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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情報 參考

채명신 장군

鶴山 徐 仁 2013. 11. 27. 16:59

 

 
채명신 전 특수단체인
생몰
1926년 11월 27일(북한 곡산) ~ 2013년 11월 25일 (향년 86세) | 호랑이띠, 사수자리
학력
육군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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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蔡命新, 1926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외교관·공무원·정치가·체육인·사회기관단체인으로 6·25 전쟁과 월남전쟁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5기로 졸업하여 참위..

 

경력
경력 더보기
  • 2004 ~ 사단법인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
  • 2004 ~ 베트남 참전유공 전우회 총재
  • 2000 ~ 2003 베트남 참전유공 전우회 회장
  • 2006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 2005 고려대학교 제3회 정책인대상
  • 2001 자랑스러운 세종인상

 

 

故 채명신 前 주월사령관 사병(士兵) 묘역에 안장

 

 

국방부 관계자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른 것

 

정리/김필재   

 

기사본문 이미지
25일 별세한 ‘베트남 전쟁 영웅’ 채명신(蔡命新, 예비역 중장) 前 주월사령관이 서울 현충원 내 일반 사병 묘역에 안장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생전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이를 받들기로 하고, 그 결과를 유족에게 통보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軍 관계자는 “장군이 자기 신분을 낮춰 사병 묘역에 안장되길 희망한 것은 현충원 설립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숭고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서울 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확정했다”고 전했다.

고인이 묻히게 될 묘지 크기도 일반 사병과 같은 3.3㎡이다.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 선진국의 경우 생전의 계급을 구분치 않고 故人을 안장시키는 전통이 있다. 황해도 곡산 출신의 蔡 전 사령관은 육사 5기로 군에 입문해 11연대장, 3사단 참모장, 제2훈련소 참모장, 38사단장, 5사단장을 역임했으며, 5·16혁명 당시 '혁명위원회 5인 멤버'로 활동했다.

6·25전쟁 당시 蔡 전 사령관은 國軍 최초의 특수 유격부대인 ‘백골병단’(白骨兵團)을 이끌었다. 백골병단은 조선공산당 제2비서이자 對南 유격부대 총사령관이었던 길원팔 북한군 중장을 비롯, 빨치산 부대 참모진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蔡 전 사령관은 베트남에서 복귀한 뒤 2군 사령관을 지냈다. 유력한 참모총장 후보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끝까지 반대, 1972년 6월 예편했다.

이후 외교관으로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으며 태권도 보급(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에 공을 세웠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84) 여사와 경덕(재미 사업가)·은하(주부)·경화(주부) 등 1남 2녀가 있다. 蔡 전 사령관의 장례는 육군장으로 진행되며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이다.

 

정리/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 2013-11-27, 12:04 ]

 

 

 

 

故채명신 駐월남사령관, 장군 묘역 아닌 '일반사병 묘역'에 묻힌다

  • 조선닷컴

  •  

     

    입력 : 2013.11.27 14:30 | 수정 : 2013.11.27 14:32

     
    지난 25일 향년 88세로 별세한 채명신(蔡命新) 초대 주(駐)월남 한국군 사령관이 서울 현충원 내 3.3㎡ 규모인 일반사병 묘역에 묻힌다.

    국방부 관계자는 “생전에 ‘파월 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이를 받들기로 하고 그 결과를 유족에게 통보했다”고 27일 말했다.

    일반적으로 별세한 장군은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장군(將軍) 묘역에 안장되는 관행을 깬 것이다.

    고인은 별세하기 전 유족에게 사병 묘역에 묻히길 희망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채명신 전 사령관의 유지를 받아들기로 방침을 확정했다.

    군 관계자는 “장군이 자기 신분을 낮춰 사병 묘역에 안장되길 희망한 것은 현충원 설립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고인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서울 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하는 방안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고인이 묻히게 될 묘지 크기도 일반 사병과 똑같은 3.3㎡이다.

    김형기 서울현충원장은 “고인의 묘지와 비석 크기 역시 일반 사병과 같다”면서 “파월참전자 회장을 맡아왔던 고인이 추모행사를 해왔던 2번 사병 묘역에 안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5기)를 졸업한 고인은 이듬해 6·25 전쟁에 소위로 참전해 중대장, 유격대장, 연대장 등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국전쟁 종전 후에는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5년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1969년까지 3년 8개월간 파월(派越) 한국군을 지휘해 ‘베트남전의 영웅(英雄)’으로 불린다.

