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재개된 성전 재건 공사(스 5:1-5) 외 1

鶴山 徐 仁 2017. 12. 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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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8일 (금)
말씀 큐티더 보기
성경 본문 재개된 성전 재건 공사(스 5:1-5)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3. 그 때에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가 다 나아와 저희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고하였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 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본문 해석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시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이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며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1-2절).

그들이 처음 귀환했을 때만 해도 성전을 재건한다는 감격 때문에 가슴이 부풀고 흥분되어 무엇이든 

다 해낼 것 같은 자신감과 용기로 충천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공사가 중단되고 세월만 덧없이 흐르자 낙심천만하여 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다 떨어졌습니다. 

심지어 성전 재건에는 완전히 흥미와 관심을 잃어버리고 자기들의 집을 세우고 먹고 사는 일에만 

열을 올리며 하루가 다르게 세속화의 길로 치닫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성전 재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시고 

하루 속히 그 일에다시 착수하도록 촉구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실수로 그 일이 지체되고 원수들의 방해로 그 일이 중지됐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시지 않고 마침내는 그 일을 꼭 이루십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했다는 소식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또 훼방에 나섰습니다(3절).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전에처럼 성전 재건 공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격려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좀 더 강해진 유다 백성들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대적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전에는 맥없이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아무런 도우심도 없었는데 

담대히 대적들과 맞서 싸우자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5절).

여기 <하나님이 돌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의 현재 상태를&nbs p;면밀히 살피셨다는 뜻과 함께 

그들이 당면한 어려움을 넉넉히 해결해 주셨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백성의 장로들이 더욱 성전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부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마귀를 대적하셔서 반드시 하나님이 분부하신 일을 이루시는 성도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결단과 적용

-에스라서의 배경인 주전 520년 경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을 꼽는다면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의 두 번째 방해에 유다 백성들이 굴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중단했던 성전 재건 사업에 다시 착수했을 당시 바사의 왕은 누구였습니까?

오늘의 기도

주님, 처음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에 더 이상 성전 재건 공사를 계속할 수 없었던 유다 백성들이 이번에는 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재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독려하시고 격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선한 일, 하나님의 전을 일으키는 일은 주님이 친히 하시고, 

또 이루실 줄을 확신하며 중도에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일이 없도록 성령으로 늘 저희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과거 유다 백성들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 

재건 사업을 통해 오늘 저희들도 큰 깨달음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득도(得道)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
인문학 나눔

“불교에서 득도(得道),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문자 그대로 일체 만물의 근본이 무엇임을 보고 알았다는 뜻이다.  

견성에는 반드시 법열(法快) 곧 깨달음으로 인한 황홀한 기쁨이 수반된다고 한다. 

주머니가 비어도 즐겁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는 기쁨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때를 가장 위험한 때로 간주한다.”

 

이재철 저(著)  「참으로 신실하게(홍성사, 21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기독 메시지

득도(得道)의 단계는 이른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을 보는 단계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의 다른 면을 보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의 깨달음에 들어 선 것을 가지고, 

마치 모든 도를 완성한 듯 착각을 할 수 있기에 가장 위험한 단계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 수도자들은 사막에서 경건의 훈련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막에서 수도자가 하나님을 극적으로 신비한 체험을 할 때,  마귀가 살며시 다가와 속삭입니다.

“어서, 사람들에게로 달려가 그 신비한 경험을 나누고, 무지한 그들을 깨우쳐야지!”

사명감을 고취시키는듯하지만 실상은 인정과 박수를 받으라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나는 깨우친 성자이고 너는 무지한 백성이라는 교만을 부축이기는 것입니다. 

제대로 깨우치면 겸손합니다.

얼치기로 깨우치면 교만해집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11:2)

그림 큐티더 보기
사도행전 3:6
고린도전서 15:10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Then Peter said, "Silver or gold I do not have, but what I have I give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walk."

도서 큐티더 보기
좋은 목자는 부지런히 꼴을 거두는 자

 

풀은 아주 흔해서, 사람들은 귀히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통, 세상의 금과 은, 세상의 영광과 권세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

 그러나 양떼를 치고 소떼를 치는 목자들은 풀을 찾아서

 꼴을 거두어 먹여야 한다.

.양떼들에게 꼴을 거두어 먹이지 않는 목자는 

양들을 학대하는 악한 목자요, 게으른 목자요, 어리석은 목자이다.

 참된 목자라면 허황된 것을 꿈꾸지 말고 풀을 벨 생각을 해야 한다. 

목자에게 있어서 소망은 금과 왕관이 아니라 양떼와 소떼이다. 

양떼를 먹일 수 있는 풀이 그에게는 금이요 왕관이다.

좋은 목자는 풀을 찾아다니면서 부지런히 꼴을 거두는 목자이다.

 -김준범 목사의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에서-

 

 목자는 자기 양떼와 소떼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인

 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양떼와 소떼들이 그 양식을 찾아 먹고 자랍니다. 

풀을 찾아 양들을 초장으로 인도하고 

꼴을 먹이는 목자라야 좋은 목자요,

 선한 목자요, 지혜로운 목자입니다. 

그런데 이 풀은 베어져도 다시 새싹이 나고, 끝없이 자랍니다.

목자는 안심하고 계속해서 양들을 돌보기만 하면 됩니다. 

