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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사람 마키아벨리

鶴山 徐 仁 2014. 9. 26. 11:55

   르네상스 사람 마키아벨리
  
   14~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꽃이 핀 문학과 예술은 인간과 神(신), 그리고 국가를 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神이 지배하던 중세유럽 사회는 문예부흥, 종교개혁, 인쇄술 발전을 통해서 인간중심으로 바뀐다. 피렌체에 살았던 사람들의 천재성이 그 뒤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켰다. 이 도시를 찾을 때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한다. 피렌체는 메디치와 같은 商人(상인) 겸 정치인의 도시이고, 미켈란젤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도시이며, 동시에 니콜로 마키아벨리 같은 사상가의 도시였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지름이 45m나 되는 돔을 이고 있는, 두오모라고 불리는 성당이다. 이 성당에서 남동쪽으로 약 800m 떨어진 곳에 ‘피아자 디 산타 크로세’(Piazza di Santa Croce)라는 광장이 있다. 이곳에 ‘바질리카 디 산타 크로세(Basilica di Santa Croce)’가 있다. ‘聖(성)십자가 성당’(Basilica of the Holy Cross)이란 뜻이다. 하얀 정면이 인상적이다. 서기 1294년에 기공하여 1442년에 준공되었다. 길이가 115m로서 프란시스코 계통의 성당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성당 안에 있는 16개의 예배당은 지오토와 그 제자들이 장식한 프레스코로 유명하다. 이 성당안에는 피렌체 출신의 수많은 위인들 무덤과 墓碑(묘비)가 있다. 갈릴레오, 기베르티, 단테(무덤은 라벤나에 있고 묘비가 여기에 있다), 롯시니, 미켈란젤로, 그리고 최근 인물로는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묻혔다. 이 성당에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묘비석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1469~1527년간 생존했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마키아벨리의 생존시기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문예부흥(이는 물론 후세에 붙인 이름이다)이 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되던 시기였지만 전쟁과 정변이 끊이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분열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있었고, 교황은 직할지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규군보다는 傭兵(용병)들이 더 활약을 많이 했고, 이들은 돈에 팔려 하루아침에 편을 바꾸기도 했다. 1527년엔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유럽의 정신적 支柱(지주)인 로마를 점령하여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게르만족의 로마 약탈 이래 1000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시기에 마키아벨리는 공부를 많이 했다. 특히 로마에 대한 탐구심이 많았다. 메디치 家門(가문)이 다스리던 피렌체는 선동가 사브나로라에 의한 민중혁명, 공화정, 王政(왕정)복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격동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하여 외교와 국방분야 고위직에 종사했다. 대사, 특사로 일하기도 하고 1509년엔 라이벌 도시국가인 피사의 군대를 패배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용병을 싫어했고, 시민군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피렌체 시민군이 피사의 용병을 이긴 것이다.
  
   현실을 떠나 古代 속으로
  
   1512년, 쫓겨났던 메디치 가문이 교황과 스페인 군대의 도움을 받아 피렌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복귀했다. 마키아벨리는 反메디치 음모를 꾸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까지 받았으나 불리한 자백을 하지 않아 풀려났다. 관직에서 떠난 그는 두오모 성당의 돔이 보이는 근교에서 칩거하면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 '君主論'(군주론) 등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富國强兵(부국강병)에 로마와 베니스를 성공사례로 연구하면서 국민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현실정치를 멀리 하고 著述(저술)에 매진하던 때 친구 프란세스코 베토리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다. 그는 일상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저녁이 오면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간다. 문턱에서 나는 옷을 벗고 궁정복으로 갈아 입는다. 이런 옷차림으로 나는 古代(고대)로 들어간다. 그들은 나를 반가이 맞아준다. 이 세계에서 나는 혼자서 먹고 살면서 그들에게 묻는다. 네 시간 동안 나는 현실의 세계를 떠나 그들의 세계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古代는 로마의 세계이다. 그는 피렌체의 현실을 비관하면 할수록 찬란한 로마의 시스템과 자주적 로마인의 세계로 들어가 위안과 교훈을 얻으려 했다. 르네상스의 모토는 “로마로 돌아가자”였는데,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전형적인 ‘르네상스型(형) 인간’이었다.
   마키아벨리란 이름은 여러 가지 인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냉혹한 권력주의자란 인상이 하나 있고 냉철한 정치학자란 인상이 있다. 냉혹한 권력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근대 정치학의 문을 열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많다.
   그가 쓴 君主論은, 일부 인사들로부터는 권력자들이 좋아할 말들만 담은 책으로서 도덕과 원칙이 결여된 권모술수만 소개하고 있는 나쁜 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가리킨다. 로마 교황청은 오랫동안 君主論을 禁書(금서)목록에 올렸다.
  
