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와 <아무르>를 보고 2013/01/13 11:54 | 추천 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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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사는 일반적으로 100년을 본다. 인류사상 영화라는 것을 처음 만들어 상영한 인물인 프랑스인 뤼미에르 형제가 "뤼미에르 공장의 퇴근"이라는 것을 만들어 처음 상영한 것이 1895년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에디슨을 영화의 비조로 보지만, 그가 만든 영사기는 오늘날 말하는 대형 스크린에 사람의 형상을 투사하여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디슨의 영사기는 길거리 모퉁이에서 네모난 나무궤짝의 내부에 영상의 연결된 진행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오늘날 말하는 영화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영화의 비조로는 뤼미에르 형제를 세계가 공인하고 있다. 영화의 비조답게 프랑스는 영화의 대명사로서 전 세계 영화 제작 편수의 75%까지 담당할 정도로 그야말로 영화의 나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초창기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은 아벨 강스 감독이다. 그는 <나는 고발한다>(1919) <나폴레옹>(1927)이라는 영화를 남겼다. 그의 뒤를 이은 감독은 루이 델뤽이다. 그는 <어디에도 없는 여자>1922)라는 영화를 남겼다. 1920년대 말기에 미국에서 토키 영화의 발명과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영화의 주도권이 미국 감독들로 넘어가는 듯한 경향이 보이지 시작했다. 당시 유명 프랑스 감독이었던 르네 클레르는 이런 변화가 일시적인 것이라고 치부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전반 반세기 동안 프랑스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연출력을 보였던 장 르느와르는 이런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였다. 1938년 프랑스 영화사에 또다른 획을 그은 <안개 낀 부두>를 감독한 마르셀 까르네 감독 시대를 시적 리얼리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영화는 지금도 우리나리에서 그 필름이 돌아다니고 있다. 주연은 20세기 전반부 프랑스 영화계의 우상적인 배우였던 쟝 갸방이다. 마침내 제 2차 대던이 발발하자 르느아르는 1939년 문제작 <게임의 규칙>을 발표하면서, 나치 점령 하의 조국 프랑스를 떠난다.
양차 대전 중에는 프랑스에 남아 그래도 영화제작 작업을 진행한 감독들 중에서 크게 활동한 감독은 르네 클레망과 쟝 콕또 등이 있었다.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도 괄목할만한 작품 <블로뉴 숲의 여인들>을 연출하였다. 르네 클레망 감독은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1960)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감독이다.
1959년에 발표된 쟝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는 프랑스 영화를 고대와 현대로 갈라놓는 일대 혁신을 일으킨 프랑스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쟐 폴 벨몽도라는 명배우의 출현을 보게 된다. 즉 누벨바그의 탄생이다. 누벨 바그라는 말은 영어로는 뉴 웨이브 라는 뜻으로 새로운 물결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샤브롤, 트뤼포, 리베트, 고다르, 가스트 등 서론이 채 안된 젊은 감독들은, 자기들 이전 감독들 중에서, 르누아르, 브레송, 베케르 , 타티, 콕토를 제외한 다른 감독들을 수준이하라고 비난했으며,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미국영화의 단순함을 옹호하였다. 과도한 제작비와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 인위적인 긴 대사들과 장식, 지나치게 공들인 영상과 몽타주등을 비난했다. 리얼리즘은 이름뿐이고, 현시대의 병화하는 사회의 본질과 유리된 영화를 찍고 있다고 비난했다. 작품의 주제, 제작방식, 제작비용까지 모든 영화제작의 여건들이 변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영화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을 깨드리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나선 이들이 누벨 바그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조감독 출신들이 아니었고, 영화학교를 졸업한 뒤 스스로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함으로서 영화감독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간결한 제작, 가벼운 기계, 최소한의 기술 팀, 벨몽도나 브리알리같은 무명의 배우들의 등장, 야외촬영이나 아파트 촬영 등 새로운 영화제작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루이 말의 <연인들>(1958),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 알랭 레네의 여주인공들, 샤브롤과 도니올 발크로즈의 <군침>(1960)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의 욕망과 좌절의 행동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의 프랑스 영화는 일종의 침체기글 겪게 된다. 1968년 파리의 대학생들과 급진파 지식인들이 주도한 67혁명(다른 말로 5월혁명으로도 불린다.)으로 일체의 영화제작운동이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마침 TV 시대가 도래하여 영화제작은 한결 더 위축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Z>에서 신념과 교훈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인 작품들을 제작한다.독일 점령하의 어두은 시절을 잊으려넌 프랑스인들의 꿈을 담은 영화들이 만들여 졌는데, 마르셀 오필스 감독의 <슬픔과 연민>이 비교적인 성공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인 주된 흐름과 동시에 프랑스인 특유의 미학을 추구하는 영화들도 꾸준히 제작되었다.1973년에 제작되어 칸느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장 외스티슈의 <엄마와 창녀>, 1974년의 성공작 <생 폴의 시계공>, 1975년 세자르 상 수상작인 <녹쓴 총>등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 시대에 데뷰하여 계속 살아남은 배우들로는, 제라르 드 파르디외(최근 부자세 문제로 러시아로 귀화), 이자벨 아자니, 로미 슈나이더, 안니 지라르도 등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프랑스 영화는 영화의 주도권을 미국의 헐리우드에 빼앗겨 버리고, 제작 편수도 미국의 십분의 일 정도로 위축되었다. 이제 프랑스 영화계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대작 영화를 제작할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프랑스인들의 예술 지향적인 예술영화의 제작은 독보적인 위상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브리지도 바르도, 미셀 모르강, 시몬느 시뇨레, 엠머뉴앨 리바, 쟌 모르, 다니엘 다류,카트린 드뇌브 등 명 여배우들과 쟝 가방, 알랭 들롱, 제자르 드파르디외, 이브 몽땅, 쟝 뽈 벨몽도등 명성 높은 남자 명배우들의 등장으로 여전히 세계 고급 영화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1800년대에 프랑스 영화계에 등장한 새로운 경향은 BBC(베넥스, 베송,카락스의 약자)라고 불리는, 소위 말하는 네오바로크라 하여, TV와 스케일 중심의 미국 영화에 대항하기 위해, 영화의 스케일을 키우고 흥미위주로 영화를 만드는 경향을 말한다. 베티 불루(1986)가 여기에 속하는 작품이다.이 영화에서는 연기력이라고는 없는 육체파 베아트리스 달이라는 여배우가 탄생되었다. 그녀는 이제까지의 세련되고 지적인 전형적인 프랑스여배우의 위상을 깨고 거대한 가슴을 흔드는 육체파 배우였지만 많은 프랑스 관객의 환영을 받았다.
