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왕의 금령 외 4

鶴山 徐 仁 2016. 9. 17. 11:57
9월 17일 (토)
왕의 금령 - 다니엘 6:1~9
   
 

1. 다리오가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2.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의 하나이라 이는 고관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3.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4.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5.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6.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8.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9.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본문 1절과 2절에는 세 명의 총리와 그 아래 120명의 방백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 도와 지방의 고관들, 책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고관들 중에서도 다니엘이 수석 총리였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3절). 바벨론이 망하고 나라가 바뀌어 메대와 바사가 정권을 잡았음에도 다니엘은 여전히 수석 총리라는 최고위직에 있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다른 총리들과 장관들이 그를 시기하며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법을 최우선으로 지키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자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총리들이 다니엘을 고소하기 위해 온갖 뒷조사를 다 해봤지만 그 어떤 부정의 꼬투리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삶과 공무집행을 확인하면 할수록 오직 참됨과 정직성만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니엘의 하나님 신앙을 역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7절)하고 왕으로 하여금 그 조서에 도장을 찍게 한 것입니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9절).

그러나 다니엘은 초연했습니다. 그게 다 자기를 잡기 위한 음모요 치명적인 덫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고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스파이들이 지금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그는 한결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 넣겠다는 대도 굴하지 않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무서운 게 없었습니다. 다리오 왕도 그를 모함하고 음해하는 고관들도, 굶주린 사자들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두려움이 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두려움을 능히 이기고도 남게 한 것입니다. 이런 다니엘에게서 믿는 자들의 세상사는 법을 배웁시다. 세상이 주는 크고 작은 모든 두려움들을 이기는 법을 배웁시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메대와 바사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최고위직 관료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 뭣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는?
-당신이 생각하는 다니엘의 가장 위대한 점은?

 
   
   
 

주님, 다니엘은 실로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적들의 가공할 모함 앞에서도, 굶주린 사자 굴 앞에서도 그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나서서 그들의 악의와 음해를 고발하거나 성토하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오직 그분의 처분만을 바랐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결국은 용이주도한 적들이 아니라 다니엘이 승리한 사실을 저희가 잘 기억합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다니엘에게서 배우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옵소서. 저희도 다니엘처럼 살고 다니엘처럼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나그네의 삶

베두인들에게 있어서 소유는 큰 의미가 없다. 광야 전체가 내 땅이고, 아무 데서나 살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아무 데나 가서 장막 치고 살면 그곳이 내 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장막 치고 살다가 양들에게 먹일 꼴이 떨어지면 미련 없이 장막을 거두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베두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 간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땅따먹기 놀이를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인생의 해가 늬엿늬엿 저물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하시면 그 동안 따놓은 땅을 다 버리고 가야 한다. 언제 우리를 부르실지 모른다. 부르시면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이진희의 [광야를 읽다] 중에서-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신앙은 오늘은 감사하고 내일은 소망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특별히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섬겨야 할 대상이지, 천만년 집을 짓고 살아갈 곳은 못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날마다 현세적인 것에 속아서 이곳이 전부인 양 살아갑니다. 우리는 돌아갈 본향이 있는 자이며, 이 땅에서는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청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마태복음 5:8

 
       
 
   
  명성엘림교회 김성환 목사
  고난 뒤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라
   
   



9월 16일 (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 다니엘 5:25~31
   
 

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30.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벨사살 왕의 연회장 맞은편 석회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쓴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이었습니다. 아무도 읽지 못하고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 그 수수께끼같은 글씨를 다니엘이 판독하고 왕에게 명쾌하게 해석해줬습니다. <왕이 얼굴 빛이 변하고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두 무릎이 부딪쳤다>(9절)고 할만큼 놀랐던 공포의 글자를 다 풀어 준 것입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28절).

<메네>는 <메나>의 수동분사형입니다. <메나>는 수를 세다는 뜻이고, <메네>는 수가 세어졌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이 <메네>를 하나님이 왕의 나라의 세대를 세어 그걸 끝나게 하셨다고 해석했습니다. 바벨론의 역사는 이로써 끝이라는 선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메네 메네>의 하나님, 세고 또 세시는 하나님, 그래서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다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데겔>은 <데칼>의 수동분사형입니다. <데칼>이 무게를 재다는 뜻이니 <데겔>은 중량이 측정됐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데겔>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함량미달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셈하실 뿐 아니라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이든 정확히 달아 보신 후에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달아 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우바르신>의 <우>는 <그리고>라는 뜻, <바르신>은 <베레스>의 수동 분사형입니다. 따라서 <베레스>가 둘로 나누다는 뜻이므로 <바르신>은 둘로 쪼개지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벨사살 왕은 그날 밤 바사의 저격수에게 살해당했고(10절), 나라는 곧 둘로 나뉘어져 메대와 바사에 편입되었습니다. 손가락 글자의 계시대로, 다니엘의 해석대로 어김없이 다 이뤄진 겁니다. 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을 기억하며, 부단히 자신을 점검하고 확인하며 삽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십시오.
-지금 하나님이 나를 셈해 보시고 달아 보신다면 과연 뭣이라고 말씀하실까를 늘 생각하며 사십시오.
-특히 <메네 메네 ...> 세어 보시고 또 세어 보신다고 하신 말씀을 평생 잊지 마십시오.