    그는 예편 후 1972년부터 77년까지 주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면서 해외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채 예비역 중장은 이런 공을 인정받아 태극 무공훈장(1회), 화랑 무공훈장(1회), 충무 무공훈장(3회), 을지 무공훈장(2회), 국선장, 방위포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씨와 1남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뤄지며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1월 28일 오전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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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pub]故 채명신 장군에 대한 추억과 김대중(DJ)

  • 조갑제·조갑제닷컴대표
  •  

     

    입력 : 2013.11.28 15:45

    
	[조선pub]故 채명신 장군에 대한 추억과 김대중(DJ)
    월남 주둔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던 蔡命新(채명신) 장군이 87세를 一期로 별세하였다. 월남전에 참여한 한국군은 연 30만 명이었다. 이들은 지금 60~80代이다. 채명신 장군과 함께 ‘맹호는 간다’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세대이다.

    “자유통일 위하여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

    2001년 8월23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방한중이던 월남의 찬 둑 루옹 대통령에게 '불행한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하여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사실상 사과를 한 셈이다. 그 직후 만났던 채명신 장군이 화를 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金 당시 대통령의 발언은 정통 역사관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과도 맞지 않았다.

    첫째, 대한민국이 국군을 월남전에 보낸 것은 월남의 자유뿐 아니라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고 우리의 체제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빼내 월남에 보내려고 했다. 이것을 간파한 朴正熙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견제하기 위하여 전투 사단 파견을 결심했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 정부는 월남파병을 계기로 하여 많은 實益(실익)을 챙겼다. 월남특수란 것이 일어났다. 월남에 많은 한국 회사가 진출하여 돈을 벌었고 미국 존슨 정부는 한국에 많은 원조를 주었다. 한국의 공업화에 큰 기여를 한 KIST, 즉 한국 과학기술원은 월남전 파병에 대한 존슨의 선물이었다. 월남전에 진출한 장병들과 노무자들이 벌어들인 돈과 배운 건설 기술이 경부 고속 도로 건설에 투입되었다. 월남전선에서 한진, 현대 같은 회사들이 성장했다. 특히 건설회사들이 이곳에서 기술을 터득하여 70년대에 중동으로 뛸 수 있었다.

    셋째, 월남전에 대한민국이 파병한 것은 정의로운 일이었다. 미군은 6.25전쟁 때 5만 명의 젊은이를 희생시켜가면서 한국을 구해주었다. 그 미국이 파병을 부탁하는 데 혈맹인 한국이 의리를 지킨 것이다. 이 일 덕분에 韓美 동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월남전쟁의 도발자는 17도선 이북의 공산 월맹이었다. 그들은 국제협정을 무시하고 정규사단을 17도선 남쪽으로 내려보내 공산혁명을 노린 게릴라 전을 주도했으며 월남의 베트콩 부대를 부렸다. 명백한 남침이었다. 이 침범행위에 대해서 자유세계가 군대를 보낸 것이다. 호주, 필리핀 등도 파병하였다. 1975년 월남 전역이 공산화되면서 미군 편에 섰던 한국은 勝戰國(승전국)이 되지는 못했으나 결코 사과할 나쁜 일을 한 적은 없다.

    넷째, 한국군은 국제법을 위반한 월남 공산군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 바로 우리가 피해자인 것이다. 그들은 전쟁규칙을 위반하여 군인 복장을 하지 않고 민간인으로 행세하면서 우리 국군을 괴롭혔다. 약 5000명이 전선에서 죽었고 1만 명 이상이 다쳤다.

    나는 당시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상의 관점에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일방적 사과를 반대하고 규탄하는 바이다. 김대중 개인이 사과하는 것도 문제인데 하물며 국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보위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우리의 자랑스런 과거를 무효시하는 사과를 국민과 국군의 동의 없이 했다는 것은 중대한 과오이다.

