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천재교육에서 지난 8월30일 교과부 검정을 받아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한국의 역대 정부,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을 설명하면서 선거 부정과 장기 집권을 위한 改憲은 가혹하게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1952년 발췌 개헌을 설명하면서) 정부는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임시 수도인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 국회의원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연행하고 폭력배를 동원하여 압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315 페이지.
<이승만 정부는 여당인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에서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중략). 4·19 혁명은 부패한 독재 정권을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민주 혁명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322 페이지.
천재교육 교과서는 그러나 북한정권엔 '선거의 자유'라는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다. 북한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이 부정되는 것은 자유선거를 통하여 수립된 정권이 아니기 때문인데, 이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자연히 한국 정부엔 불리하게, 북한정권엔 이로운 記述(기술)이 되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1948년 5월10일에 실시된, 建國을 위한 총선거가 유엔 감시 하에서 이뤄진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였음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일부 세력이 불참하고 좌익이 선거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만 지적, 문제점만 부각시켰다. 이 교과서는 북한정권이 실시한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자유로운 투표가 금지된 사실상의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아래와 같이 썼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인 8월25일 이북지역에서 최고 인민 회의 선거가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48년 9월 제1차 최고인민 회의가 개최되어 헌법이 제정되고, 김일성이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곧이어 9월9일 내각이 구성되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311페이지)
8월25일 북한 선거는 이렇게 실시되었다.
<투표 복수의 후보자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등록된 한 사람의 입후보자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흰 함과 검은 함 두 개를 놓아두고 찬성이면 흰 함에, 반대면 검은 함에 투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적인 선거일 수 없었다.>(孫世一, ‘李承晩과 金九’ 연재 104회,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반면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이 정부는 이 지역 유권자 대부분의 자유의사가 정당하게 표현된 동시에 위원단에 의하여 감시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 정부만이 한반도에서 그러한 유일한 정부’임을 공인, 한국 5월 총선거의 공정성을 확인하였다. 즉 한국은 공정선거를 통하여 건국한 나라임으로 합법정부로 인정 받았고 북한은 부정선거를 하였으므로 합법성이 부인 된 것이다. 교과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야 하는데 천재교육 교과서는 의도적으로 대한민국의 장점과 북한정권의 약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을 훼손시키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 교과서는 북한정권의 3代 세습과 관련 이렇게 썼다.
<유신 헌법이 공포된 12월27일,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 헌법에는 기존에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던 주체사상과 조선 노동당의 독재가 규정되었다. 김일성은 이 헌법에 의해 신설된 주석직에 취임하여 1인 독재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331 페이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권력을 이어 받았다.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를 설명할 때는 흥분하던 교과서가 세계의 웃음꺼리가 된 3代 세습을 설명할 때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이 교과서 필진의 이념성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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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남북한 정권의 失政관련記述 용어 비교
*한국 정부에 대한 표현
1. <(제주도 4·3사건 설명) 이 과정에서 주민이 가혹한 탄압을 받아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309 페이지.
2. <(발췌 개헌을 설명하면서) 정부는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임시 수도인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 국회의원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연행하고 폭력배를 동원하여 압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315 페이지.
3. <이승만 정부는 그(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탄압하였다. (중략). 정부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언론을 탄압하며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다.> 315 페이지.
4. <4·19 혁명은 부패한 독재 정권을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민주 혁명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322 페이지.
5. <(5·16 후) 군사 정부는 (중략) 각계의 중요 인물을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동시에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인의 활동을 봉쇄하였으며(하략).> 324 페이지.
6. <학생과 시민의 반대 시위는 6월3일 절정에 달하였다. (중략). 곧이어 정부는 학생과 재야인사를 묶은 인혁당 사건과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사건 등을 잇달아 터뜨리며 학생 운동을 탄압하였다.> 326 페이지.
7.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를 강화하고 경제 개발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생과 야당, 시민의 반대를 억누르고 헌법을 개정하였다(3선 개헌, 1969).> 328 페이지.
8. <박정희 정부는 1974년부터 긴급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여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연맹과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 사건을 조작하여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강압적으로 유지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야당과 크게 대립하였고,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중략) 9차례에 걸쳐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국민의 인권을 제한하고, 유신 반대 운동을 탄압하였다.>
<국가위기 상황이란 명분으로 (중략) 유신 반대 운동을 탄압하였다.> 332 페이지.
9. <또 국회와 대학을 폐쇄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과 신군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가두었다.> 335 페이지.
10. <광주의 시민과 대학생들은 5월18일부터 신군부의 민주화 운동 탄압에 맞섰다.>
<계엄군은 27일 새벽 도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을 전차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336 페이지.
11.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 및 사회 운동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중략). 전두환 정부의 탄압과 유화 정책에도 불구하고(하략).> 337 페이지.
