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전자코 시스템’과 ‘더듬이 수색’
세 번째로 배포된 회의자료 ‘전자코 시스템 해수 채취 현황’은 한 민간업체인 (주)센텀테크에서 개발해 낸 수중수색 방법의 보고서였다. 그때까지 128개 객실에서 시신이 인양되는 작업은 손으로 더듬어 가며 시신을 찾는 식이었다. 기자도 예전에 수중 수색 훈련을 받아보았고 그 자격증도 취득한 적이 있지만 ‘더듬이 수색’이란 방법은 여기서 처음 들었다. 현장에서 이름 붙여진 ‘더듬이 수색' 방법은 우리나라 말고는 없을 것이다.
‘더듬이 수색’이란 시야가 20cm 안팎인 수중에서 수색하는 방법이다. 미국과 유럽의 해양 선진국가들이 개발해 낸 잠수 기법 매뉴얼에는 시계불량인 수중엔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게 원칙이라 우리와 같은 수색방법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수색팀에서는 이런 환경을 감안해서 또 다른 수색방법을 고안해 냈다. 128개나 되는 선실 내에서 장시간 屍身(시신)이 갇혀 있다가 발견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시신이 있는 방과 없는 방의 수질이 다를 것이라는 가정을 상정했다. 視程(시정)이 짧고 어두운데다가 각종 장애물로 잠수사들의 수색 작업이 어려우니 눈 대신 코를 사용하는 수색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6월부터 그들은 입수하는 잠수사들에게 빈 병을 가지고 들어가 각 방마다 물을 채취해 달라는 협조를 구했다.
그때부터 선체 내부로 진입하는 잠수사들은 자신이 들어선 객실마다 물을 가득 채워 위로 올려 보냈다. 이 물들이 팽목항에 설치된 분석실에는 현재 84개 샘플로 모여졌으며 성분이 분석되어 있다. 이론상으로는 시신이 발견된 방의 해수 샘플과 가장 유사하게 검출된 샘플 구역에 대해서는 시신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재수색을 실시하면서 해수샘플을 채취한다는 방침이 정해진 것이다. 또한 시신을 발견하는 즉시 부근의 해수를 채취할 수 있도록 여분의 채수병도 비치토록 해 둔 것이다.
회의시간에 배포된 ‘전자코 시스템 해수 채취 현황’ 은 그 과정을 담은 한 장이 보고서인 셈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시스템으로 찾아낸 시신은 아직까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자코 시스템’에 대한 기대도 사그러드는 중이었다. 해경의 한 관계자는 거의 모든 객실이 조류의 영향을 받고 있어 특이한 성분도 한시적으로 머물 뿐 점차 흘러나가 버리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 방법도 끝까지 한다는 방침이었다.
고민
박희범 주임(경위·45)은 인천 해양경찰서 특공대 교육팀장으로 전국 해경 특공대원들의 전술교육을 전담하다 사고 당일부터 이곳 지휘부와 합류했다. 그는 통합지휘체계인 C4I 개념을 적용한 잠수 수색 구조 지휘부의 지휘통제체계를 구축한 뒤 이춘재 국장과 임근조 과장을 보좌하는 중이다. 이날 그가 정보 차원에서 내일의 기상상황을 보고하며 회의가 시작됐다.