 
   
   
 

주님, 주님은 저희 모든 것,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늘 저희의 함량을 달아 보시며 정확히 가늠하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런 주님의 면전에서 항상 두렵고도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벨사살 왕처럼 무서운 심판을 선고 받지 않도록 늘 깨어 근신하는 저희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시각

사람이 왜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합니까? 희망을 보지 않고 절망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을 보지 않고, 불가능한 것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보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입니다. 절망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이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눈으로 보면, 모든 문제가 다 가능해 보입니다. 당신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봅니까? 어떤 눈으로 사물을 봅니까? 보는 눈에 따라 세상이 전혀 달라 보일 것입니다.
-서정오의 [목마른 인생] 중에서-

 
     
 
   
 


사람의 눈은 간사하다는 말을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살 때 믿음으로 살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한 번도 상황과 여건이 좋아서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달리 보았던 것입니다. 고난이 도리어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기에 축복임을 고백하는 다윗은 위대합니다. 시각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마태복음 5:7

 
       
 
   
  신일교회 배석찬 목사
  용서가 필요할 때 입니다
   
   




9월 15일 (목)
알고도 행치 않음 - 다니엘 5:18~24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21.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왕들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과 위엄>(18절)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 임의로 세상 왕들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또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들짐승의 마음과 같게 하사 들나귀와 함께 소처럼 풀을 먹게도 하시며 그 몸이 이슬에 젖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의 비극을 통해 그 사실을 다 보고 알았음에도 여전히 마음을 낮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보다도 더 높이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성물에 술을 부어 마시며 후궁들과 즐기는가 하면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욕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의 앞 석회벽에 손가락이 나와 글자를 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24절).

우리는 역사와 현실 속의 사건, 권력가들의 운명과 세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당신 임의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바르게 읽고 깨달아 내 삶에 적용하고 제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그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모든 길을 홀로, 그리고 전적으로 작정하시고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언제나 겸허하게 그분의 뜻만을 따르며 추구해야 합니다. 특히 벨사살 왕처럼 알고도 그것을 행치 않는 죄를 성경은 <짐짓 죄>라 하여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절)고 경고했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보고 알고 깨달은 것은 힘껏 행할 일입니다. 알고도 행치 않아 벨사살처럼 짐짓 죄로 심판을 받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다니엘이 지적한 벨사살 왕의 죄는?
-벨사살 왕 앞 석회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쓴 이유는?
-<짐짓 죄>는 어떤 것이며 성경이 말씀한 그것에 대한 심판(히 10:26-27)은?

 
   
   
 

주님, 벨사살 왕은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을 통해 이미 모든 것을 다 봤고, 다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교만했고,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며 예루살렘 성전 기물에 술을 부어 마시며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욕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마침내는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특히 알고도 고의로 범하는 짐짓 죄, 고범 죄에 대해 가혹한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사 늘 겸손하게 알고 있는 바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은

잠을 잘 때는 머리는 차갑게 하고,
가슴과 배는 따뜻하게 덮고 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냉철한 이성, 따뜻한 감성, 이런 말이다.
왜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감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학교에서 전인교육,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
도덕, 가사, 음악, 미술 이런 과목을 가르치는 이유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감성을 함께 가진
통합형 인격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해 버리면 제일 편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성실과 끈기를 배우면,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극복하려는 지혜와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 모든 공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장덕 목사의 ‘차가운 머리, 따뜻한 가슴’에서-

 
     
 
   
 


학창시절에 공부를 통해 성실성을 익히고,
맡은 일에 열심히 하는 책임성을 배우게 되면,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감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의 바른 의욕, 열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세상 학문은 없습니다. 세상 예술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학문이요, 하나님의 예술입니다.
세상 시간도, 세상 역사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시간이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냉철한 이성, 따뜻한 감성을 발달시켜 하나님의 일에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그런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가 하나님의 학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마태복음 5:6

 
       
 
   
  주신장로교회 황요한 목사
  가지치기를 잘해야 된다
   
   