    그의 사과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이 사과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관은 월남참전은 자랑해야 할 일이었지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일부 언론과 좌파에서 검증도 되지 않은 학살설을 들고 나와 월남파병을 죄악시하는 주장을 폈으나 다수 국민과 국군의 생각은 월남파병이 우리나라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이런 역사관을 바꾸려면 많은 논의와 토론을 거쳐야 하고 아주 조심해서 해야 할 일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김숙희 장관이 월남파병에 대해서 용병 운운 했다가 군 장교들의 반발로 사직했던 적이 있다. 이번 김 대통령의 발언이 가진 무게는 김 장관과 비교할 바 아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든 것이다. 공산 국가의 원수한테 그 공산 국가의 불법적인 침략행위-혁명기도를 막으려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과한 셈인데, 그렇다면 공산화를 당연한 것으로 본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월남의 공산통일이 월남 사람들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지 불행을 가져다 주었는지 아직은 속단할 일이 아니다. 공산화 후 발생한 보트 피플의 비극은 공산통일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경제를 낙후시켰음을 증명한다. 뒤늦게 월남정부가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받아들여 개혁 개방에 나서고 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공산통일은 善(선)이고 이를 막으려고 했던 자유세계의 反共(반공) 행동은 사과할 만한 惡(악)이란 느낌을 줄 가능성도 있다.

    셋째, 김 대통령의 사과는 1960년대 - 1970년대를 살았던 세대로부터 추억을 빼앗아가는 행동이다. 젊은이들이 월남에 가서 고생하고 있으니 국내에 있는 우리도 더 열심히 일하자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었다. 전선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늘 긴장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긴장을 국가 건설에 잘 활용한 경우이다.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는 '용사는 말없이 바다를 건넜다. 자유보다 더 귀한 것, 있으면 말하라'는 軍歌(군가) 가사처럼 우리도 이제 다른 나라의 자유를 지켜줄 만큼 컸구나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김 대통령의 사과는 이 자랑스럽고 영광된 시절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월남전 세대의 자부심과 추억을 앗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제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담으려면 새로운 물을 길어와야 한다. 우선 월남참전 단체와 제대 군인들이 김 대통령의 사과를 취소시키는 방향으로 의견과 행동을 모아야 할 것이다. 월남전 세대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이하의 글은 필자가 쓴 박정희 傳記(전기) 중 관련 부분이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미군 지휘관 회의에서 소신표명을 계속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을 존경합니다. 한국전 때 웨스트 장군은 제82공정사단의 대령으로서 북한 순천 상공에서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용맹을 떨친 지휘관이십니다. 저 분의 지휘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저 분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군 지휘관들도 이해하는 분위기로 돌았다. 이로써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월남측과 협의하여 행사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 채명신 소장은 육군본부에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일하면서 월남전을 연구했는데 비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월남전의 작전개념을 수립하면서도 나 자신은 월남에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디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베트콩은 군복을 입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간인 행세를 하는 게릴라들이었습니다. 월남정부는 민심을 떠나고 있었고 월맹 지도자 호지명의 인기는 높아가고만 있었습니다. 아홉 살짜리 꼬마의 호주머니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고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의 옷속에 권총이 숨겨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미군의 작전개념인 '수색 및 섬멸작전'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만 생겼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작전개념은 ‘분리 및 섬멸’이었다. 민간인 속에 숨어 있는 베트콩들을 대민심리전을 통해서 분리하여 산속으로 격리시킨 뒤 군사작전을 통해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보니 그들이 아시아의 역사 문화에 얼마나 미숙한지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1964년 월맹은 정규군을 월남의 중부고원지역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월남에서 조직된 베트콩을 지원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무기표준화를 통해서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같은 공용화기를 쓰게 되었다. 1965년 초 미국은 월맹의 4개 정규 사단이 월남에서 작전중임을 확인하고 '롤링 선더'(Rolling Thunder) 작전을 시작했다. 이는 정규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북위 19도선 이남의 월맹 군사기지들을 폭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정규사단의 남침은 계속되어 1965년말 현재 6만4000명이 월남에서 작전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월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을 가졌으나 공산당의 위장조직에 불과했다. 혁명당 당수는 구엔 반 린.

    1964년 월맹은 구엔 치 탄 장군을 남파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사부문을 총지휘하게 했다. 린은 탄 장군의 보좌관이 되었다. 월남전을 하노이에서 지휘하고 있던 월맹 국방장관 지압은 시간이 공산군 편이란 확신하에서 월남전을 정치전쟁적인 성격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전쟁에서 승패는 전장이 아니라 여론과 언론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국내정치 무대에서 결판난다.

