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와 포은 정몽주
鄭昭盛(소설가,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내가 가지고 있는 세 종류의 대백과사전들에서 정몽주(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의 항을 찾아보면 한결같이, 정몽주가 이성계(1335, 충숙왕 복위 4-1408, 조선 태종 8년)를 죽일 마음을 먹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이 기록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내가 알고 느끼는 포은 정몽주는 가슴 속에 불타는 애국심을 간직한 고려왕조의 충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리고 문신이지만 그의 병략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를 따르는 많은 장수들을 확보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포은 정몽주의 경우, 당대 최고의 원로학자로 추앙받던 이색의 표현대로 동방이학지조라 불릴만큼 중국경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대학자였다. 그것에 못지않게 병서와 군략에 뛰어난 창칼없는 무인이었다.
포은 공이 대 여진전에 참여한 것은 1364(27세)년이었다. 과거에 장원급제(1360)하여 고려조에 출사하고 난 후 4년이 흘렀을 때였다. 국경지대인 화주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여진족 추장 삼선. 삼개를 무찔렀다.
1380(45세)년에는 전라도 운봉에 웅거하면서 백성을 괴롭히던 왜장 아지발도 휘하의 왜구대부대를 패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이기고 개경으로 귀경하던 중 관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대에서 승전연을 베풀던 이성계는 좌중에 전투에서의 포은 정몽주의 선전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어느면 그의 출중한 전술전략에 두려움까지 표하였다는 사서의 기록도 있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포은이 겪은 수많은 벼슬 중에는 병의 계급에 해당하는 것도 눈에 띈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병사로서 고려사직에 봉사한 것이다. 그의 낭장겸합문지후니 위위시승이니 하는 벼슬은 병의 계급에 속하는 벼슬이다.
하기야 고려의 과거제도에는 무인을 위한 분야가 따로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무인 벼슬은 문과에 합격한 사람 중에서 임명했다. 포은이 장수의 벼슬을 받았다고 해서 병장기를 들고 적장과 맞붙어 싸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운봉왜구 토벌 후 다시금 동북면으로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성계가 출동했을 때 그는 역시 포은을 조전원수로 데리고 가 승전할 수 있었다.
1372년(35세)에 정사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 조정에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귀국길에 발해만에서 풍랑을 만나 정사 이하 12명의 사절들이 전원 수장되었다. 유독 포은만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이 사실은 포은이 운이 좋았다고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포은의 여러 가지 특성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그는 젊은 시절 전장을 누빈 장수로서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에게는 위기에 대처하는 남다른 기지와 민첩함과, 생명을 삼키려는 자연과 싸워서 극복할 수 있는 완력이 있었다는 시사라고 보아야 한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벽란도에 누워 있을 때, 포은은 과감하게 행동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당시 수문하시중의 벼슬을 살던 포은이었기 때문에 병을 풀어 이성계를 급습하여 포박하고 국문한다면 그의 일파가 기도하는 역성혁명의 죄상을 밝혀 참수할 수도 있었다. 속내를 감추고 개경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간 것이 잘못이었다. 방원의 기민한 마수에 걸린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긴박한 순간에 대인풍의 포은은 위기감에 사로잡힌 방원의 급습에 당한 것이다.
포은 선생의 직계손(22대)의 한 사람인 필자가 이런 글을 씀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선조의 존함을 존칭없이 직필하려니 송구스러운 비례의 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문이나 가례문이나 족내문이 아닌 이상 계속 존칭을 쓸 수도 없어서 비례의 우를 무릅쓴다.
이 글은 논문도 아니고 논설도 아니다. 한 소설가의 수상록일 뿐이다.
한 개인의 체질을 논할 때, 현대적으로는 DNA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전근대적인 동양적인 개념으로는 사상의학이 말하는 체질론도 있다. 이런 체질론적인 개념은 태생적인 것이라 다각적인 노력으로 보완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다고들 한다.
하나의 국가에도 이런 개념이 있을까.
나의 이런 생각을 전문사학자들은 고려는 귀족국가이다 라는 말로 적고 있다.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의 왕국이고, 조선은 반상의 왕국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34왕 474년간(918-1392) 지속된 파란만장한 한 왕조국가에 변하지 않은 어떤 정치체질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얼른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 왕조가 겪어야하는 정치적 파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고려왕조의 경우, 거란과의 전쟁, 금과의 전쟁, 몽고와의 오랜 전쟁과 부마국으로서의 굴욕 등은 물론이고, 오랜 기간 무인들의 통치를 받는 기형적인 세월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형적인 정치형태 속에서도 고려왕조에는 언제나 다양하게 귀족벌문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였고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생각이다.