12. <박정희 정부는 노당자의 단체 행동권과 단체 교섭권을 제한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노동 운동을 탄압하였다.> 341 페이지.
13. <1970년대 억압적인 유신 체제하에서 (중략) 개인의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용모까지도 단속의 대상이었다.> 343 페이지.
14. <1969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쌀이 없는 날’로 지정하는 한편, 점심때마다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하여 혼식을 강제하였다.> 344 페이지.
*북한정권에 대한 표현
1. <1945년 12월 조만식 등 우익 세력이 모스크바 3국 회상 회의의 결정에 반대하자, 소련군은 우익 세력을 축출하였다.> 311 페이지.
2. <북한에서는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일성이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강화하였다.> 314 페이지.
3.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전쟁 중에 옌안파의 무정과 소련파의 허가이를 숙청하였다. (중략). 박헌영과 옛 남로당 세력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 숙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들 비판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8월 종파 사건). 이로써 북한에서 김일성의 권력 독점에 대항할 만한 정치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318 페이지.
4. <북한은 1967년 주체사상을 당의 이념으로 확정하고 수령 유일 체제를 표방하였다.>
<북한은 적화 통일을 목표로 무장 공비를 남파하여 청와대를 습격하는 등 대남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329 페이지.
5. <유신 헌법이 공포된 12월27일,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 헌법에는 기존에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던 주체사상과 조선 노동당의 독재가 규정되었다. 김일성은 이 헌법에 의해 신설된 주석직에 취임하여 1인 독재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331 페이지.
6.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권력을 이어 받았다.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하였다.>
<북한은 핵 개발과 사회주의권 붕괴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데다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식량, 에너지, 원자재 등의 분야에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기 시작하였다.>
<북한 주민은 각기 직장별, 연령별, 계층별로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해야 한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조직 생활은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사회에 경제적 곤란이 심화되어 집단주의적 조직 생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어렵게 되었고, 주민 통제가 약화되면서 탈북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356 페이지.
7. <그러나 2008년 이후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핵 실험 강행,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이어졌다.> 357 페이지.
[ 2013-09-22, 22:37 ] |
조갑제닷컴
司正 당국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채 총장의 인사청문회 하루 전인 지난 4월 1일 임씨는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다. 이때 전세금 액수가 4억원가량 더 필요하자 임씨는 일부를 월세로 지불하기로 계약하면서 잔금 중 1억원 이상을 수표가 아닌 현찰로 전달해 집주인이 상당히 불편해했다는 것이다. 중앙SUNDAY는 임씨와 집주인 등 당사자들의 반론을 듣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일보는, <검찰 일각에서는 “임씨가 몇 년 전부터 사실상 일을 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1억원 이상을 현금으로 마련한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다>고 전했다.
[ 2013-09-22, 17:13 ] |
趙甲濟
"그의 독도 방문에 대해선 일본 民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天皇 비판 발언이 독도에 무관심한 보통의 일본인들, 이명박을 좋아하던 사람들까지 反韓으로 돌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아사히 신문까지 이명박을 비판하였으니까요. 지금 천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절대적인 존경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천황이 2011년 쓰나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무릎을 꿇고 위로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황은 한국에도 매우 호의적인 분입니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천황이 우리의 가슴 속에 차지하는 비중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 져서 항복을 논의할 때도 국가지도부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천황제 유지였습니다. 천황제 유지를 미국이 받아들인다면 어떤 不利도 수용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미국이, 천황제를 폐지하고선 일본을 통치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옳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전쟁성 장관이던 스팀슨은 신혼여행을 교토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할 도시를 선정할 때 1순위로 교토가 올라오자, "1000년 동안 천황이 살았던 이 도시를 폭격하면 일본인들을 영원히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서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천황제 유지에도 찬성하였다.
일본 천황은 공산주의자들을 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학살되는 것을 본 때문인지는 모르나 천황의 공산당 혐오가, 맥아더 사령부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협조나 안보부문의 적극적 對美종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前 서울특파원은, "아베 수상이 이명박 스타일을 닮아가고 있다"고 했다. 외국 방문을 많이 하고 기업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세일즈 외교를 벌이고, 특히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를 성사시킨 점을 들었다. 오랜만에 국가 지도자다운 수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6년에 수상이 되었다가 1년만에 물러난 이후 야당 생활도 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再起를 준비한 결과가 아주 생산성이 높은 職務수행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요즘 일본인들은 '올자팬(All Japan)'이란 구호를 좋아합니다. 힘을 한번 모아보자는 데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어요. 경제가 살아나고, 나라의 분위기가 좋아지는 가운데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중국을 침략하여 엄청난 피해를 끼친 데 대한 가해자로서의 콤플렉스도 있다고 봅니다만, 국제규범을 존중하지 않는 중국으로부터 위협을 느낍니다. 그럴수록 美日관계는 더 가까워집니다."
