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연산군 유배지의 쓸쓸함… 北 주민 '노크 귀순'으로 알려진 섬/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4. 1. 3. 18:25

허망하고 잔인하다… 때묻지 않은 이 쓸쓸한 풍경

  • 교동도(인천)=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 입력 : 2014.01.02 04:00

    섬마을에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갯벌에 모여 있던 새들은 뺨을 깃털에 박고 움츠러들었다. 해안도로 옆 갈대밭은 미친 듯이 바람에 맞춰 춤을 췄다. 고깃배들은 포구에 닻을 내리고 잠시 출어를 멈췄다. 주민들은 보이지 않고, 가끔씩 원색 나들이옷을 입은 외지인들이 출몰했다.
    교동도는 그랬다.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별반 달라진 풍경은 없다. 지난해 8월 3km 북쪽 황해도 연백 땅 주민이 헤엄쳐서 넘어와 민가 문을 두드렸을 정도로 북한과 가까운 섬. 그래서 긴 세월 동안 교동도는 바깥세상과 절연해 살아왔다. 다음 달이면 그 바깥세상을 잇는 연육교가 임시개통 되는, 그래서 역사상 최초로 뭍과 하나가 되는 섬마을 교동도 여행.

     

     

    역사를 간직한 섬, 교동도

    교동도는 인천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로 15분이면 닿는 섬이다. 한국에서 열네 번째로 큰 섬이지만 교동도는 민통선 안쪽 지역이라 최근까지도 출입이 어려웠다. 개발도 더뎠고, 바깥바람도 덜 탔다. 그런 열악한 조건이 지금은 도시 사람들에게 교동도를 찾게 만드는 매력이 되었으니 세상사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교동읍성

    교동도는 역사 속에 여러번 등장하는 섬이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략했을 때, 7개 방향에서 공격해 함락시킨 관미성이 교동도 화개산성이라는 주장이 하나다. 파주라는 주장도 있지만 섬 주민들은 믿지 않는다. 또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상을 모신 교동향교는 이 땅 최초의 향교다.

    제일 유명한 인물은 연산군이다. 온갖 악행과 패륜을 다 실천에 옮긴, 용감하고 젊은 부도덕자 연산군은 서른한 살에 중종반정으로 쫓겨나 이곳 교동도로 유배를 당했다가 두 달 만에 죽었다. 그리 자랑할 위인이 못 되는 인물인지라, 그 유배지 또한 섬 안에 세 군데나 될 정도로 설이 분분하다. 그 중 한 군데가 읍내리에 있는 ‘연산군 잠저지(潛邸地)’다. 교동도 여행은 대개 이곳에서 시작한다.

     

    폭군의 흔적… 역사 그리고 허망함

    선착장에서 좌회전해 외길을 10여 분 달리면 오른편으로 교동향교 이정표가 나온다. 앞서 말한 이 땅 최초의 향교다. Y자 갈림길 왼쪽은 화개사 방향, 오른편은 향교 방향이다. 갈림길 한가운데에는 섬 곳곳에서 모아온 비석들이 서 있다. 교동도를 거쳐간 관리들 공덕비들이다. 개중에는 필시 백성들에게 암묵적인 강제로 만들어낸 가짜 공덕비도 있을 터. 향교는 관리사무소에 부탁하면 문을 열어주고 안내를 해준다. 향교 왼편 공터에 있는 약수로 목을 축이고 다시 나와 큰길에서 200m만 더 가면 왼편으로 교동읍성 이정표가 나온다.

     

     

     

                                     (왼쪽부터) 교동향교 / 연산군이 살았던 집터

     

     

    읍성은 사라지고 성문 잔해가 마을 한복판에 서 있다. 규모가 지극히 작아서, 그리고 남은 잔해 앞뒤로 주택들이 조밀하게 붙어 있어서, 풍경이 애잔하다. 벽에는 옛날에 새겨넣은 글자들이 보인다. 성문 앞에는 ‘강화나들길’이라는 작은 표지가 서 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 골목으로 가면 풍경은 더 애잔해진다. 시멘트로 포장한 어느 집 앞마당 한켠에 화강암 석물들이 장식돌로 서 있다. 한때 성곽으로 쓰였음이 분명한 돌들인데 세월 속에 여염집 앞마당을 채우는 역할로 바뀌었다. 그 집 오른편 텃밭 뒤로 큼직한 돌기둥 두 개가 서 있다. 그게 관아터다. 연산군 잠저지는 그 옆집 밭이다.

