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미 6:6-11) 외 2

鶴山 徐 仁 2017. 6. 9. 11:12
6월 9일 (금)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미 6:6-11)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
10.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11.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이 바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뭘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할 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기대하실까요? 흔히 우리는 <일 년된 송아지>를 바치고,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7절)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헌금이나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내 허물을 다 사하시고 내 영혼의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 번제물이나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고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8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미가 시대는 송아지와 숫양과 기름은 드리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간곡히 바라시는 정의와 인자와 겸손은 철저히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얼 원하시고 바라시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느냐>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23)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산 제물이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우리의 몸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게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요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제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 즉 내 몸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어떤 것일까요?
-바울이 말씀한 <산 제사>, <영적 예배>(롬 12:1-2)란 어떤 것일까요?
-<정의>, <인자>, <사랑>, <겸손> 등이 어째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참된 제물이 될까요?

 
  
  
 

주님, 저희들 맹목적인 예배나 제물을 드릴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와 제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송아지나 숫양이나 강물 같이 많은 기름보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바라신다고 하셨사오니 온몸과 삶으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를 실천함으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게 참 예배요 산 제사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적 얘배임을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나의 일에 나와 함께 하실 것인가?
이 사실을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인생이 달라지고 성공의 척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근심이 생겨나고 있다면,
마음 중심에 틀림없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근수 목사의 ‘하늘과 땅 사이에서’에서-

 
   
 
  
 


마음의 근심은 기도만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근심이 사라지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확실한 믿음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지를.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서울이태원교회 지성호 목사
 믿음의 시간 3_창세기 26장
  
  



6월 8일 (목)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미가 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변론을 경청하라고 외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1절). <...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2절).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작품 <하나님에 대한 심판>(The Trial of God)도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고 심문하며 그분의 변론을 듣는 것으로 인간의 깊은 고뇌를 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심판한다기보다 사실은 자신의 신앙을 심판대 위에 올려놨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때로 죽음처럼 밀려오는 절망의 먹구름 앞에서 우리는 과연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야 옳은지를 놓고 부단히 자신을 저울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심판은 언제나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심판이 되기 마련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오직 형편이나 사정이 괜찮을 때만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그것은 한낱 바람만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연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올지도 모를 자리에는 결코 함께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결코 궁극적인 만남의 진실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운 변론을 들어 보십시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3절). 하나님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좋다가도 사정이 조금만 나빠지면 금새 돌아서는 그런 가벼운 사랑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부단히 인간의 시험대에 세우시고 <시련의 자리에서도 결코 배반당하지 않을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다>(4절)고 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변호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변론을 들으시며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길을 따르다 불리해지는 것 같다하여 진리와 정의, 그리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는 힘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에서 움튼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변론의 핵심을 요약해 보십시오.
-4절에 나오는 <속량>의 의미를 적어 보십시오.
-<공의로우신 여호와>(5절)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오.

 
  
  
 

주님, 저희는 입이 백 개여도 할 말이 없사오나 하나님은 하실 말씀이 많으십니다. 오늘 법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또 자신의 속량하심과 행하신 공의로운 일들에 대해 하신 변론을 듣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저희에게 베푸신 것은 은혜 아닌 것, 축복 아닌 것이 없사오나 저희는 감사와 여호와 경외보다 늘 배은망덕과 완고한 고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했습니다. 변론하시는 여호와 앞에서 더욱 깊이 자신을 성찰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는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밥 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다.
우리의 밥을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영혼의 배를 든든하게 하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절제와 나눔과 쉼을 배운다.
이 절제와 나눔과 쉼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된다.
밥을 먹듯이, 우리는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먹어야 하는 영혼의 양식은
진리의 꼴이요,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이종철 목사의 ‘하늘 양식이 비같이’에서-

 
   
 
  
 


현대인들의 육신은 살이 쪘지만 영혼은 말라 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입니다.
서구인들이 불교나 명상에 심취하고
인도나 동양의 가난한 나라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영성의 고갈 때문입니다.
영성은 곧 하나님 체험입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채우기 전까지는 만족이 없습니다.
물질보다 우리 영혼이 너무나 크고
탐욕은 우리 영혼을 채우기에는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으로 채우십시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the two one and has destroyed the barrier,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행위는 입보다 크게 말한다
  
  




6월 7일 (수)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 창세기 26장 17~25절
  
 

17.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삭이 블레셋 지역이었던 그랄 골짜기에 머물렀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삭이 그곳에 거주할 때 우물을 팠습니다. 그 우물은 샘의 근원이어서 물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랄 지역의 사람들이 그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면서 이삭의 사람들과 다투기 시작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팠던 그 우물을 메워두고 사용하지 않다가 이삭이 그 우물을 다시 파서 물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 곧 ‘다툼’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합니까? 그 우물을 그랄 지역의 목자들에게 주고 물러납니다. 그리고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도 물이 터졌습니다. 그랄 목자들은 또 그곳까지 찾아 와서우물을 두고 다투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 곧 ‘대적’이라는 붙이고, 다투지 않고 또 물러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 이름을 ‘르호봇’ 곧 ‘넓다, 확장되다’라고 붙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랄지역의 목자들이 왜 싸움을 시작합니까? 이삭이 판 우물에서 물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왜 다툼이 시작됩니까? 소유가 많아지고 나눌 것이 많아졌을 때, 우리의 삶에도 다툼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진 것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할 때가 아니라, 풍요로울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삭은 다툼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에섹’ ‘싯나’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서 ‘르호봇’에 머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삭이 뒤로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삭은 지경을 넓히게 된 겁니다. 우리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느냐가 내 삶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양보하는 것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넓어지는 길입니다. 우리의 안목이 이삭과 같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행복의 기준을 세상에서 더 많이 갖고 누리는 것에 둔다면,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행복의 기준, 삶의 가치관, 인생의 목적이 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을 향해서 뛰어가야만 합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물러설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바라볼지라도 우리는 다툼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물러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이삭과 같이 뒤로 물러나서 더 넓은 땅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입술과 영을 지키려면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한다.
이런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고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정직하고 선한 말,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악을 미워하고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 “다만 악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함으로
자신의 입술을 지켜야 한다.
-이동원 목사의 ‘내 입은 진실을 말하며’에서-

 
   
 
  
 


진실이 사라져가고 사단의 궤계가 미혹하는 시대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의 입술과 영을 지키시려면
말씀을 경청하고 나누는 삶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말씀은 바로 진실의 증언이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진실을 말하는 입술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입은 진실을 말하는 입술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The night is nearly over; the day is almost here. So let us put aside the deeds of darkness and put on the armor of light.

 
    
 
  
 요나3일영성원 장덕봉 목사
 어떻게 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