그는 三星전자가 소니를 이기고,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누르면서부터 일본인들이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우리도 한국처럼 분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규슈를 '慶尙南南道'라고 표현했다. "부산에 가면 고향에 온 것처럼 편하게 느껴져요. 兩國 국민 사이의 친선관계가 정부간 갈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前 서울특파원은 "한국 언론의 일본 보도는 너무 선동적이다"고 비판하였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일본의 우파를 닮아가는 모습이다"는 것이다. 그는 "종군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해놓고도 지엽적인 부문에서 변명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아베 측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면서 韓日관계의 정상화를 희망하였다.
평소 일본 정부에 비판적이던 전 서울특파원은 이번엔 일본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하여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아베 수상이 일본을 바꾸어놓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인 셈이다.
[ 2013-09-22, 16:38 ] |
趙甲濟
천재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남북한 정권 失政관련 記述 용어를 비교해보니 역대 대한민국 정부에는 가혹하게 북한정권엔 유리한 용어를 사용하였음이 밝혀졌다. 이 교과서는 ‘탄압’이란 용어를,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 정부에 대하여 10회 사용하였으나,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정권에 대하여는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탄압’이라고 써야 할 대목에선 ‘숙청’ ‘축출’이란 용어를 썼다. ‘숙청(肅淸)’이란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므로 나쁜 말이라고 볼 수 없다. ‘축출(逐出)’은 ‘내어 쫓는다’는 ‘가치중립적’인 뜻이므로 ‘탄압’처럼 비판적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박정희 정부의 장기 집권에 대한 비판은 5페이지 이상에 걸쳐 가혹하게, 집중적으로 하면서 북한정권의 3대 세습에 대하여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권력을 이어 받았다.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하였다>라고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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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남북한 정권의 失政관련記述 용어 비교
*한국 정부에 대한 표현
1. <(제주도 4·3사건 설명) 이 과정에서 주민이 가혹한 탄압을 받아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309 페이지.
2. <(발췌 개헌을 설명하면서) 정부는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임시 수도인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 국회의원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연행하고 폭력배를 동원하여 압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315 페이지.
3. <이승만 정부는 그(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탄압하였다. (중략). 정부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언론을 탄압하며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다.> 315 페이지.
4. <4·19 혁명은 부패한 독재 정권을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민주 혁명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322 페이지.
5. <(5·16 후) 군사 정부는 (중략) 각계의 중요 인물을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동시에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인의 활동을 봉쇄하였으며(하략).> 324 페이지.
6. <학생과 시민의 반대 시위는 6월3일 절정에 달하였다. (중략). 곧이어 정부는 학생과 재야인사를 묶은 인혁당 사건과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사건 등을 잇달아 터뜨리며 학생 운동을 탄압하였다.> 326 페이지.
7.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를 강화하고 경제 개발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생과 야당, 시민의 반대를 억누르고 헌법을 개정하였다(3선 개헌, 1969).> 328 페이지.
8. <박정희 정부는 1974년부터 긴급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여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연맹과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 사건을 조작하여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국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강압적으로 유지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야당과 크게 대립하였고,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중략) 9차례에 걸쳐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국민의 인권을 제한하고, 유신 반대 운동을 탄압하였다.>
<국가위기 상황이란 명분으로 (중략) 유신 반대 운동을 탄압하였다.> 332 페이지.
9. <또 국회와 대학을 폐쇄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과 신군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가두었다.> 335 페이지.
10. <광주의 시민과 대학생들은 5월18일부터 신군부의 민주화 운동 탄압에 맞섰다.>
<계엄군은 27일 새벽 도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을 전차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336 페이지.
11.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 및 사회 운동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중략). 전두환 정부의 탄압과 유화 정책에도 불구하고(하략).> 337 페이지.
12. <박정희 정부는 노당자의 단체 행동권과 단체 교섭권을 제한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노동 운동을 탄압하였다.> 341 페이지.
13. <1970년대 억압적인 유신 체제하에서 (중략) 개인의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용모까지도 단속의 대상이었다.> 343 페이지.
14. <1969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쌀이 없는 날’로 지정하는 한편, 점심때마다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하여 혼식을 강제하였다.> 344 페이지.
*북한정권에 대한 표현
1. <1945년 12월 조만식 등 우익 세력이 모스크바 3국 회상 회의의 결정에 반대하자, 소련군은 우익 세력을 축출하였다.> 311 페이지.
2. <북한에서는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일성이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강화하였다.> 314 페이지.
3.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전쟁 중에 옌안파의 무정과 소련파의 허가이를 숙청하였다. (중략). 박헌영과 옛 남로당 세력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 숙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들 비판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8월 종파 사건). 이로써 북한에서 김일성의 권력 독점에 대항할 만한 정치 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318 페이지.