     

     

     

                          느티나무 발치에 남은 읍성 성곽 흔적

    한때 만인지상이었던 사내가, 바다를 바라보는 이 얕은 언덕 위 집에 갇혀 두 달을 살다 병사했다. 오르는 오솔길에는 그가 사용했다는 폐우물이 철조망을 뒤집어쓰고 있다. 백성은 물론 나라에서도 그 터를 돌보지 않아 지금은 이렇게 밭으로 변해버렸고, 겨우 2009년에야 비석 하나 생겨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부른다. 그나마 ‘잠저(潛邸)’는 ‘임금이 왕실에 들기 전 살던 곳’이라는 뜻이니, 비석 내용 또한 무식하다.

    잠저지 뒤편 언덕 능선에는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서 있다. 느티나무 발치에는 아직 남은 읍성 성곽이 보인다. 허망하다.
    여행객들은 읍내리에서 역사를 읽고, 허망함을 읽는다. 또 다른 폭군 광해군도 첫 유배지가 여기 교동도였다. 제주도로 옮길 때까지 이 폭군 또한 바다를 바라보며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가 살았던 집터는 전혀 흔적이 없다.

     

    과거에 대한 향수와 분단의 현실

     

      바닷바람은 매섭다. 그러나 햇살이 부서뜨리는 해안길 은빛 파도는 아름답다.

     

    그리고 해안길로 간다. 마을에서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다. 바닷바람은 매섭다. 햇살이 부서뜨리는 은빛 파도는 아름답다.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날아가는 새들은 더 아름답다. 광포하게 춤추는 갈대밭도 아름답다. 낭만을 바라보다가 대룡시장으로 간다.

    대룡시장. 황해도 연백에서 장날 장보러 나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들이 만든 장터다. 이발소, 정육점, 구멍가게, 비좁은 골목…. 모든 사물이 과거 시간대에 멎어 있다. 200m 정도 되는 이 골목이 주말이면 주민보다 더 많은 외지인으로 시끌벅적하다.

    장터에서 시간을 보내다 북쪽으로 가본다. 사방팔방 직선으로 뚫린 시멘트 농로를 헤매다 해안에 닿으면 자세히 보시라, 철책이다. 북한과 거리가 10리도 되지 않는다. 늙은 연백 출신 사람들이 와서 한참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다 등을 돌리는 곳이다.

    철책이 끊기는 동쪽해안을 통해 속칭 ‘노크 귀순’이 이뤄졌으니 이를 안보의식 태만이라 비난하지는 말자. 주민들 생업을 위해 일부터 열어놓은 해변이요, 그 당시에는 악천후로 제대로 눈코도 구분할 수 없었다니까. 이 철책을 손으로 만지며 산책할 수도 있으니, 연육교가 완성되고 꽃피는 봄이 오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때때옷 입고 와서 기념사진도 찍는 ‘기이한’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교동도 여행은 정체불명이다. 권력의 허망함과 과거에 대한 향수와 분단이라는 잔인한 현실이 이 섬마을에 범벅이 되어서 겨울바람에 날아다닌다.

     

    여행 수첩

    가는길 : 강화도 창후리선착장에서 수시로 페리호가 뜬다. 차량 1만6000원, 1인당 2300원. 연육교 다리 공사로 뱃길에 모래가 쌓이면서 출항시간이 불규칙하니 사전확인 필수. 화개해운) (032)933-4268, 교동면사무소 (032)930-4310. 서울 강북쪽에서 가려면 자유로에서 일산대교(유료)→김포→초지대교→창후리 코스 추천.

    강화나들길 : 강화군에서 조성한 산책로. 이 가운데 교동도 구간은 9구간이다. 선착장에서 해안을 따라 읍내리를 거쳐 교동향교, 화개산, 대룡시장을 도는 13km 코스.

    먹을곳 : 대룡시장에 한식, 중식 등이 몰려 있다. 걷기 위해서 간다면 도시락과 물을 준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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