    국제법상 월남전은 월맹에 의한 불법적인 남침이란 성격을 지닌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월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월맹은 17도선을 무시하고 군단 규모의 정규군을 남파했던 것이다. 남파의 방식이 김일성의 남침처럼 기습적인 총공세가 아니라 장기간의 위장침투였기 때문에 국제여론의 반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베트콩이 월남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반정부 세력인 것처럼 선전했고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월남정규군의 명백한 남침'을 경시하는 보도 태도를 취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을 위반하여 자유진영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남침한 공산세력을 물리치는 데 파병할 도덕적이고 국제법적인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월남파병을 통해서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리려는 미국측의 의도를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과 국군현대화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을 고루 갖춘 파병이었던 것이다.

    그 뒤 월남과 미군이 졌고 월남이 월맹에 흡수통일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파병 이유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과 국제법,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여야 하는 것이다. 통일된 월남이 이제 와서는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월맹이 승자였다고 해서 월맹의 공산혁명노선이 옳았고 그에 반대한 한국의 파병은 나빴다고 해석하는 것은 승패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논의가 될 것이다.

    1965년에서 70년까지의 6년간 월남파병에 따른 미국측의 대한 지원총액은 9억2700만 달러였다. 그 주된 내용을 보면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미군과 맺은 구매 또는 공사계약이 3억500만 달러로 가장 많았다. 미군에게 한국측이 공급한 물건값이 1억4400만 달러, 미군이 부담한 한국군에 대한 각종해외수당지급액이 1억3000만 달러, 월남파병을 계기로 유보되었던 군원이관 계획(한국측이 분담해야 할 군사비)액수가 9300만 달러, 한국군의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미군측의 지원이 5000만 달러 등등.

    1966~71년간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5억3700만 달러에 달했다. 공사 및 용역제공, 한국인 기술자들의 송금, 그리고 군수물자 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이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엔 1억1340만 달러, 69년엔 1억420만 달러, 70년은 9700만 달러에 달했다.

    최성기엔 80여개의 한국회사와 1만6000명의 기술자들이 주로 미군과 계약하에 활동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의 경우 무역외 수입으로 분류되는 공사-용역 등 월남으로부터의 각종 외화가득은 그해 상품수출액의 36%나 되었다.>

    채명신 장군은 5.16 군사혁명 때는 5사단장으로서 병력을 이끌고 박정희 지지에 나섰던 사람이다.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 소장 아래서 참모로 일하였고 육사 5기 생도로서는 박정희 중대장으로부터 배웠다. 채 장군은 한국전 때 유격부대를 지휘, 敵陣(적진)에 침투, 많은 공을 세웠다. 월남전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轉役(전역) 후 좌파정권 시절 애국운동에도 앞장섰다. 평생을 對共戰線(대공전선)에서 보낸 분이다. 冥福(명복)을 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 기사 전문은 조선pub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베트남전 영웅 채명신 장군

     



    채명신 한국전쟁 당시 20대 나이에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1965년 육군작전참모부장 시절 주월한국군 초대사령관에 임명돼 4년8개월간 지휘했다. 당시 주월 미군으로부터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하고 태권도를 이용한 심리전과 대대급 소규모 작전으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 69년 이세호 장군에게 사령관직을 물려주고 귀국한 그는 군인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지만 3년 뒤 대장 진급이 좌절되며 2군사령관(중장)으로 전역했다. 1926년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일하다 47년 월남한 뒤 육사 5기로 군 생활에 들어섰다. 5ㆍ16 당시 5사단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까지 진출해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전역 후 스웨덴·그리스·브라질대사를 지냈다. 81년 공직에서 물러난 뒤 미국 하버드대 등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하다 88년 귀국했다. 베트남전참전동지회와 6ㆍ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지냈다. 『베트남전쟁과 나』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의 저서가 있다.