풀을 찾아다니면서 부지런히 꼴을 거두고 먹이는 

충성스러운 목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풀을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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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7일 (목)
말씀 큐티더 보기
성경 본문 중지된 성전 재건 공사(스 4:17-24)

17. 왕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에 거한 저희 동료와 강 서편 다른 땅 백성에게 조서를 내리니 일렀으되 너희는 평안할지어다
18. 너희의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19. 명하여 살펴보니 과연 이 성읍이 예로부터 열왕을 거역하며 그 중에서 항상 패역하고 모반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20.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주재하는 큰 군왕이 있어서 강 서편 모든 땅도 주재하매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저에게 다 바쳤도다
21.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22.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
23. 아닥사스다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역사를 그치게 하니
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본문 해석

본문은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인들이 거짓과 모함으로 올린 고소장을 보고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 재건 공사를 중지하도록 명령한 조서입니다. 

<...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21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24절).

이렇게 하여 결국 16년간이나 성전 재건이 중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의 계략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16년 후 마침내는 성전 재건이 재개되어 6년 만에 그 완공을 보게 됩니다. 

성벽 재건은 느헤미야가 돌아와 불과 52일 만에 그 재건을 종료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는 일에는 

사탄의 훼방이 따릅니다. 그리고 사탄의 그 방해공작이 늘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깁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사실 마귀와의 싸움은 이미 우리의 승리가 보장된 것입니다. 분명 힘겨운 영적 싸움이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굶주린 사자처럼 포효한다 해도 그건 기껏 효과음에 불과합니다. 철장 안에 갇혀 있으므로 실제 우리를 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허락하신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담대함으로 주어진 영적 싸움에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때로 우리 인생에는 벅찬 바람이 불어오기도 합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때 흔히 우리는 동요하기 쉽습니다. 부디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우심과 평화와 사랑과 권능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결단과 적용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들의 성전 재건을 훼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올린 거짓 고소장을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가 몇 년간 중지되었을까요?

오늘의 기도

주님,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임에도 악한 세력들이 끝까지 그 일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다소 지연되기만 했지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뤄졌습니다. 

주님, 저희도 마귀의 위협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포기하는 일 없이 주의 일에 더욱 매진하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마지막 시대에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였사오니 늘 근신하여 기도하므로 패하지 않고 

반드시승리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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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한 늙은 조개
인문학 나눔

“노합생주(老給生珠)’  늙은 조개가 진주를 낳는다는 뜻이다.

새파란 조개, 젊은 조개는 진주가 없다.  아픔을 겪지 않은 늙은 조개도 진주가 없다(중략).  

조개는 몸에 들어온 뜻밖의 이물질을 녹여 없애려고 한평생 아픔의 체액을 분비한다.  

그 분비물이 겹겹이 쌓여 진주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노인의 주름살 속에는 진주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권상호 저(著) 「유쾌한 먹탱이의 문자로 보는 세상(푸른영토, 17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기독 메시지

하나님은 성도들이 모든 삶을 마치고 마침내 도착하는 천국 문을 ‘진주문’ 이라고 하였습니다(계21:21).  

하나님은 왜 하늘문을 진주문이라고 하셨을까요?  

진주는 광물 속에서 캐내는 보석이 아니라 조개의 몸 안에서,  즉 생명체에서 만들어지는 보석입니다.  

조개 안에 모래알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면 조개는 너무 아파서 그것을 감싸기 위해 ‘나카’라는 체액을 분비하는데,  

그 체액이 쌓이고 쌓여 진주가 된다고 합니다.  진주는 아픈 상처를 영롱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결과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상처는 아름다운 진주가 될 수도 있고, 망측한 흉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처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상처를 안고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면 진주가 됩니다.  

상처를 안고 욕을 하며 불평만 하고 있으면 흉터가 됩니다. 

음식도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발효하는 것이 있듯이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노인이 되는 사람과 어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늙어가는 사람이 있고, 익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사람이 있고 여물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깊이 숙성된 잉크가 좋은 시를 씁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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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11
고린도전서 15:10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And that is what some of you were. But you were washed, you were sanctified, you were justifie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by the Spirit of our God.

도서 큐티더 보기
내일 아침 더 좋은 고향에서 만나자

우리가 존경하는 독일의 고백교회 디트리 본 훼퍼 목사님은 

 독재자 히틀러를 끌어내리려고 

그 운동에 동참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다.

 사형을 당하는 아침에 감옥을 걸어 나가는데 

같이 있던 동료들이 마지막 보면서 아쉬워했다.

 그때 본훼퍼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여러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내일 아침 더 좋은 고향에서 꼭 만납시다‘. 

 천국에서 만나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땅에서 정의를 위해 살아간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영원한 천국의 하나님 품을 바라보며 

본향을 사모했던 위대한 목사님이기도 했다. 

-이영무 목사의 ‘성공적인 순례를 위하여’에서-

 

 하나님의 본향을 알지 못하고 육신의 고향만 아는 이들에게 

하늘의 고향을 알려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으면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실현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지만 

동시에 궁극적으로 ‘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백성들이다‘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순례의 길을 계속 가십시오.

극한 고통과 절망의 시간에도 우리의 영원한 고향, 

영원한 본향을 바라본 본 훼퍼 목사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