9월 14일 (수)
복음은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러분 매일 요즘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오는 범죄와 사기, 그리고 비리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이런 생각 들지 않으세요? “정말 이 세상 한 번 확 바뀌면 좋겠다~” “정말 이 세상을 좀 정직하고, 더 선하고,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을까?” “정말 이렇게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바꿀 수 있을까요? 저는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직 ‘복음’만이,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직 그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방법으로는 바꿀 수 없지만, 복음은 그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

그렇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능력’이라는 헬라어는 ‘두나미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는 폭탄인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입니다. 본래, 복음은 그런 폭발적인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초대교회에서는 그 능력이 나타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빛이 된다는 말은 내 삶에서 누군가가 바라보고 따라오고 싶은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고, 소금이 된다는 말은 내 삶이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돈이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쓰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휘두르고, 성공했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를 위로해 주고,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정도의 힘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 우리가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힘입니다. 이 복음이 먼저 내 안에서 감격이 되어야 하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고,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잘못된 관행이나, 관습 가운데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문제를 붙잡고 기도합시다. 그 변화를 위해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어봅시다.

 
   
   
 

하나님,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저희의 말과 행동, 마음을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난의 이유를 섭리의 관점으로 볼 때

여러분. 지금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고난은 억울하게 나만 당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택하신 분들이라면 하나님은
그저 고통만을 위한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손길로 인도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건지십니다.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낙심치 않고 소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로 가는 바울의 여정은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풍파 많은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지 귀한 교훈을 얻지 않습니까?
-서명성 목사의 ‘로마를 향하여’에서-

 
     
 
   
 


가난이나 질병이나 현재의 고난이
다 과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참을 수가 있고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현실을 인하여 낙심하기보다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을
많이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마태복음 5:5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자신감
   
   




9월 13일 (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 누가복음 12:22-31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해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3:29)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행복인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 회복과 자유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합니다(빌4:6).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마음과 생각을 지키심으로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불통을 형통으로 바꾸며,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기도입니다. 기도의 문이 막히면 모든 것이 막히고, 기도의 자리가 무너지면 내 삶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유한한 존재이기에 다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여 먼저 할 일과 중요한 일을 중심으로 에너지를 집중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도 우선순위가 필요합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형통하고, 자녀와 가정이 잘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서 무너지는 일이 반복된다면 신앙의 기초를 돌아보고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성공적인 신앙인이 되는 비결은 예배회복과 기도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쁘거나 마음이 곤고할 때 예배의 자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잃게 됩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예배와 기도 회복이 없이 삶의 형통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내가 기도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조용히 계십니다. 기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31). 본문은 무리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22). 우리 역시 제자들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의식주에 대한 염려를 새들을 기르시고,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24,27). 새들과 들풀들도 그렇게 아끼시는 분께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십니다(28). 하나님은 아합과 이세벨에게 쫒기는 엘리야를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먹이십니다(왕상17). 엘리야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책임지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책임지심을 믿어야합니다. 이를 믿고 염려와 걱정을 버리고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순위로 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곳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에 공의와 정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가정, 직장과 학원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넘치도록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의 비결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과거에 메이지 않고 소망 중에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의식주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갈 때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결핍의 요소들을 채워주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삶이 보장 될 것입니다(요10:10).

 
   
   
 

- 나에게 있어서 결핍의 요소는 무엇인지 정리해보고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다.
-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결단하십시다.
- 오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어떤 실천 목록을 작성해 봅시다.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 많은 것을 주셨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며 감사하지 못함을 용서 하시옵소서. 오늘도 결핍의 부분들을 주님께서 채워주심을 믿고 아무 염려 없이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우선순위를 정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시옵소서.

 
   
     
 

새로운 해방의 사람살이

두려움을 가지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십계명(율법)은 단순한 도덕률이나 건조하기 짝이 없는 기능적인 법조문이 아니다.
그 안에는 “관계”가 있다.
파라오의 폭압에서 벗어나 극적인 해방을 경험한
히브리 민중들의 눈물과 기쁨이 있고,
그 안에서 경험한 평화가 있다.
십계명은 해방을 경험한 히브리인의 신앙고백이며,
함께 일구어 가야 하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약속이고 희망이다. 십계명은 사람을 참사람답게, 공동체를 참 해방과 평등 공동체답게 유지하도록 인도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이다.
-이병일 목사의 ‘어떤 신을 섬길지’에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 정신을 따르는 것이고,
그 안에서 공동체적인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러한 공동체적인 사건을 다시금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나님과의 관계는 새로운 해방의 사람살이를 일으키는 관계입니다.

 
     
       
 

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마태복음 5:4

 
       
 
   
  요나3일영성원 장덕봉 목사
  55.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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