   정치에서 도덕론을 제거한 사람
  
   이처럼 부당한 비판을 많이 받는 마키아벨리는 실제로는 대단한 사상가요 선각자였다. 그는 권력과 인간의 本性(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권력의 속성,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권력자만을 위한 위선적인 정치가 아니라 국민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 실용적인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확신이었다.
   그는 근대 정치학의 嚆矢(효시)이다. 그가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의 아버지가 된 것은, 정치를 지배하던 원리를 도덕론에서 현실론으로 교체하고, 권력의 안정적 관리의 목표를 國利民福(국리민복)를 위한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무식한 식자층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도 그가 도덕을 앞세운 識者層(식자층)의 허구와 철없음과 僞善(위선)을 많이 벗겨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의 韓非子(한비자)가 욕을 먹고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인간이란 원래 권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되어 있다. 어느 사회이든 권력자는 소수이고 절대다수는 그 권력행사의 대상이 되는 弱者(약자)이다.
   그러니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기피하는 사람이 항상 많은 법이다. 권력의 이익을 보는 사람도 많지만 인간이란 원래 피해에 대한 기억은 오래 가는데 이득을 본 데 대한 고마움은 쉬 사라지고 그 이익은 모두 자신이 똑똑한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정치가는 권력을 富國强兵을 위해 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부하들을 통제할 수가 있어야 한다. 소수의 부하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군주만이 다수 국민들의 복지와 행복을 구현할 수 있다. 권력자는 인기에 영합해선 안 된다. 말없는 다수 국민들의 욕구를 항상 느끼고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말 많은 지식인들의 위선을 깨고 무시할 수 있어야 다수 국민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용주의를 정치학에 도입하다
  
   마키아벨리야말로 실용주의를 정치에 적용한 최초의 학자이다. 그 실용주의를 담은 ‘君主論’은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마키아벨리보다 2000년 전의 사람인 管仲(관중)의 주장과 90% 이상 일치한다. 그는 君主의 폭력 행사를 변호했으나 그 폭력행사는 최단시간 내에 최소한으로 그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君主論만큼 중요한 著作(저작)은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 열권에 대한 담론’이다. 리비우스는 로마사를 쓴 로마인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로마 시절의 경험을 인용하면서 공화국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고 권력은 어떻게 견제되어야 하는가를 다뤘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이 公國(공국)보다 효율적이라고 믿었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가지 문장만 읽어도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大家(대가)라고 욕하는 것이 얼마나 무식한 짓인지 알 수 있다.
  
   <시민의 정부는 군주의 정부보다 더 좋다>
   <시민과 군주들의 잘 잘못을 비교하면 시민이 항상 우월한 자질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군주는 臣民(신민)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해선 안 된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군주들의 失政(실정)에 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오늘의 정치인들에게도 통용이 되는 명언들을 많이 남겼다.
   <머리에 넣어두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은 신질서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어려운 사업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런 개혁의 실행자는 현체제 아래서 단물을 빨아먹고 사는 사람들 전체를 敵(적)으로 돌려야 하며 신질서로부터 득을 보는 사람들로부터는 아주 미미한 지지밖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체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공포감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불신감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개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혁으로 손해 볼 사람의 저항은 확실하고 끈질긴데 개혁으로 득을 볼 사람들은 아직 그 구체적 혜택에 대한 체험이 없으므로 反개혁 세력을 잠재울 만한 지지를 개혁자에게 보내주지 않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또 이런 말을 남겼다.
  
   <권력을 가진 인간들 사이에서 최근에 베풀어준 은혜에 의해서 이전의 원한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인간은 은혜를 쉽게 잊지만 원한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또 들어보자.
   <자신의 안전을 자신의 힘에 의하여 지킬 의지를 갖지 않은 경우, 어떤 국가라고 해도 독립과 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서 힘에 의존하지 않고 운에 의존하려들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선 자신의 실력에 기초를 두지 않는 권세나 명성만큼 허무한 것은 없다」는 타키투스의 말은 어느 시대에나 유용한 현명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