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크게 질투하노라(슥 8:1-8)

鶴山 徐 仁 2017. 9. 28. 11:17
9월 28일 (목)
크게 질투하노라(슥 8:1-8)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2절).
<질투>란 히브리어로 <카나>입니다. 그리 어감이 좋은 단어가 아닙니다. 남을 시기하거나 남녀간의 사랑 때문에 등장하는 다소 부정적인 어휘임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거침없이 <내가 크게 질투하노라,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자신을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14:14), <엘 카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도 자신을 일컬어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하나님의 질투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극단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듯 부정적인 어감의 단어를 동원할 만큼 역설적이고 지독하고 철저합니다. 질투하지 않는 사랑은 담백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상에게 곁눈질하고 추파를 던지고 절하고 따라가는데도 질투하지 않고 진노하지 않는다면 그건 쿨한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체면 불구하시고 질투하십니다. 오죽하면 하나님 스스로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겠습니까? <질투>나 <시기> 같은 우아하지 않은 정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런 감정들을 자신의 본성으로 차용하시며
당당히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감사합시다. 황송해 합시다.
감격하며 그 무서운 사랑에 응답합시다.
<질투>야말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원색적인 민낯입니다. 질투하는 자만이 자신의 남편, 혹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소견을 적어보십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구약 성경의 말씀을 찾아 적어보십시오.
-<질투>와 <사랑>의 관계를 설명해 보십시오.

 
  
  
 

주님 다시 한 번 하나님 사랑의 철저하심과 그 깊은 진정성을 깨달으며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아름다운 언어가 아님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의 이 역설을 제대로 체험하며 그 사랑에 더욱 바르게 응답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 마스터 키는 바로 감사이다

다윗은 인생의 수많은 위기와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다.
남도 아닌 장인어른인 사울 왕으로부터 억울하게 쫓겼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그랬고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이방 나라에 가서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다.
때로는 원수들로부터 둘러싸여 진퇴양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닫힌 문을 활짝 여는 마스터 키를 발견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다윗은 찬양하며 노래했다.
그 마스터 키는 바로 감사이다.
-안두익 목사의 ‘감사의 샘물이 흘러넘쳐야 합니다’에서-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고, 주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그의 궁정으로 초대하십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천국의 잔치에 초대를 받고
감사는 자만이 예비하신 축복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반대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는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는 자에게 열려진 문입니다.
감사의 문을 통과한 자들은 주님과 함께 다윗이 받은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시편 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You have filled my heart with greater joy than when their grain and new wine abound.

 
    
 
  
 서울이태원교회 지성호 목사
 믿음의 삶 13
  
  



9월 27일 (수)


하나님에게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삿16:23-30)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가로되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자기 신을 찬송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다 알만한 삼손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를 대할 때,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는 이런 능력을 주시지 않으셔서 힘들게 세상을 살게 하시는 것일까?” 하지만 성경의 모든 역사 동안 삼손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삼손 뿐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데 삼손의 사건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삼손 같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힘이 세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서 그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손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장점 때문에 그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점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께 탄식한 적은 없습니까?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누리고 살아가느냐에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불행을 시선을 바라보면 불행하여 지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부족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미 충분하며 그것이 오히려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삼손이 불행해지는 시점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사용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큰 능력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할 때, 그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때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삼손의 능력이 정말 머리카락에서 나온 것일까?” 성경에는 삼손의 능력이 머리카락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손 이야기를 전체적인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에 드릴라로 인해 머리카락이 잘렸을 때,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기록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삼손은 그의 마지막에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다시 능력을 얻습니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느냐, 그렇지 않았느냐’가 삼손에게 능력이 나타나는 기준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능력이 있고 없음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시선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나의 능력의 기대치로 보면 회복하기 ‘너무 늦은 때’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에게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보며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 적은 능력이라고 하나님께 탄식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오늘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선함에도 항상 나의 능력이 작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한탄만 했던 나의 믿음없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의 삶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 함께해 주셔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행복한 가정은 남편이 아내를 칭찬한다

여자에게 가장 큰 행복은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진정한 칭찬을 듣는 것이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켜준
밧세바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자신의 아내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 왕은 아내가 아들 솔로몬을 믿음의 사람으로
잘 키워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솔로몬 왕은 공평하게 재판하고 다스리는 정의로운 왕이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솔로몬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준
밧세바에게 감사하고 칭찬했던 것이다.
솔로몬의 집안에 그의 아버지 다윗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칭찬하면서 큰 행복이 찾아왔다.
행복한 가정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있다
-민남기 목사의 ‘감사와 칭찬이 있는 가정’에서-

 
   
 
  
 


가정의 행복은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육신의 건강함이나
경제적인 부요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라고 했는데
늙으면 매력도 헛되고, 외모도 볼품없게 됩니다.
“너무 부하게도 마옵시고 너무 가난하게도 마옵시고”라는
기도에서 경제적인 부요함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로몬은 이미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밧세바가 뿌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지도로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최고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헌신이 나왔습니다.

 
   


    
 

누가복음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The angel went to her and said, "Greetings, you who are highly favored! The Lord is with you."

 
    


 
  
 요나3일영성원 장덕봉 목사
 만족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