    지난달 30일. 베트남전이 종식된 지 38년이 되던 날이다. 6·25와 베트남전의 영웅 채명신(87·사진) 장군을 만났다. 24세 나이에 백골병단을 이끌고 북한 땅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39세에 주월한국군사령관에 임명돼 국내 최초의 파병전쟁을 지휘했다. 한 번 겪기도 힘든 전쟁을 두 번이나 지휘한 백전노장이다. 하지만 그는 전쟁광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다. “전쟁은 가장 잔혹하고 가장 비극적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전쟁을 혐오한다. 하지만 안보라는 버팀목 없이 부르짖는 평화주의는 오히려 전쟁을 부추긴다”는 그의 말엔 전쟁의 참혹성을 뼛속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는 “북한 핵에 맞서 핵무장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가 없다”며 “북한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전시작전권 전환은 연기돼야 하고 한미연합사는 존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이촌동 채 장군의 자택에서 7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는 장군이 20대 후반 시절 만난 경북 영덕 재력가 집안 출신의 미녀 문정인(부인)씨와의 추억담으로 시작됐다.

    -부인이 이화여대 홈커밍 퀸이었다. 결혼한 사연이 궁금하다.
    “20대 후반 대령 시절 만났는데 한눈에 반해 엄청나게 쫓아 다녔다. 장인이 납북돼 홀몸이 된 장모는 딸을 내게 줄지 결정을 내리시지 못했다. 답답해진 나는 경북 영덕의 처갓집 어른을 찾아가 큰절을 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고 어머니는 이북에 있다. 내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지만 정인이(부인)를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이 쾌히 승낙하면서 장모를 설득해 결혼할 수 있었다. 나는 장모를 아주 존경한다.”

    -장모를 존경하는 이유는.
    “당시 대령 월급이 쌀 사고 콩나물국 먹으면 바닥나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장모가 나 몰래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태주며 ‘남편한테 돈 얘기 하지 말라. 그러면 남편은 돈의 노예가 되고, 부패한 사람이 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동기생 김익권 장군이 ‘네 장모 같은 분이 있다면 도시락을 열두 개 싸 들고 다니며 청혼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오늘날 한국 여성들이 우리 장모 같았으면 좋겠다.”

    -부인은 어떤 분인가.
    “아내도 장모에게 바른 교육을 받았다. 아내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다. 50년 가까이 당뇨병을 앓았지만 합병증이 하나도 없는 건 전적으로 아내 덕이다. 아내는 매일 아침 6시30분이면 내 혈당을 조사하고 먹거리를 철저히 챙겨준다. 아내에게 감사한다.”

    -6·25가 터지기 전 북한에서 김책과 김일성을 만났다는데.
    “소련군 소좌였던 김책의 주선으로 46년 2월 8일 평양학원 개원식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채 동무, 사람이 필요한데 평양에서 함께 일합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모셔야 할 홀어머니가 있었고, 그와 생각도 맞지 않아 응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호남형이었지만 덧니가 심했다. 나중에 치아를 교정했다고 한다.”

    -왜 월남했나.
    “45년 8월 해방과 함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기계와 쌀·잡곡을 전부 소련으로 실어 갔다. 젊은이들이 반발하면서 그해 말 신의주에서 처음 학생시위가 터졌다. 소련군은 학생들을 기관총으로 갈겼고 많은 사람이 숨졌다. 그때 도망친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을 조직해 좌익과 싸웠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목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이듬해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양욱 목사가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되면서 기독교를 철저히 부수기 시작했다. 탈북을 결심했다.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삼팔선을 넘었다. 그런데 남한에 오니 여기서도 서북청년단과 좌익이 싸우고 죽이는 게 반복됐다. 조선의 장래는 총칼이 난무하고 피를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사 5기(당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응시해 합격했다.”

    -6·25를 겪으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49년부터 삼팔선 일대에서 개시된 게릴라전이다. 200여 명의 중대를 이끌고 매복과 기습으로 전공을 쌓아 대대장으로 발령 났다. 그러자 부대원들이 나랑 헤어질 수 없다고 붙잡았다. 상부에 ‘대원들과 함께 있고 싶으니 중대를 대대로 해 달라’고 청했는데 받아들여져 특별 중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25가 터지면서 인민군 복장을 한 ‘백골병단’을 만들어 사선을 넘나들었다. 국군의 체면과 기개를 위해 이북 후방에 침투하는 유격대를 직접 조직한 거다.”