이 귀족의 뿌리는 태조 왕건의 후삼국통일전쟁시 그를 도와주었던 지방토호들의 존재였던 것같다. 지방의 미미한 해양세력에 불과했던 왕건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후백제의 견훤과 태봉국의 궁예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장으로서의 능력 탓이었다. 그를 유비에 비유한다면, 궁예를 장비에, 견훤을 관우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경순왕의 요청으로 신라를 침범한 견훤을 도모하기 위해 팔공산으로 진격했다가 거의 전군이 전멸하다시피 패전했다. 신숭겸의 기지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다음 안동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안동지방에 세거하던 지방토호들의 지원 탓이었다.
왕건은 신라 천년 사직을 통째로 들고와서 받친 경순왕을 비롯한 이들 통일전쟁의 협력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이들에게 각자 역할을 주고 식읍을 주어 삶의 길을 터주었다. 이들이 곧바로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고려는 수도인 개경을 비롯하여, 서경(평양), 남경(한양), 동경(경주) 등 3경과 5도 양계를 두어 전국을 통치하였는데, 경순왕 김부를 동경의 통치자인 사심관으로 임명했다.
왕건은 주지하다시피, 후삼국통일전쟁시 자기를 지원해준 토호들에게 전쟁 중, 혹은 왕조 건국 후 지원을 약속하기 위해 토호들의 딸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정책을 썼다.
유의해야할 점은, 건국 초기에 형성되어지고 태조 왕건에 의해 조성되어진 이들 귀족계급들은 고려 500년 역사를 이끌어간 기본적인 인적 요소의 기능을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500년 역사를 이어가면서 이들 계급은 무던히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오만가지 우여곡절 끝에 이들 귀족계급은 나름대로의 통혼권을 유지하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포은 정몽주는 바로 이런 고려 귀족계급에 속한다.
경주 오천이 관향인 포은은 신라 건국초기 박혁거세를 왕(거서간)으로 추대한 6촌장의 한 분으로부터 이 영일정씨가 시작되지만, 고려 중기까지 그 계대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중시조인 습명 공으로부터 기록으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습명 공은 고려 의종(재위 1146.3-1170.9) 때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조정의 중신이다.
고려조정은 3성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 조정을 본떠서 만들었다. 사실은 2성 6부이다. 중서문하성(당은 중서성과 문하성을 분리)과 상서성이 그것이다. 상서성의 지휘를 받는 이 호 예 병 형 공 6부가 있다.
중서문하성의 수장을 문하시중이라고 하는데 수상으로 본다. 여기 2성 6부의 장관을 제신(帝臣) 이라고들 한다.
포은 공의 중시조 정습명 공이 속했던 중추원(후에 추밀원)은 고려조정의 또 다른 중요조직으로 일반적으로 중서문하성과 함께 고려조정의 2대 통치조직으로 일컬어진다. 중추원은 국가의 군국의 기밀을 다루고 왕의 숙소에 숙위를 서는 등 국가 최고 통치조직의 정무를 보는 곳이었다.
국가의 주요 의식을 결정하는 식목도감, 감찰을 맡은 사헌대, 조칙을 맡은 한림원, 조정의 모든 사건을 기록하는 사관(후에 춘추원), 국립대학인 국자감, 왕실 도서관 어서원, 재주 있는 문신을 뽑아 왕과 세자 를 가르치는 홍문관(후에 숭문관), 제사와 증시를 맡은 태상시, 조회와 의식을 맡은 합문, 감옥을 맡은 대리시(후에 전옥시), 빈객에 대한 연회와 접대를 맡은 예빈시(후에 전객시), 시장을 밭은 경시서, 왕실과 종친의 족보를 맡은 전중성, 천문 역서 기상 시간을 맡은 태의감(후에 전의감) 등이 여기에 속해 있다. 경직의 경우 실직이 있는 품관이 360직에 500여명의 관원이 충당되어 있고, 이속은 1320직으로 집계되고, 무반은 경직의 경우 품관이 220여직에 1750여명, 품외의 대정이 181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중추원 소속 장관을 추신(樞臣)이라고 하는데, 두 중요기구의 장관들을 합쳐 제추(帝樞)라고 한다. 습명 공의 벼슬이었던 중추원 지주사는 정3품 벼슬로 중추원 3인자에 해당한다.
