재산을 노려 무고한 자들을 해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당시 유다인들의 칼은 악한 마음을 품은 자들 앞에서 선한 자들을 지켜낸 충정의 칼이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날선 칼을 빼 들 수밖에 없었던 보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복음은 그 존재 자체가 녹슨 이 시대의 양심과 거짓된 영혼을 향해 날아 꽂히는 서슬 퍼런 칼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과 적용

-<그날> 수산성에서만 유다인이 죽인 대적의 수가 얼마였습니까?

-에스더가 굳이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기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유다인들이 도륙한 대적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의 기도

주님, 유다인들은 가차없이 자신들의 자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수산성에서만 오백 명을 도륙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에스더의 요구로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달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응징의 기회를 통해 철저하게 원수들을 진멸했습니다. 심지어는 아하수에로 왕마저 <그대가 요구하면 또 시행하겠다>할 만큼

당시 유다인들의 칼은 아무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역사요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들 다시 한 번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칼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게 해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생각하며 읽기(독서의 방법)
인문학 나눔

“‘생각하며 읽기’와 ‘반복적으로 읽기’의 과정으로 완성된 독서는 

뛰어난 장인이 수십 번의 담금질을 해서 만든 명검이며, 

반대로 ‘생각하며 읽기’와 ‘반복적 읽기’가 빠진 독서는 

실력이 미천한 대장이장이가 담금질 없이 급조한 졸검(拙劍)에 지나지 않는다.”

 

최인호 저(著) 「지독재독」(프라하, 5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공자의 『논어(論語)』‘위정’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胎,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생각의 과정이 필요하고,  

또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독단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독서도 이와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읽는 독서는 눈만 피로한 졸검(拙劍)일 뿐입니다.  

바둑의 고수들은 이른바 복기(復棋)를 합니다. 

양 대국자가 서로의 수를 되새겨 보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두는 것입니다. 

한 수 한 수가 다 의미 있는 수였기에, 

다시 말하여 생각하며 두는 바둑이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둑 알을 한 웅큼 쥐고는 모내기 하듯이 생각 없이 바둑판에 던지면

복기를 할 수 없음을 물론이고, 바둑이 아니라 알까기에 가깝습니다. 

생각 없는 독서는 알까기 독서입니다.

기독 메시지

인생도 그러합니다. 생각 없이, 의미 없이 사는 인생은

매 순간 눈 앞에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없는, 쫓기는 인생입니다.  

생각하며 읽은 독서가 명검(名劍) 독서입니다. 

의미를 좇아 산 인생이 명검 인생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29:18)

그림 큐티더 보기
찬송가 '너 시험을 당해'
고린도전서 15:10

네 구세주 예수 힘주시리니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He Who is our Savior our strength will renew; Look ever to Jesus, He'll carry you through.

도서 큐티더 보기
하나님 인정하기

첫 번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개입하심을 시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즉 그분의 속성과 그분의 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위엄을 다시 확인하며

그분이 영원히 거하시는 곳과 비교해

세상의 왜소함을 기억하는 순간이다.

일주일 내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고 지배하며 착취하려 하기에,

우리에게 세상은 점점 더 커 보인다. 

-고든 맥도날드의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믿는 것은

영원히 사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영원성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면

삶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소유하지 못해서

우리 스스로 무너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매순간 인정하며 살아가는 훈련은

거대한 세상의 벽을 넘어서는 능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