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블랙홀’ 논리에 국민 70% “개헌 논의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2014.10.12 03:04 / 수정 2014.10.12 03:04
막 오른 ‘개헌 프레임 전쟁’ 의미와 전망
중앙포토 |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는
내각제론자였다. JP는 1997년 대선 정국에서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와 DJP연합을 결성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약속받았다. 집권 2년 뒤
개헌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DJ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DJ정부 초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변호사는 8일 중앙SUNDAY의
통화에서 “야당이 반대해 국회에서 개헌선이 확보되지 않았다. JP도 나에게 ‘국회 과반도 안 되는데 어떻게 개헌이 되느냐’고 했다. 현실적으로
개헌을 할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내각제 개헌론은 JP의 부침과 함께 정치권에서 사실상 소멸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2009년 하반기, 집권 2년차 후반에 개헌을 처음 언급했다. 하지만 직접 드라이브를 걸진 않았다. 2010년 특임장관에 임명되면서
그를 대리해 개헌을 추진한 이재오 의원이 밝힌 속내는 이렇다. “MB는 임기 중 12차례나 개헌을 이야기했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하고 싶어
했지만 대통령이 개헌 방향을 정하는 것보다 국회 논의를 지켜보는 게 맞다고 봤다. 하지만 여당 반대가 더 심했다.” 박근혜계는 개헌론이 박근혜
대표의 입지를 흔들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정권 초엔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못하고, 임기 말엔 유력 대선주자 눈치를 보느라
못한다”는 ‘개헌 무산의 법칙’은 이때도 어김없이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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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2년차 후반기인 2014년 10월, 개헌론이 또 등장했다. 그런데 과거와 여건이 다르다. 국회에서 먼저 일어났고, 이에 동조하는 의원
수만으론 개헌선(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을 확보한 것처럼 보인다. 여야 의원 155명으로 구성된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이 선봉에 있다.
이들은 1일 “이달 중 국회 개헌특위를 구성하고 내년 상반기까지 개헌안을 만들겠다”고 했다. 개헌에 반대할 강력한 차기 주자도 없다. 국가개조
여론이 높은 데다 총선·대선 국면이 본격화되기 전이어서 내년 상반기까지 “하늘이 준 기회”라는 게 개헌론자들의 주장이다.
박
대통령은 반대한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일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 역량을 분산시키면 또 다른 경제의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
“경제 회생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제동을 걸었다. 개헌론자들은 “국회의 개헌 논의는 대통령이 간섭할 수 없는 사안”이란 입장이다.
청와대와 국회가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다.
대통령·국회 서로를 개조 대상으로 여겨
박 대통령의 발언에 거세게 반격한
건 새정치민주연합이다. “청와대가 의회민주주의의 블랙홀”(문희상 비대위원장), “제왕적 대통령이 국가 발전의 싱크홀”(박지원 비대위원),
“지금이 개헌의 골든타임”(원혜영 정치혁신실천위원장)이라는 말이 잇따랐다.
새누리당은 한발 물러섰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 8월
관훈클럽 토론회에선 “세월호특별법 논의가 끝나면 이 문제(개헌 논의)를 시작할 때”라고 했다. 그러다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선 “개헌 논의는
이번 국회 끝나고 해도 늦지 않다”며 말을 바꿨다. 이어 박 대통령의 ‘블랙홀’ 발언이 나오면서부터 개헌에 대한 언급을 삼간다. 이재오 의원과
일부 친이계만 “개헌은 제2의 민주화 운동”이라며 공론화에 적극적이다.
결국 개헌 특위 구성은 늦춰질 전망이다. 9일 당선된
새정치연합 우윤근 원내대표가 “정기국회 안에 개헌 특위를 구성하자”며 독촉하지만 새누리당 지도부가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기국회
이후엔 특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개헌론자들이 각 당 핵심에 고루 포진해 있어 특위 구성 자체가 무산되긴 어렵다. 새누리당 김태호·이인제
최고위원, 이군현 사무총장 외에 새정치연합에서도 문희상 비대위원장, 박지원 비대위원, 원혜영 정치혁신실천위원장, 우윤근 원내대표가 개헌모임
소속이다.
문제는 그 뒤다. 개헌안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다. 우선 대통령과 국회의 생각이 다르다. 의원 중에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승자 독식 구도가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라며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이가 많다.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4년
중임제’를 주장해왔다.
여당 일각선 야당 개헌론 진의 의심
서로를 개조의 대상으로 보는 근본적인 입장 차도 있다.
“일하지 않는 의원은 세비를 반납해야 한다”며 국회를 비판해온 박 대통령으로서는 국회 주도로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는 개헌이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국회 안에서도 조율이 필요하다. 친박계는 ‘4년 중임제’를 선호한다. 우 원내대표는 “의원 중엔 분권형 대통령제 추진파가
다수지만 4년 중임제 주장도 상당하다”며 “추진 시기도 내년이 다수지만 2016년 또는 2017년에 하자는 의견도 있어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5년 단임의 대통령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현행 헌법은 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이다. 장기 집권을 견제하는 데
치중했다는 평이 많다. 당시 개헌 협상에 참여했던 이중재 전 의원은 “상식적으로는 4년 연임제가 맞지만 양김(兩金, 김영삼·김대중)은 8년
임기로 이어질지 모르는 제도에 의해 상대방이 당선되는 걸 꺼렸다”고 밝힌 바 있다.
여당 일각에선 개헌론의 진의를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야당의 개헌 추진엔 정국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개헌이 성공한다면 대선 구도는 확 바뀐다. 분권형
개헌이 되면 유력 주자 간 합종연횡이 가능하다. 정치권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다른 주자가 결합하는 분권형 모델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 또한 개헌이 가능했을 때의 이야기다. 스스로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과거 거듭된 실패로 인한 학습효과 때문에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도 많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개헌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인식론 수준의 개헌론을 현실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들 개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논의가 시작되면 진영 논리로 들어간다. ‘나는
노무현이 싫으니 노무현이 말하는 개헌도 싫다’고 한다. 결국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동력이 분산되니 대통령과 여야 모두 개헌 논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개헌 논의하면 기본권 강화도 다뤄야”
관건은 국민의 마음을 누가, 어떻게 얻느냐다. 국회가
개헌에 속도를 낸다 해도 결국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박 대통령도 국민 여론이 개헌으로 기울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향후 민심을
얻기 위한 프레임 전쟁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현재로선 박 대통령의 ‘블랙홀’ 프레임이 여야 개헌론자들의 ‘제2의 민주화 운동’
프레임을 누른 형국이다. 최근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3%가 “개헌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면서도 시기에 대해선
38.4%가 “내년 이후로”라고 답했고, 31.9%가 “올해 안에”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을 1년도 남기지 않고
4년 연임제로 바꾸자는 ‘원 포인트(One Point) 개헌’을 제안했을 때 대선 정국을 흔들려는 ‘꼼수’로 규정하고 ‘참 나쁜 대통령’
프레임으로 받아쳤다.
지금 일고 있는 개헌 논의가 권력구조에만 초점을 맞춘 데 대한 비판도 나온다. 국회의장 직속
헌법개정자문위원장을 맡았던 김철수(헌법학)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회는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안에 집중하고 국회 권한을 분산하는 양원제
개헌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의 기본권을 강화하는 개헌도 필요하니 국민도 개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올해가 이르다면
내년 국회의원 선거 때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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