습명 공의 십대 손이 포은 공이다.
포은 공은 집안이 귀족문벌에까지 이르는 대우는 받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당대 최고 명유로서 세자의 스승을 배출한 집안으로서 고려 왕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를 이어갔다.
고려 의종이 죽고(1170) 적어도 2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포은 공이 조영규의 기습를 받지만 포은 공은 중시조 습명과 의종과의 사제관계에서 비롯된 고려조정의 충신으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태조 왕건(877-943)이 재위 26년만에 향수 66세로 죽었다.
대를 이은 2대 혜종과 3대 정종은 이복형제인데, 아버지가 남긴 호족들의 발호라는 빚으로 임금 노릇다운 노릇을 해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임금 자리에서 물러난 제왕들이다. 혜종은 2년 정종은 4년 재위를 지켰을 뿐이다.
4대 광종(925-975, 재위 949-975)은 3대 정종의 동복 아우이다. 광종은 즉위하자 말자, 아버지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토호들을 그냥 놔둬서는 안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그들을 귀족벌문으로 대우하되 어떤 한계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이었다.
노비안검법은 통일전쟁중 어수선하던 틈에 포로들을 자신들의 노비로 편입하여 세력을 불리던 지방토호들의 병력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포로출신 노비들을 풀어주는 시책이었다.
고려왕조의 관리 등용의 한 특색은 음서제도의 성행이다. 과거제도가 엄연히 존재했고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었지만,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지탱해오는 호족 벌문들의 세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음서제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 음서제도는 고려왕조의 특색의 하나인, 즉 왕조의 DNA라고 할 수 있는 고려 귀족벌문이 유지되었던 큰 원인이었다.
과거제도를 엄격히 시행했지만 고려왕조가 관료의 사회가 되지 못하고, 귀족벌문의 사회로 유지되었던 것은 과거제도 자체에도 모순이 있었다. 즉 과거로 뽑힌 사람이라고 해서 필히 관리로 등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주니 서경이라 하여, 합격자의 성분을 엄격히 심사하여 조금이라도 반왕실적인 기미가 있으면 임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등수도 마음대로 바꿨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2등으로 합격했으나 아비 김부식이 워낙 왕조에 충성하는 거물이라 아들의 등수를 1등으로 고쳐 장원급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나라의 관리들의 60% 이상이 음서출신자들이었다고 사서는 적고 있다. 고려왕조가 고대국가의 성격을 갖 벗어난 귀족 중심의 중세적인 성격의 국가였음을 단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함과 동시에 무자비하게 지방 토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사서에는 태조 시절의 호종세력들 가운데 광종 대에는 겨우 40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기록이 당대 최고 상신의 한 사람이었던 최승노의 글 속에 나온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광종의 이런 개혁정치는 5대 경종에 의해 무산되고 다시금 개국초기의 족벌적 정치적 분위기로 회귀된다. 광종의 개혁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에 종전의 국가정책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왕조의 창업조인 태조 왕건이 만든 나라의 DNA였던 것이다. 이런 귀족 족벌체제는 6대 성종과 7대 목종 대에 이르러 왕조의 변하지 않는 체질로 굳어지는 듯한 경향을 보인다.
고려왕조의 귀족벌족이라 함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모하는 양상을 보인다. 개국초기의 호족세력 출신의 족벌들은 사라지고, 시대 따라 정권을 장악한 새로운 족벌들이 귀족으로 등장하여 왕조를 이어가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이들이 새로운 귀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왕조에는 귀족족벌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정권을 잡아 왕조에 충성하면 새로운 귀족벌족이 되는 것이다. 왕조의 창업자인 태조 왕건이 창출한 이러한 왕조의 특질은 변하지 않고 5백년 역사를 이끌어오고 있다. 무신정권이 얼마든지 역성혁명을 할 수 있는 처지였으나 그들은 결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최충헌가는 충헌의 사후 고려조 최고의 귀족벌문으로서 남아 대우를 받게 된다.
