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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대통령 "내 아들을 후방으로 빼시오", 이유는?/ 프리미엄조선

鶴山 徐 仁 2014. 7. 1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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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 아들을 후방으로 빼시오", 이유는?

     

     

  • 남도현
    DHT AGENCY 대표
    E-mail : knclogix@yahoo.co.kr
    젊은 시절부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세계사, 전쟁사 및 군..
 
입력 : 2014.07.16 16:07

 

권력자의 부탁

1952년 12월, 엄청난 전투기 편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한 대의 여객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인물은 제2차 대전의 전쟁 영웅이자 차기 미국의 대통령으로 확정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였다. 그는 선거 운동 기간 중 만일 대통령에 당선되면 6.25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취임전이라도 한국을 즉시 방문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이를 실천하려 방한한 것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그는 위험한 최전선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였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그는 위험한 최전선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였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자가 본토 밖의 최전선을 시찰한 것이 이번이 사상 최초였을 만큼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오성장군 출신답게 그는 능수능란하게 전선을 누비며 의견을 듣고 현황을 파악하였다. 그런 그가 미 제8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령관이자 막역한 후배인 밴 플리트로부터 보고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조용히 듣던 아이젠하워는 의례적인 보고가 끝난 후 다음과 같이 한 가지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John S. D. Eisenhower)은 지금 어디에서 근무하고 있습니까?” 당시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6.25전쟁에 참전 중이었다. 존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둘째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인 다우드가 어려서 병사하였기에 외아들과 다름없는 귀한 존재였다.
제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초 스코틀랜드에 있는 컬진성을 함께 방문한 아이젠하워 부자. 전역한 부친과 달리 계속 군에 남은 아들 존은 6.25 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복무하였다.
제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초 스코틀랜드에 있는 컬진성을 함께 방문한 아이젠하워 부자. 전역한 부친과 달리 계속 군에 남은 아들 존은 6.25 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복무하였다.

 

 

공과 사


이 질문은 아버지가 전쟁에 참전 중인 아들의 소식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질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존 소령은 미 제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현재 중부전선의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라고 의례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아이젠하워의 부탁을 듣고 경악하였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빼주시겠습니까?” 이는 바로 얼마 전에 외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가 듣기에 몹시 거북한 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부탁을 받은 밴 플리트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못하였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젠하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군,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포로가 된다면 적들은 미국과 흥정하려들겠지만 결단코 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국민들이 고초를 겪는 대통령 아들의 모습을 보고 이것은 미국의 자존심 문제이니 즉시 구출 작전을 펼치라고 압력을 가하면 분명히 장군은 많은 애를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단지 내 자식이 아니라 대통령의 자식이 포로가 되어 차후에 작전에 차질을 주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의 예방 조치만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이젠하워의 말을 들은 밴 플리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크게 답하였다. “각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존 아이젠하워는 후방의 정보처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이후 육군 준장을 거쳐 벨기에 주재 미 대사까지 부임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을 마치고 귀국하여 아이젠하워와 면담한 밴 플리트. 그는
미 제8군 사령관을 마치고 귀국하여 아이젠하워와 면담한 밴 플리트. 그는 "아들을 후방으로 전출시켜 달라"는 대통령의 요구가 사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앞서서 실천한 이들


아이젠하워의 부탁은 차기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 당선자라는 지위를 남용한 명령이 아니었고 전혀 그럴 의도도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야전사령관에게 아버지가 아닌 대통령의 입장에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부탁을 하였을 뿐이었다. 또한 아이젠하워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한 밴 플리트의 화답도 단지 차기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보신책이 아니었음을 누구나 다 알았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고위 지휘관과 그 아들이 동시에 참전하여 피를 흘린 경우는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 외에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휴전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대장과 그 아들 마크 빌 클라크(Mark Bill Clark) 육군 대위의 경우인데, 아들 빌은 금화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복무도중 부상을 당하여 전역하게 되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처럼 고위직의 자제들이 앞 다투어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임에 틀림없다. 총 142명의 장성의 아들들이 참전하여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이 참전 의사를 밝혔을 때 대부분의 부모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계속)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6.25 전쟁 당시 마지막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함께 참전한 그의 아들은 전상을 당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6.25 전쟁 당시 마지막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함께 참전한 그의 아들은 전상을 당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