4. <북한은 1967년 주체사상을 당의 이념으로 확정하고 수령 유일 체제를 표방하였다.>
<북한은 적화 통일을 목표로 무장 공비를 남파하여 청와대를 습격하는 등 대남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329 페이지.
5. <유신 헌법이 공포된 12월27일,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 헌법에는 기존에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던 주체사상과 조선 노동당의 독재가 규정되었다. 김일성은 이 헌법에 의해 신설된 주석직에 취임하여 1인 독재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331 페이지.
6.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권력을 이어 받았다.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하였다.>
<북한은 핵 개발과 사회주의권 붕괴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데다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식량, 에너지, 원자재 등의 분야에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기 시작하였다.>
<북한 주민은 각기 직장별, 연령별, 계층별로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해야 한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조직 생활은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사회에 경제적 곤란이 심화되어 집단주의적 조직 생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어렵게 되었고, 주민 통제가 약화되면서 탈북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356 페이지.
7. <그러나 2008년 이후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핵 실험 강행,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이어졌다.> 3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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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9-22, 09:51 ] |
趙甲濟
"그의 독도 방문에 대해선 일본 民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天皇 비판 발언이 독도에 무관심한 보통의 일본인들, 이명박을 좋아하던 사람들까지 反韓으로 돌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아사히 신문까지 이명박을 비판하였으니까요. 지금 천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절대적인 존경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천황이 2011년 쓰나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무릎을 꿇고 위로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황은 한국에도 매우 호의적인 분입니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천황이 우리의 가슴 속에 차지하는 비중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 져서 항복을 논의할 때도 국가지도부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천황제 유지였습니다. 천황제 유지를 미국이 받아들인다면 어떤 不利도 수용하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미국이, 천황제를 폐지하고선 일본을 통치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옳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전쟁성 장관이던 스팀슨은 신혼여행을 교토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할 도시를 선정할 때 1순위로 교토가 올라오자, "1000년 동안 천황이 살았던 이 도시를 폭격하면 일본인들을 영원히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서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천황제 유지에도 찬성하였다.
일본 천황은 공산주의자들을 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학살되는 것을 본 때문인지는 모르나 천황의 공산당 혐오가, 맥아더 사령부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협조나 안보부문의 적극적 對美종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前 서울특파원은, "아베 수상이 이명박 스타일을 닮아가고 있다"고 했다. 외국 방문을 많이 하고 기업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세일즈 외교를 벌이고, 특히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를 성사시킨 점을 들었다. 오랜만에 국가 지도자다운 수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일본인들은 '올자팬(All Japan)'이란 구호를 좋아합니다. 힘을 한번 모아보자는 데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어요. 경제가 살아나고, 나라의 분위기가 좋아지는 가운데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중국을 침략하여 엄청난 피해를 끼친 데 대한 가해자로서의 콤플렉스도 있다고 봅니다만, 국제규범을 존중하지 않는 중국으로부터 위협을 느낍니다. 그럴수록 美日관계는 더 가까워집니다."
그는 三星전자가 소니를 이기고,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누르면서부터 일본인들이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우리도 한국처럼 분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규슈를 '慶尙南南道'라고 표현했다. "부산에 가면 고향에 온 것처럼 편하게 느껴져요. 兩國 국민 사이의 친선관계가 정부간 갈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前 서울특파원은 "한국 언론의 일본 보도는 너무 선동적이다"고 비판하였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일본의 우파를 닮아가는 모습이다"는 것이다. 그는 "종군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해놓고도 지엽적인 부문에서 변명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아베 측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면서 韓日관계의 정상화를 희망하였다.
평소 일본 정부에 비판적이던 전 서울특파원은 이번엔 일본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하여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아베 수상이 일본을 바꾸어놓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인 셈이다.
[ 2013-09-22, 16:38 ]
중앙일보, "채동욱 의혹 관련 임 여인, 전세금 1억원을 현찰로 지불"
조갑제닷컴
채동욱 검찰총장의 婚外 아들 의혹과 관련, 채모(11)군의 어머니인 임모(54)씨가 지난 4월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로 이사할 당시 전세금 중 1억 원 이상을 현찰로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중앙일보가 오늘 일요판에서 보도하였다. 司正 당국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채 총장의 인사청문회 하루 전인 지난 4월 1일 임씨는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다. 이때 전세금 액수가 4억원가량 더 필요하자 임씨는 일부를 월세로 지불하기로 계약하면서 잔금 중 1억원 이상을 수표가 아닌 현찰로 전달해 집주인이 상당히 불편해했다는 것이다. 중앙SUNDAY는 임씨와 집주인 등 당사자들의 반론을 듣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일보는, <검찰 일각에서는 “임씨가 몇 년 전부터 사실상 일을 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1억원 이상을 현금으로 마련한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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