11대 문종이 권신 이자연의 세 딸과 결혼하였으며 특히 맏딸 인준왕후 사이에서, 순종(12대), 선종(13), 숙종(14)을 낳고, 유명한 대각국사도 낳았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은 딸을 16대 예종의 비로 보내고, 익성공신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예종이 죽자, 외손자를 옹립하여 17대 인종으로 만들고, 셋째 딸 넷째 딸을 바쳐 왕후로 만들었다.
이자겸은 권세가 은근히 왕을 능가할 정도가 되자 역심을 품고 도모하다가 낌새를 눈치챈 인종의 역공을 받았으나, 자겸의 친척인 장수 척준경의 반격으로 왕은 자겸의 사저에 붙잡혀 억류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자겸과 척준경 사이가 뒤틀어진데다가, 제왕을 시해하려했던 과오를 뉘우친 척준경의 변심으로 이자겸과 처자를 잡아 멀리 영광으로 귀양보냈으며, 왕을 구해내고, 이자겸과 딸들 왕후들도 도태 시켰다.
목숨을 건진 인종은, 권신 임원후의 딸과의 사이에,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을 낳았다. 이후 김온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각각 딸을 바쳐, 아들 신종과의 사이에서 21대 희종을 낳고, 아비 명종과의 사이에서 22대 강종을 낳았다. 23대 고종과 24대 원종을 거치며, 18대 의종부터 23대 고종까지 약 60년이 무신집권기이다.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까지 약 80년이 원부마국 시대이다. 31대 공민왕, 32대 우왕, 33대 창왕, 34대 공양왕으로 고려왕조는 말기에 해당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은 고려왕조의 결혼풍속도이지만, 사실 이런 왕가의 결혼과 왕통의 계승은 고려왕조의 오랜 DNA 적인 뿌리가 되었는데, 곧바로 창업자 태조 왕건이 뿌린 것이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내응을 유도하기 위해 그들의 딸들을 지역안배의 원칙에서 아내로 맞이하는데, 결과적으로 6왕후와 26부인을 거느리게 된다. 5 왕후 신성왕후만이 지방호족의 딸이 아니라, 신라 경순왕의 형인 김억겸의 딸인데, 신라왕족과 피를 섞음으로서 자신의 혈통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함이었다. 왕건 자신도 경순왕(김부)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다. 경순왕이 그냥 나라를 갖다바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왕건의 통일정책에 입각한 결혼정책이 그 이유중 하나로 주효했던 것이다.
이런 왕조를 옹호하는 귀족벌문의 체질은 왕조 후대에 와서 어떻게 변모되었을까. 이 사실은 바로 포은공과의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일이다.
영일정씨 가문은 딸을 왕가에 바친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저명한 유학자였던 습명 공을 세자의 시강으로 세움으로서 고려왕실의 주요한 지지세력으로 공인받는데 성공하고 준귀족벌문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자리에 전문사학자의 학문적인 견해를 소개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식화한 고려시대 시대구분은 이기백 교수의 경우 아래와 같다. 1, 호족의 시대...태조왕건부터 5대 경종까지
2, 문벌귀족시대...6대 성종 대부터 18대 의종 대까지, 고려의 전성기로 본다
3, 무인정권시대...무신란(1170)으로부터 개경환도(1270)까지
4, 사대부의 시대...원 복속기부터(1270) 사대부의 등장으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포은 공이 1337년에 태어나셨으니, 물론 고려 제 4기에 속한다. 원의 영향이 절대적인 시대였다.
이 시대의 권신은 이인임((?-1338, 고려 우왕 8년)이었다.
고려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후,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하여 모든 정치체제에 원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중서문화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고친 것과 중추원을 밀직사로 이름을 바꾸어 조정체제를 한단계 낮추어 새로이 정비한 것이다. 충렬왕 원년(1275)이다.
충렬왕 5년에는 고려왕조 스스로 이런 형식상의 정부조직 변경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문무반을 아울러 합사한 모든 기능을 가진 도평의사사라는 종합기구를 발족했다. 이것은 도병마사를 확대변경한 총괄적인 조직이다. 조정의 의결권 행정권 병마권까지 이 도평의사사에 집중시켰던 것이다. 일명 도당이라고 부른다.
이 도당을 장악한 부류들을 권문세가라고 부른다. 고려의 종말을 재촉한 부패관료들이다. 그 대표적인 권신이 이인임이었다.