박 주임의 보고가 끝나자 백성기 총감독이 발언했다. 백 감독은 현재 나이트록스(Nitr-Ox) 잠수를 총 지휘하는 중이다. 이 잠수기법은 수심에 따라 공기에 산소를 28~36%까지 혼합해서 잠수사에게 공급해 수중에서의 질소중독에 걸리는 시간을 늘이는 방식이다. 40m 이내에서는 압축 공기보다 잠수 시간을 最長(최장) 2~3배 연장할 수 있지만 잠수 심도가 깊어지면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 하지만 세월호 수색에서는 잠수 시간을 기존의 방식보다 두 배 가량 늘일 수 있게 돼 유가족들이 반겼다. 문제는, 이들에 의한 인양 실적이 한 具(구)에 그친 채 한 달 이상 지속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기 감독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심해잠수의 전설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7년 당시 필리핀에서 재호흡기 장비인 리브리더를 사용해 두 동료와 수심 100m로 내려갔다. 그런데 한 동료 다이버가 사망한 채 상승했고 옆의 다른 동료는 의식불명이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동료를 급히 물 위로 올린 뒤 감압병에 걸린 자신은 수중 50m 부근으로 다시 내려가 감압을 위해 무려 17시간이나 버티며 머물렀다고 한다. 그가 나중에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그의 신체는 정상에 가깝게 회복됐다. 이 과정에서 백성기 감독은 감압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산소 농도와 그 사용법을 자신의 몸으로 생체실험을 하게 된 셈이었다.
'수중수색 일일회의'. 중앙 우측의 파란 점퍼가 기자. 그 우측의 흰 머리가 보이는 사람이 이춘재 해경 국장. 맞은편에 임근조 과장. 기자 맞은편 모자쓴 이가 백성기 총감독. 박희범 주임이 서서 기상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
현재 바지선에서 사용중인 나이트록스 다이빙은 전적으로 백성기 감독의 블랜딩(Blending·혼합) 기법에 의존하는 중이다. 그는 이날 회의석상에서 물 속의 視界(시계)가 좋지 않다며 걱정했다. 맹골수도 지역의 시계가 가장 좋을 때는 7~8월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도 5m가 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금년은 특이한 스타일 같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끝으로 각 팀장들이 수색 결과 보고를 했다.
해군의 A팀은 8월17일 잠수 작업을 하지 않았다. 해경 수색조만 A 스테이지로 입수해 선체 외곽을 수색했다. 대신 해군 A팀은 해군 B팀과 함께 세월호 4층 중앙로비를 再수색했다. 팀을 합쳐 수색한 이유는, 중앙로비에 많은 장애물들이 쌓여 있어 통로 개척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도 이미 세 번 이상 훑은 곳이었다.
C팀의 이명학 팀장은 3층 船尾(선미)의 DR(화물기사룸) 8호실 통로 개척작업과 장애물 제거 작업을 하다가 4층 선수 우현의 F4지점에 하잠줄 설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4층 船首(선수) 중앙 우현의 베드룸 B-12~14번 방을 재수색했다고 보고했다.
D팀의 윤병정 팀장은 4층 B-5, 6, 22, 23, 27, 28번 방을 재수색하며 동영상으로 촬영을 했다. 단원고 학생들의 방이며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로 방 내부의 모든 장면들을 화면에 담아 이상 유무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날 D팀은 4층 선수와 좌현 F(패밀리룸) 1~3호실 및 B-4를 재수색했다고 보고했다.
88수중의 E팀이 맡은 수색 구역은 세월호 4층 선미 부분이다. 정창호 E팀장은 다인실의 외부 선체를 절단한 뒤 그곳을 통해 잠수사들을 투입시키는 중이다. 그는 “우리가 들어가는 4층 다인실의 바닥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인실 중앙쯤에서 칸막이 같은 벽면에 이음새가 이탈하고 있고요. 조만간 무너질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회의실은 일순 긴 한숨과 함께 긴장감이 돌았다. 배가 옆으로 드러누워 있기 때문에 바닥은 수직의 벽면이 돼 있다. 이것이 떨어지는 타일조각처럼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6월24일 기자가 바지선에 올랐을 때 들은 이야기가 기억났다. 당시 선체 내부에 들어간 다이버의 호흡기에서 발생한 기포가 올라가면서 판넬들을 밀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벽면으로 설치했던 판넬들이 천정처럼 위치가 변동된 채 물 속에서 이음새가 헐거워지던 중 기포가 밀어올리는 힘에 무너진 것이었다. 수중 공사에서 가장 피해야 할 위험한 상황들이었다. 그런데 약 두 달이 지난 지금은 그 판넬 대부분이 무너진 상태이고 이것이 다이버를 덮칠 경우 대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다음날 수색 예정인 장소는 다인실의 좌현쪽 공간인데 현재 세월호가 왼쪽으로 돌아누운 상태여서 이들이 진입하려면 우현 외벽의 절단면을 통해 들어간 뒤 계속 하강해야 도달할 수 있다. 가장 깊은 수심이 되는 셈이다. 현재 질소에 산소를 36%까지 섞어 쓰는 나이트록스 기법의 잠수를 함으로써 약 한 시간 가량 잠수시간을 연장할 수 있어 간신히 좌현 벽면까지 수색을 하는 중이다. 보고를 하던 정창호 팀장은 “문제는 곳곳에 붕괴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고, 이미 이곳엔 屍身이 더 이상 없다고 확인됐는데 우리가 얼마나 더 위험을 감수하며 수색해야 하지요?”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의 표정은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정 팀장은 “이곳에 학생들이 110명이 있었다는 데 현재 유실물로 가방만 20개 건져 올렸습니다”라며 보고를 마쳤다.
