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삭이 블레셋 지역이었던 그랄 골짜기에 머물렀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삭이 그곳에 거주할 때 우물을 팠습니다. 그 우물은 샘의 근원이어서 물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랄 지역의 사람들이 그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면서 이삭의 사람들과 다투기 시작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팠던 그 우물을 메워두고 사용하지 않다가 이삭이 그 우물을 다시 파서 물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 곧 ‘다툼’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합니까? 그 우물을 그랄 지역의 목자들에게 주고 물러납니다. 그리고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도 물이 터졌습니다. 그랄 목자들은 또 그곳까지 찾아 와서우물을 두고 다투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 곧 ‘대적’이라는 붙이고, 다투지 않고 또 물러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 이름을 ‘르호봇’ 곧 ‘넓다, 확장되다’라고 붙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랄지역의 목자들이 왜 싸움을 시작합니까? 이삭이 판 우물에서 물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왜 다툼이 시작됩니까? 소유가 많아지고 나눌 것이 많아졌을 때, 우리의 삶에도 다툼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진 것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할 때가 아니라, 풍요로울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삭은 다툼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에섹’ ‘싯나’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서 ‘르호봇’에 머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삭이 뒤로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삭은 지경을 넓히게 된 겁니다. 우리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느냐가 내 삶이 행복한가 아닌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양보하는 것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넓어지는 길입니다. 우리의 안목이 이삭과 같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행복의 기준을 세상에서 더 많이 갖고 누리는 것에 둔다면,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행복의 기준, 삶의 가치관, 인생의 목적이 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을 향해서 뛰어가야만 합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물러설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바라볼지라도 우리는 다툼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물러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