이인임은 원세력과 원풍을 몰아낸 개혁군주라 할 수 있는 공민왕이 피살되자, 종친으로 뒤를 이으려는 태후의 뜻을 꺾고 공민왕의 아들 우를 왕으로 세웠다. 더한 세력을 얻은 이인임은 붕당인 임견미 염흥방등과 짝패를 이루어 고려 조정을 전단했다.
임견미(문하시중 역임)는 바로 포은 공을 자기 대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한 사람이다. 당시 명은 아직까지 원에 대해 구정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의 태도가 못마땅해 고압적인 자세을 취하고 있었다. 우왕의 친명적인 외교를 트려는 이번 명나라 행 사신에 지명된 임견미는 우왕을 찾아 뵙고 읍소하면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니 포은으로 대체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포은 공은 기꺼이 우왕의 지명을 받아들였고, 명에 가서 뛰어난 중국어 시문으로 명태조 주원장을 설득하여 외교를 트는데 성공하고, 기왕에 명에 가서 외교를 트려다 명태조의 눈 밖에 나 중국땅 먼 남쪽으로 귀양살고 있던 먼젓번 사신일행까지 구출해서 귀국했다.
고려말의 정치적 판도를 잘 파악하는 것은 포은 공의 입지를 이해하는데 지름길이다.
고려말의 조정 판도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으로 구분지를 수 있다.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 경부흥 임견미 등 권문세가와, 기철 등 부원세력 등은 우왕의 명조정 사절단 파견에도 칭병하고 불참할 정도로 친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 세력은 과거제도 출신으로 친명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출신기반이 약한 신진사류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러한 조정의 양분상태는 어쩔 수 없는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사실 고려조정은 개경환도 후 결정적으로 원조정의 지원과 원조 하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더욱이 무신정권으로부터 왕권을 회복하는데는 원의 원조가 결정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서 고려조정을 장악하던 파들이 원에게 경도되는 것은 당연하다.
31대 공민왕(1351-1374)의 개혁정책이란 이런 조정의 분위기를 변혁하여 친명반원정책으로 돌아서는 조처였다. 그는 충렬왕 때 고쳐졌던 정부조직을 옛 것으로 되돌리고, 왕 자신이 변발과 호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부원세력의 중심이었던 기철을 주살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간다. 추진세력의 결집력이 약했고, 권문세가의 반발이 강했으며, 당시 국정을 괴롭히던 왜구와 여진족 홍건적의 침략 탓이었다. 이런 어려운 나라의 사정은 이성계가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된다.
이성계는 조전원수로 혹은 종사관으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도운 정몽주의 도움으로 한낱 지방의 군졸에서 중앙정계의 거물로 성장한다.
이성계 입신의 첫단추는 공민왕이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공민왕은 당시 동북면지역에 설치된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고려의 국토를 편입할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마침 이 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이성계의 아비 이자춘이 공민왕의 이 계획에 적극 내응하여, 계획대로 이 지역을 고려영토로 편입하게 된다. 이자춘에게는 가병이라고 할 수 있는 상당한 병력이 있었다. 이성계 집안은 고려왕조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단번에 동북면을 통괄하는 방어사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러나 자춘은 곧 죽었으므로 무예가 출중한 아들 이성계가 뒤를 이었다. 그는 아비를 뛰어넘는 공훈을 세운다. 그는 여진족과 홍건족의 침략을 분쇄하는가하면, 난공의 왜구를 격파했다. 원의 고려 수탈의 본거지였던 동녕부를 탈환했다. 이 동녕부 탈환은 이성계의 고려조정에서의 입신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다. 원래 동녕부는 서경(펑양)에 원이 친원파 최탄의 요청으로 설치하여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려를 수탈하는 본거지로 이용하다가, 여의치 않아 요동으로 옮겨갔는데, 공민왕에게 살해당한 친원파의 두목격인 기철의 아들이 여기에 웅거하면서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고 고려정복의 꿈을 꾸고 있었다. 이성계가 5천의 군사로 요양까지 진군하여 이 동녕부의 뿌리를 뽑은 것이다.
이성계의 고려조정 입신에의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당시 정권의 담당자였던 이인임의 타도에서 역부족을 느낀 최영이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힘을 합해 이들 집권파의 군사들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이성계는 조정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드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우왕 14년(1388)이었다.