이춘재 국장은 어제 저녁 팽목항에 나가 실종자 가족 앞에서 설명회를 가졌다. 그때 실종자 가족들이 “시신을 찾지 못하면 그냥 나오지 말고 유품이라도 가져와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국장은 이날 회의석상에서 팀장들에게 이 말을 전하며 표정을 살폈다. 가족들의 요구는 그러니까 수심 40여m 속에서 책가방이나 케리어를 들고 올라오라는 얘기다. 팀장들이 난색을 표했다. 긴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해경과 해군, 그리고 중앙119 구조대원들은 깊은 한숨에 신음까지 나왔다. 다만 C, D, E 팀장들은 그런 분위기에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재 C, D, E팀의 메인 다이버들은 선체 내부로 진입하는 산업 잠수사들로 88수중 소속의 민간 다이버들이다. 이들은 매일 매일이 임금의 증가를 부른다. ‘의무’와 ‘사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업’도 ‘위험’ 앞에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현재 민간 다이버들의 입장은 대략 ‘사업’과 ‘위험’ 사이에 놓인 상황인 것이다.
그중 한 민간 다이버가 “아무리 그래도 저 수심에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오라니…우리가 핸드폰 같은 것은 찾아서 전달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무거운 가방을…우리도 목숨 걸고 작업하는데…”라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해경 지휘부를 압박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회의가 끝나면 李 국장은 P정을 타고 팽목항으로 나가 실종자 가족 설명회에 참석해야 한다. 민간 다이버들은 그때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달라는 뜻이었다.
이날 회의석상에서 최대 고민거리는 로비 수색에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수색을 한 곳이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재차 수색을 요구하고 있었다. 로비는 뿌연 흙탕물 속에 무거운 나무 의자들과 소파 등 여러 가구들이 담요나 커튼 등의 큰 헝겊들과 뒤엉켜 있는 곳이었다. 해군 2개 팀이 선체를 절단한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서도 통로 개척이 만만찮은 곳이라고 한다. 이미 예전에 2차 3차 수색을 한 곳이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다시 수색해 달라고 요구중이었다. 이곳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지난 6월24일 시신 1구가 수습된 이후 한동안 시신의 발견이 없었다. 당시 남은 실종자는 11명. 해경 형사과에서는 11명의 신원을 확보하고 이들이 세월호에 승선해 침몰 당시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구조된 승객들을 대상으로 탐문 수사해 왔었다. 누구는 3층 로비에서 보았다고 하고 누구는 4층 다인실에서 보았다고도 했다. 이런 식으로 실종자 11명의 마지막 목격위치를 찾아내 3009함의 상황실로 내려 보냈다. 이춘재 국장과 임근조 과장이 받아 본 자료를 토대로 지금까지 4차 수색을 계속 해오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그나마 1구가 발견된 것도 목격위치와 무관한 장소였다. 이렇게 되면 계속되는 위험도의 증가와 아랑곳없이 잠수 수색 팀은 무한정 선체를 누벼야 할 판이었다. 고민이 깊어져 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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