     

    -‘51년 1월 1일 오후 2시35분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그때 황해도 곡산에서 작전 중이었다. ‘정초에 굶으면 1년을 굶는다’는 말 때문에 사전 정찰 없이 (식량을 구하러) 민가에 들어갔는데 주민의 밀고로 인민군에 포위됐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35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우리가 남한 군인인 줄 아느냐? 위장한 거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밀고자가 인민군들에게 우리가 국군이라고 일렀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부하들에게 ‘손들고 나가 항복하라’고 명령한 뒤 총을 머리에 겨눴다. 부하들에게 ‘하느님의 가호를 빈다’고 말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소리가 났지만 방아쇠가 터지지 않았다. 다시 일발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부하 정영식이 나를 붙잡으며 ‘하느님이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라고 외쳤다. ‘하느님의 목소리’란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빨리 나오라우’ 하며 들이닥치는 적병에게 1탄,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2탄, 따발총을 든 다른 적병에게 3탄을 발사해 모두 세 명을 죽이고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그 집에 있던 젊은 아낙과 어린이는 인민군이 쏜 따발총에 즉사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던 길원팔 노동당 제2비서를 생포한 일화가 유명한데.

    “백골병단으로 활동하던 중 인제에서 길원팔을 생포했다. 김일성 작전명령서와 부대 배치도 등 중요 정보도 포획했다. 그런데 길원팔과 얘기해 보니 일본 스가모 고등사범을 나온, 아주 똑똑한 군인이었다. ‘너를 죽이기 아깝다. 너희가 말하는 인민을 위해 진짜 일을 해 보자’고 전향을 권유했다. 하지만 길원팔은 ‘어떻게 너 같은 인물이 썩어빠진 이승만 정권에 충성을 바쳐 게릴라전을 하는지 모르겠다. 네 손에 죽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이 자신에게 준 권총으로 자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13세 된 남녀 아이를 남한으로 데려가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총알 한 방을 장전한 권총을 놓고 방 밖으로 나왔다. 길원팔이 그 총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인물됨을 믿었다. 잠시 후 방 안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길원팔을 묻어준 뒤 부하들에게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군인이다’고 얘기하고 ‘받들어총’을 시켰다. 그때 데리고 온 아이 2명 중 여자는 숨지고 남자는 살아서 서울대학교까지 공부하도록 도와줬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50년대 후반 백골병단 생존자들과 강릉을 찾았다. 당시 9사단 참모장이 박정희 대령이었다. 박 대령은 ‘죽을 줄 알면서도 이북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니 대단하다’며 고깃집으로 데려가 위로해 주었다. 피 묻은 내 점퍼를 자신의 털 달린 좋은 점퍼와 바꿔주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5·16에 참여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맡게 됐다.”

    -마음만 먹으면 더 높은 요직에 등용될 위치였는데.
    “난 내 약점을 잘 안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정치에 필요한 돈과 조직도 없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월남전에 반대했는데.
    “전쟁에서 이기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고 지도자가 사심이 없어야 한다. 월맹의 호찌민은 자주독립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월맹·월남 국민 모두에게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반면 월남은 썩었다. 외국이 도와줘도 국민이 따라오지 않는 월남은 진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월남전에 참전한 이유는.
    “현실을 직시했다. 월남전이 격화되면 미국은 우리 서부전선의 주한미군 2, 7사단 7만 명을 빼갈 것으로 봤다. 당시는 김일성의 군대가 우리보다 강했을 때다. 미군이 2개 사단을 빼간 뒤 김일성이 밀고 내려오면 승산이 없었다. 월남에 파병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조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파병은 정당했다. 또 파병을 통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경제가 일어선 걸 잊어선 안 된다.”

    -월남에서 미군 휘하가 아닌 독자 지휘권을 관철했다.
    “박 대통령은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게 좋다고 판단했지만 나는 반대했다. ‘사령관에 임명했으니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미군과의 회의석상에서 ‘이 전쟁은 군사전쟁이 아니고 정치전쟁이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 석 달 반 동안 부락 하나 점령 못하고 있다. 다른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지 않는 한국군은 얼굴도 보지 않겠다’던 라슨 장군이 ‘당신 말이 맞다”고 해 독자 지휘권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맹호부대 주둔 지역에 태권도를 보급해 심리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1965년 주월한국군사령관에 임명된 채명신 장군(왼쪽)이 베트남 파병길에 오른 병사를 격려하고 있다.1972년 전역한 채명신 장군(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주스웨덴 대사 신임장을 받고 있다.
     