명 조정은 중국땅에서 원의 세력을 구축해가면서, 조선반도에도 영토욕심을 내서, 원이 장악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다스리려 했다. 자기들이 원을 정복했으니 원의 땅이었던 철령 이북의 땅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요동정벌론이 대두되고,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끝을 맺는다.
이 군사작전으로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하여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우왕의 후계문제에서 의견들이 엇갈렸다. 좌시중 조민수와 우시중 이성계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었다. 조민수는 당시 인망이 두루 두터웠던 이색의 조력을 받아 우왕의 아들 창을 모시자고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종실 중 한 사람을 골라 왕으로 모시자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 이색이 조민수(문하시중)의 편을 들어주어서 결국 창왕이 등극하게 되었다. 이성계가 좌절을 맛보았다.
위화도회군 후, 전제개혁을 단행하려던 이성계 일파인 대사헌 조준의 탄핵으로 창왕의 윤허로 문하시중 조민수가 제거된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좌의정에 해당하는 수(守)시중이 된다. 문하시중은 이색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최영과 조민수가 제거된 마당에 도총중외제군사를 겸하여 군권을 장악함으로서 실질적인 일인자가 된다.
강화도에 유폐되어 있던 우왕이 여주로 옮겨와서 비참한 생활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사위인 최영 휘하의 옛 장수에게 이성계 처벌을 부탁하였는데, 이 사실을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일대 숙청의 바람이 불었으며, 덩달아 창왕까지도 물갈이가 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포은은 이성계의 휘하에서 그의 개혁정치를 돕고 있었다. 이 당시 포은의 조정내 벼슬은 찬성사(펑장사)로서 정1품이 없는 고려조정의 위계로 보아 제1급인 종1품 문하시중 다음의 정2품직에 속한다. 중서문하성의 제 2위에 속하는 직급으로 3 인이다.
당시 포은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중국경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성균관 서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 반입되어 제대로 해석된 경서가 아주 적었던 관계로, 소문으로만 듣던 경서가 수입되면 해석을 못해 쩔쩔매었으나, 포은공만이 막힘없이 제대로 해석해내어 다들 놀라게 했다. 명나라 석학 호병문이 나중에 펴낸 해설들이 기왕의 포은의 고려 성균관에서의 강의 내용과 똑같아 다들 놀라 포은을 동양지학이라는 평하고 우럴러 보았다.
또한 누구도 가기를 꺼리는 명나라 사신을 두차례나 다녀왔고 한번은 서장관으로 정도전을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원나라에도 다녀와서 현안문제를 해결했으며, 일본에도 다녀와서 잡혀 있던 첫 번째 사신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당시 조정에서 가장 큰 인망을 얻고 있던 원로 이색(1328, 충숙왕 15-1396, 조선태조 5))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서 그의 조정내 지위는 이성계의 못지 않았다.
이색은 포은보다 나이가 9살 많은데도 두 사람의 우정은 유난스레 두터웠다. 서로가 인품과 실력을 인정하고 극진하게 받들었다. 이성계도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최선의 예를 다해 존중하였다. 포은이 피살되고 난후, 이색은 일체의 관로 출입을 끊었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나서 삼고초려로 그를 청했으나 그는 끝까지 출사하지 않았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목은이 바로 이색이다. 훗날 서애 유성룡은 후한이 망하고 나서, 통일국 조의 벼슬을 끝까지 거절하였던 양팽에게 목은을 비유하면서 그에게 존경의 염을 언제나 표하였다.
포은을 격살한 이방원이가 훗날 포은을 자국의 충신 일호로 복권하고, 문묘에 충신 일호로 모신 데에는 이런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변의 연장선상에서, 친원적인 권문세가들의 권력에 막혀 힘을 쓰지 못하던 신진사류들은 어느틈엔가 이성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그의 지지세력이 되었다. 조준, 배극렴, 정도전,남은같은 젊은 선비들이 주동하고 있었다. 포은도 물론 적극적인 이성계 지지세력이었다. 적어도 공양왕을 추대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간극이 없었다.
최영과 조민수, 그리고 우왕과 창왕을 밀어내는데 성공한 이성계 지지파들은 20대 신종의 7대 손인 정창군을 공양왕(1345-1394, 재위 1389-1392)으로 추대하였다.
