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처럼 국익 좇는 비전의 정치가를 보고 싶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9.17 01:30
사설
오는 24일 독일 총선이 치러진다. 일주일밖에 남지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이미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가려져서 그런 걸까. 여론조사 예측이 맞는다면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손쉽게 4선에 성공할 것이다. 누가 메르켈의 연정 파트너가 될 것이냐가 가장 큰 관심거리다.
이를 두고 독일 주간 디차이트의 요제프 요페 에디터는 “지루한 선거”라고 표현했다. 한때 난민 문제가 뜨거웠지만, 메르켈 정부가 이 또한 무난히 극복해 도무지 핫 이슈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일 년 내내 거칠게 치고받는 ‘육박전’을 벌였던 미국 대선이나 올봄 보수·진보 기존 양대 정당을 무참히 무너뜨리고 중도 혁명이 성공했던 프랑스 대선에 비하면 이번 독일 총선은 사실 지나치게 밋밋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흥행에 참패한’ 독일 총선을 만든 것은 중도 우파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에 일차적으로 기인할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메르켈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중도 좌파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탄탄대로를 닦아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슈뢰더가 안팎의 거센 반대와 비판을 감수하면서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독일을 과감히 수술대 위에 올려놓기로 결정한 용기 있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시 슈뢰더 총리가 주변의 눈치나 보고 정치적 계산기만 두드리면서 독일의 중병을 나 몰라라 방치했더라면 오늘날 메르켈 총리가 누리는 ‘선거 평화’는 언감생심 꿈꿔보지도 못했을 공산이 크다. 슈뢰더가 뿌린 개혁의 씨앗 덕분에 메르켈은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독일의 지난 7월 실업률은 3.7%다. 사실상 완전고용(3% 미만)을 앞두고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평균 실업률 9.1%보다 훨씬 낮다. 이웃 프랑스는 9.8%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슈뢰더 전 총리는 집권 당시(1998~2005년)의 경험을 다시 한번 회고했다. 슈뢰더가 정권을 넘겨받은 98년 독일 경제는 막대한 통일 비용에 휘청거리며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실업률은 두 자릿수에 달했다. 노동시장은 경직됐고 복지 부담은 날이 갈수록 가중됐다. 이에 슈뢰더 전 총리는 2003년 ‘혁신, 성장, 일, 지속 가능성’이라는 표제의 ‘어젠다 2010’ 개혁안을 발표했다. 일하는 복지를 유도하고 노동시장을 대대적으로 수술하는 정책이었다. 노조는 물론 심지어 당내 일각에서도 연일 슈뢰더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 길만이 독일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슈뢰더는 굴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하지만 슈뢰더는 당장에 인기가 없고 고통스러운 개혁을 끈질기게 추진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치인의 관점으로 보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2005년 총선에서 메르켈에게 패해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바통을 이어받은 메르켈 총리는 전임자 슈뢰더의 정책을 성실히 승계했다. 독일에서는 집권당이 바뀌어도 주요 정책 기조들은 이어나가는 전통이 있다. 사민당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녹색당이 주도한 탈원전 정책이 대표적이다. 기민당 헬무트 콜과 메르켈은 이를 독일 통일과 에너지 개혁으로 발전시켰다.
전후 독일은 콘라트 아데나워, 브란트, 콜, 슈뢰더, 메르켈 같은 거인 정치지도자들을 대거 탄생시켰다. 이들이 한결같이 보여준 리더십은 비전 제시와 철저한 국민·국익 위주의 정치였다. 눈앞의 당리당략보다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번영을 최상의 가치로 삼았다. 여러 차례 큰 전쟁을 벌였던 이웃 프랑스와의 화해, 유럽 통합과 단일화폐 주도도 모두 이런 멀리 내다보는 비전에서 나왔다. 독선을 버리고 연정을 통한 협치를 택했으며 다소간의 정치적 논쟁은 오히려 국가 발전에 큰 보탬이 되는 거름으로 삼았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도 정치적 충돌은 있게 마련이고 독일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승화시키느냐 하는 것은 결국 정치인들의 몫이다. 슈뢰더의 방한은 우리 정치인들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갔을까. 그의 경험담이 ‘쇠 귀에 경 읽기’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어떤 정치인인들 선거에서 패배하고 싶겠는가. 그렇지만 당장의 불리함을 알면서도 이를 달게 감수한 슈뢰더처럼 두고두고 역사에 기록될 그런 정치지도자를 우리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