영화사 측면의 이런 흐름 이외에, 쟝 가방의 <안개 낀 부두>로 대표되는 시적 리얼리즘 경향이 프랑스 영화계를 휩쓸던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프랑스 영화계는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한 새로운 경향 즉 프랑스 영화의 세속적 대중적인 경향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예술적인 영화라도, 점점 호락영화를 선호하는 프랑스관객들의 취향을 외면할 수 없다는 각성에서 이런 경향이 싹트기 시작하였다.여기에는 아무래도 오락성 위주로 제작되어 전 세계인들의 선풍적인 선호를 받고 있는 허리우드 영화의 영향이 강하게 투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프랑스 영화 속의 오락영화의 주종으로는 코메디 영화와 범죄영화 그리고 대형영화이다. 코메디 영화로 제작되어 관객 천백만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한 <위대한 매춘부>와 관객 천4백만을 모은 <비지터>는 이런 류 오락 영화의 대표격이다. 범죄영화로는 알랭들롱과 쟝 뽈 벨몽도가 첨예하게 인기대결을 보이며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괄목할만한 관객들을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대형 스크린의 대작 작품으로는 오히려 허리우드를 능가하는 규모로 제작되었다.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대국이다. 국토나 인구 수로 보아 프랑스는 단연 유럽의 최강국이다. 이런 대국기질이 프랑스인에게는 분명히 존재하며, 이런 기질은 비록 미국에 비해 국토의 넓이나 인구숫자가 적다고는 하지만 이런 기질이 예술분야에서도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베송 감독의 <그랑 불루>, 아노 감독의 <베어>, 베리 감독의 <제르미날>, 코르노 감독의 <세상의 모든 아침>, 세로 감독의 <여왕 마고>는 어떤 허리우드 영화에 비해도 결코 그 제작 규모가 적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영화들은 그런대로 흥행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영화를 영화미학적인 관점에서 발전시킨 프랑스영화인들의 노력과 동행하는 같은 시대에 이런 오락성 영화가 역시 크게 발전해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류의 영화로 인해 세계인들은 프랑스영화를 잊지 않고 계속 찾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르(사랑)>는 누벨 바그를 겪은 프랑스 영화의 흔적이 아주 많이 남아 있는 영화이다. 세트 장면이 감독의 부모님들이 실제로 살던 아파트이다. 아주 본질적인 인간의 숙명을 다루면서도, 주제가 단순하다. 사랑과 죽음의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으면 병을 앓다가 죽는다. 이럴 경우 배우자가 죽음의 순간을 맞아 고통으로 신음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일생을 같이한 배우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되는가가 이 영화의 주제이다. 영화가 너무나 단조롭다. 프랑스인이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감미롭고 시적인 영화라는 평을 받는 <남과 여>(칸느 영화제 대상 수상)의 남자 주인공 쟝 루이 트랭티냥이 실제 80세의 나이로 나와 영화 속 연기를 하고, 프랑스 영화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히로시마 내사랑>의 여자 주인공으로 나와 히트한 엠마누엘 리바가 85세의 실제 나이로 출연하여 여주인공 역을 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늙은 아내가 나이가 들어 점점 정신이 흐려져가자 결국 그녀를 요양소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집에서 직접 간호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내의 극심한 노쇠로 불가능한 벽에 부딪치자 그녀를 벼개로 눌러 질식사 시키고 자기도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영화가 단조롭고, 남자주인공이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경로가 좀 약하다. 그리고 치매가 심한 아내를 보살피는 남자주인공의 내면의 고통과 지극한 아내 사랑의 감정의 실제적인 제시가 설득력이 약하다. 과연 저렇게 할 수밖에 없고,그것이 아내를 참으로 사랑하는 방식이구나 하는 긍정적인 동의를 구하는데 이 영화의 구성력은 다소 약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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