포은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이성계 일파의 정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포은과 이성계 사이에 간극은 없었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재위에 오른 공양왕은 이색을 판문하부사에, 심덕부를 문하시중에, 이성계를 수문하시중에, 정몽주를 문하찬성사에, 설장수를 정당문학에, 성석린을 문하평리에, 조준을 대사헌에, 정도전을 삼사우사에 지명했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들의 협박으로 공양왕은 재위 한 달만에 전왕을 두둔했다는 죄목을 씌워 이색.이종학 부자를 파직 유배하였다. 정몽주의 마음이 돌아선 첫 번의 계기였다. 포은은 뭔가 잘못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공양왕을 협박하여 강릉과 강화에 유배가 있던 우왕과 창왕을 시해해 버렸다.
이 시기에 터진 윤이.이초의 사건은 이성계일파의 복심을 들어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남들은 몰라도 포은공만은 이들의 욕망이 어디에 있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윤이.이초 사건이란 윤이.이초란 자가 명나라 조정에 찾아가서, 조선의 시중 이성계가 역심을 품고 사람을 모으고 있으니 명황제가 이성계를 죽이든지 잡아서 명으로 끌고 가든지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성계 일파가 조정내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이것을 빌미로 이성계 일파들은 끊임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포획하고 문초하고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정내에서는 이성계 일파들의 급작스런 성장에 제동을 거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공양양 2년에 대간들의 탄핵으로 정도전이 참형에 처할 처지에 놓였다. 구신들의 역습이었다. 정도전과 절친했던 남은이 나서서 그의 구명운동을 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성계의 힘을 빌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도전의 마음은 완전히 역심으로 바뀌었다. 그는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피가 아니고, 신돈의 피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공민왕이 다른 어떤 여성과의 사이에서도 생산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신돈의 계집종 반야 소생인 우와 손자 창이 어찌 공민왕의 씨가 될 수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우왕이 이인임에 의해 등극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안이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 주장은 저들의 역성혁명의 근거가 된다. 여기에 조준이 가담하게 되어 그들은 결국 역도로서의 내통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부도통사로 도통사 이성계를 모시던 배극렴이 여기에 가담한다. 조준, 정도전, 남은, 배극렴을 아마도 고려조의 4대 역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들은 한결같이 개창한 조선에서는 일등개국공신이 된다.
공양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포은은 왕에게 아뢰어 차후 윤이.이초 사건으로 타 조정신하를 논획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논지를 내리게 했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들은 자신들이 획책한 무기한적인 반대파숙청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고, 포은과는 적대관계에 놓이기 시작했다. 자기편인 줄 알았던 포은은 어느틈엔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역성혁명에 반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포은은 이들이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고려왕조의 신하다운 귀족벌문의 DNA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조정을 뜯어고쳐도 주군을 성 갈이하는 역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충신이다. 그 무지막지한 60년 무인정치 속에서도 주군만큼은 절대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고려왕조의 DNA다.
그래서 그는 사직의 위기를 직감하였고, 그는 남몰래 근왕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포은공은 사직에 자신을 따르는 그다운 인맥이 있었고, 특히 병 쪽으로도 그를 따르는 장수들이 있었다. 그 자신 비록 이성계의 조전장수였지만, 조전원수로서의 확고한 위치에 있었고 그가 지시한 전략이 얼마나 기막히게 전장에서 먹혀들었나를 부하장수들은 알고 있었기에 그의 군령을 따르는 장수들이 숨어 있었다.
병력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시 포은공은 수문하시중의 위치에 있었고, 공양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거에 이성계를 제외한 이들 일파를 왕명으로 참수형이나 귀양형에 부처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이성계는 천천히 제거한다는 전략이었다.
위기감을 직시한 사람은 둔감한 이성계보다 이방원이었다. 사실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의 깃발을 들었지만, 돌부리와 가시밭길을 헤쳐나간 자는 방원이었다. 그가 정도전을 방석에게 붙어 모역을 꾀한다고 죽였으나 사실은 자신의 등극을 겨냥한 정권의 정통성 확립이 목적이었다. 이런 모사와 과단성은 아들이 아비를 넘어서고 있었다. 여기에 간발의 차이로 희생된 분이 포은 공이다. 사직을 지키려는 장렬한 충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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