    -69년 월남 전역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했지만 72년 대장 진급에 실패했다. 유신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내가 대통령이라도 나처럼 직언하는 사람은 피곤해서 참모총장으로 안 쓸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내 건의를 다 들어줬지만 한 가지만 예외였다. 장기집권 반대가 그것이었다. 72년 초 대구에서 박 대통령이 ‘한 잔하자’고 해 만났다. 박 대통령은 ‘채 장군, 김대중에게 정권을 맡기면 나라가 잘될까?’라고 물었다. 짐작되는 바가 있어 ‘각하가 스스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채 장군이 정치를 뭘 안다고…’라고 말했다. 나는 ‘3선 개헌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눈물까지 흘리지 않았느냐’고 받아쳤다. 두 달 뒤 대구에서 다시 박 대통령을 만났다. ‘채 장군, 아무리 생각해도 집권을 연장해야겠어. 욕을 먹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메야겠어’라고 하더라. 그래서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채 장군은 기독교 신자지… 그 말이 맞아’라고 했다. 나는 ‘장기집권 하지 말라. 루스벨트가 4선을 한 건 국민이 하라고 해서 한 거다. 장기집권은 각하를 죽이는 길이다’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더라. 얼마 뒤 중장 계급 정년일인 5월 30일이 되자 유재홍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박 대통령의 친필서류를 보여줬다. ‘채명신 중장 예비역 편입’이라 써 있더라. 만감이 교차했다. 전역식을 마치고 정문을 나서는데 도열한 장병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됐다. 그해 스웨덴 대사로 부임했고 이어서 그리스·브라질 대사를 했다. 79년10월 26일 브라질에서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었다. 아내가 ‘부부로 산 57년 동안 당신이 그렇게 슬퍼한 날은 없었다’고 하더라. 박 대통령에게 ‘각하를 죽이는 길’이라 말한 게 너무나 가슴 아팠다. 브라질 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북한 핵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북핵을 겁낼 필요 없다. 북한이 핵을 쓰면 북한은 없어진다. 북핵에 맞서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럼 주변의 모든 나라가 핵을 가지려 할 것이고 외국기업들은 다 나가버릴 거다. 북한은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우리가 단독으로 제어할 능력은 부족하다. 북한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전시작전권 전환은 연기돼야 하고, 한미연합사도 존치돼야 한다.”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월남전 당시 장병들이 김치를 먹고 싶어 했다. 그런데 고국에서 온 김치 깡통 뚜껑을 따자 핏물이 나왔다. 기술이 없어서 녹이 슬었던 거다. 나는 ‘여러분이 이걸 안 먹으면 2주 뒤 일본 김치가 도착할 것이고, 김치 값은 일본 사람 손에 간다’고 했다. 그러자 장병들이 ‘핏물이라도 먹겠다. 고국의 부모형제에게 돈이 가게 해 달라’고 했다. 나도 울고 장병들도 다 울었다. 박 대통령께 이 사연을 적어 보냈다. 그러자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질 좋은 김치 통조림과 군화·군복이 공수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애국심으로 일어선 민족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모든 게 만족스럽진 않다. 하지만 권력과 돈이 생기는 자리에 친인척을 쓰지 않는 노력은 평가해 줘야 한다. 대통령이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이) 도와줘야 한다. 또 박 대통령은 월남전 전사자와 부상자, 고엽제 피해자들을 지원해 주면 좋겠다. 호주는 월남전 참전용사에게 매달 2200달러를 준다. 우리도 매달 그 절반인 120만원은 줘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적에 포위돼 자결을 결심한 적이 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때마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따랐다. ‘살려고 발버둥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란 신념이 그것이다. 군복을 벗은 오늘에도 그런 마음으로 산다. 후배 군인들도 나라를 사랑한다는 얘기를 입으로 백번 해봐야 소용없다. 애국을 행동으로 실천하라.”

    이광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7, 18대 국회의원과 강원도지사(2010~2011년)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생(48세)으로 원주고와 연세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출처 : 중앙선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