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부와 무슬림 형제단의 대결은 단순히 정권을 놓고 다투는 권력투쟁이 아니다. 세속주의의 수호자인 군대와 이슬람 종교 국가를 만들겠다는 무슬림 형제단의 대결이다. 언론은 軍의 流血진압을 비판하지만 이집트 국민들의 상당수가 이슬람化에 반대, 군대를 지지하고 있다. 특히 학생과 중산층의 反무슬림형제단 성향이 강하다.
군대와 무슬림형제단의 대결은 어떤 국가체제,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할 것이냐의 이념-체제대결이므로 타협이 어렵다. 공산주의냐, 자유민주냐의 싸움과 비슷하다. 진압이나 저항방식도 살벌하다. 일종의 종교전쟁이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은 과격파와 테러리스트의 양성소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는 1950년대 낫셀 시절부터 무슬림형제단을 불법화하여 탄압하였다. 2011년 아랍 혁명의 바람속에서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과정이 시작되자 무슬림형제단이 정치의 前面에 나서 선거를 통하여 의회를 장악하고 대통령 무하마드 모르시를 배출하였다. 정권을 잡은 모르시는 이집트 사회를 이슬람화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의 초점이 되어왔다.
군부 수뇌부를 교체한 모르시는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헌법을 개정, 무슬림형제단의 신조를 國政에 반영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는데, 이게 세속주의 세력을 자극하였고, 경제난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군부가 개입, 쿠데타로 모르시를 몰아냈다. 이에 대한 무슬림형제단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이 승리하면 제2의 이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 군부는 호메이니 혁명 때의 이란 군부와는 달리 국민의 지지가 강하고 분열되지 않아 무슬림형제단에 의한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다.
이집트 사태를 이해하는 데는 알제리의 경우가 참고가 될 만하다. 1991년 의회선거에서 알제리의 이슬람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이 다수당이 되었다. 알제리 군부는 이 선거를 무효화시켰다. 이슬람구국전선은 무장투쟁을 선언, 그 뒤 거의 10년간 10만 명이 죽는 內戰사태로 발전하였다. 단결된 알제리 군부는 이 내전을 통하여 이슬람구국전선을 궤멸시키고 세속 체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동에서 이슬람원리주의와 군부가 대결하는 경우, 대체로 군부가 승리한다. 1980년대 초 시리아에서 무슬림형제단이 무장반란을 일으키자 아사드는 이들의 본거지 하마를 전차와 전투기로 공격, 2만 명 이상을 죽였다. 러시아에선 무슬림형제단을 테러조직으로 규정, 불법화하였다.
9.11 테러작전을 지휘한 알케에다의 빈 라덴은 한때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의 동조자였다. 2인자 자와히리도 이집트 사람이고 단원이었다. 9.11테러작전의 작전참모 역할을 한 할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는 쿠웨이트 태생이지만 형제단원이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 11편을 납치, 뉴욕의 무역센터 북쪽 타워로 돌진한 실행범 아타는 이집트 출생으로 카이로 대학을 졸업한 직후 무슬림 형제단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빈 라덴을 만났다. 9.11 테러의 4大 핵심인물은 다 무슬림 형제단 출신이다.
나중에 빈 라덴과 자와히리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이 무바라크 정권에 너무 미온적으로 저항한다고 비판, 관계를 끊었다. 9.11 테러의 작전사령관격인 모하메드는 16세 때 무슬림 형제단에 들어가 사막에서 열린 연수회에 참석, 이슬람의 적들을 처단하라는 지하드(聖戰)의 교리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는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출발하였다. 아라파트도 카이로 대학을 다닐 때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조직을 창설하였다. 이집트인 하산 알 바나가 1928년에 창립한 무슬림 형제단은 아랍세계 전체로 퍼져, 中東의 과격세력과 테러 조직의 母胎(모태)로 일컬어진다.
알 바나의 구호는 "알라는 우리의 목적이고, 코란은 우리의 헌법이다. 예언자는 우리의 지도자이고, 지하드(聖戰)은 우리의 방식이다. 알라를 위하여 죽는 게 우리의 가장 뜨거운 갈망이다"였다.
알 바나는 이슬람의 原型(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슬람 세계가 서구 문명으로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그는 코란에 근거한 이슬람 법(샤리아)이 통치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정부의 조직과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알라가 준 샤리아法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6년 무슬림 형제단은 당시 이집트 수상을 암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창설자 알바나도 암살되었다. 1954년 나세르는 무슬림 형제단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 이 조직을 불법화시켰다. 그럼에도 이 조직은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의료, 교육기관을 운영,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2005년 국회의원 선거에선 단원들이 무소속으로 출마, 全 의석의 20%를 차지하였다.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2011년 反정부 시위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였다. 무슬림 형제단의 공개된 문서에 나타난 이 세력의 목표는 단계적이다.
1. 개인을 이슬람화한다.
2. 가족을 이슬람화한다.
3. 사회를 이슬람화한다.
4. 국가를 이슬람화한다.
5. 이슬람 연방국을 만든다.
6. 세계를 이슬람으로 정복한다.
무바라크 밑에서 일했던 당시 부통령 오마르 술레이만은 정보기관장 시절인 2006년에 미국의 FBI 국장 로버트 S. 뮐러에게 "무슬림 형제단은 심각한 위협이다. 주된 위험성은 종교를 이용, 대중을 동원한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은 무슬림 형제단이 선거를 통하여 집권한다든지, 제1 야당이 된다면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체제가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2011년 무바라크가 하야한 후 무슬림 형제단 출신의 모르시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집권하였다가 이번에 군사 쿠데타로 밀려났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本産(본산)인 무슬림 형제단과 世俗(세속)주의의 보루인 이집트 장교단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데, 종교적 통제를 싫어하는 중산층과 젊은층이 이번엔 反무슬림형제단으로 도는 바람에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의 반격이 주목된다.
時事해설: 이집트軍部와 무슬림형제단의 대결
과격파와 테러리스트 양성소인 무슬림형제단과 세속주의의 수호자인 군부의 싸움은 체제와 이념을 건 대결이므로 피를 많이 흘리게 되어 있다.
趙甲濟
[ 2013-08-17, 16: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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