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 1:2-8)

鶴山 徐 仁 2017. 6. 16. 11:54
6월 16일 (금)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 1:2-8)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나훔은 <위로>라는 뜻으로 앗수르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한 선지자요 또 앗수르(니느웨)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경고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보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그분의 온전한 성품을 부정하는 자들, 우상을 섬기는 자들, 말씀을 비웃거나 당신의 백성들을 학대하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분개하시고 진노하시고 질투하시고 보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맹렬한 노를 품고 계시지만 사람들의 그것과 같이 고삐 풀린 방자한 혈기가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께 합당한 노, 즉 공의의 날을 세워 악인들을 무참하게 하시는 진노입니다. 하나님은 분노의 주시지만 그 분노를 당신의 뜻대로 부리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시거나 경박하시지 않습니다. 많이 참으시고 오래 기다리십니다. 앗수르에 대해서도 니느웨에 대해서도 긴 세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렇다고 <벌 받을 자를 마냥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그러시기에는 공의로움이 너무 크시며 질투와 보복의 칼날도 너무 날카로운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그분의 진노 앞에 서며 그분의 맹렬한 화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무시무시한 불, 소멸하시는 불이며 이 세상 모든 것을 쓸어가고 진멸하는 심판의 물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모하고 교만한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워하고 떨어야 합니다(시 4:4). 나훔 선지자는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함으로써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질투>와 <보복>은 결코 성서적 윤리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이 굳이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2절)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신다>(3절)는 말씀과 <그의 진노가 불 같고 범람하는 물>(7,8절)같다고 한 말씀은 서로 어떻게 조화될까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당시 니느웨의 죄악상을 적어 보십시오.

 
  
  
 

주님,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셔서 질투하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셔서 보복하심을 믿습니다. 하오니 오늘 저희들도 하나님의 이런 정서와 속성을 깊이 이해하며 언제나 그 사랑에 부응하며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도발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하시고 오직 의로움만을 추구하며 살게 하사 하나님의 진노와 화를 저희 스스로 자초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멈춤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의 칼을 피해 40년 동안 살았던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하루 만에 80km를 달려야 했습니다. 장정 걸음으로 20시간, 달려서는 10시간이 넘는 거리죠. 하루에 마라톤을 두 번 달린 거리가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의 거리인 것입니다. 그가 그곳에 멈춰 선 것은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달려갈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력이 아니라 번아웃이라는 타력에 의해 멈춰 선 것이죠.
-최병락의 [부족함]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부족함이 크면 클수록 더 다가옵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지점에, 하나님은 은혜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반드시 그곳까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고, 완전히 나의 힘을 빼야만 주의 은혜가 보입니다. 부족함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아닌 주님이 주인 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내 인생을 철저하게 맡기는 시간입니다.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so Christ was sacrificed once to take away the sins of many people; and he will appear a second time, not to bear sin, but to bring salvation to those who are waiting for him.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언어는 영혼의 거울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