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기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김병삼의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 중에서-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면,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관계도 은혜롭습니다. 나의 변화된 가슴으로 세상을 품으면 영혼이 자라납니다. 나의 감동이 이웃에게 감격이 되고, 하나님이 감탄하시는 삶은 축복입니다.
|
|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
| | | | | |
|
| |
|
|
|
밤꽃2 |
꽃과 같이 짧은 인생. 그 분 안에서 꽃과 같이 아름답길.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 시편 103편 15절.
| | |
|
글쓴이 : 김성무 경북대학교 화학과 졸업 2009 일양약품 중앙연구소 2009 경북대학교 대학원 화학과 졸업 2011 (주)두산 전자 BG |
|
| | | | | |
|
| |
|
|
그대는 아는가 - 욥 37:12-16 |
12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13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15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16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
|
엘리후는 계속 대기 현상들과 기후의 온갖 변화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과 현상들을 관찰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고한 신념들을 가져야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하신 신이시지만(시 139:7-10) 또 영이시므로 우리 눈에는 보이시지 않습니다(요 4:24).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한 분이십니다(창 21:33, 시 90:2). 또한 스스로 계신 분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십니다(출 3:14). 그리고 하나님은 때로 당신의 위대하신 그 정체성을 자연의 조화와 변화를 통해 계시하시기도 합니다.
징계를 위하여 긍휼을 위하여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13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땅을 징계하시기 위해 혹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비를 오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자연현상인 비가 때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당대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이자 무서운 벌이되기도 합니다. 노아시대의 홍수처럼 오늘날도 비는 종종 파종이나 추수를 방해하고 하천을 범람하게 하고 열매를 손상시켜 어떤 특정한 지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게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땅을 비옥하게 하고 자연이 살아 숨 쉬게 하고 모든 생물들이 활력을 얻게 하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행하실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과 운명, 우리의 복과 화, 삶의 크고 작은 조건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인가를 실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일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14절). <오묘한 일>을 뜻하는 히브리어 <팔라>(pala)란 신비하고 기적적인 그 무엇을 가리키는 어휘입니다. 시편 72:18에서 솔로몬은 <홀로 기사(팔라)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말하는 오묘한 일 역시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아니라 홀로 구원하시며 구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간섭의 어떤 결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하신 일을 곰곰이 곱씹어 그 일의 깊이와 신비함을 한 번 헤아려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신비하고 절묘한 자연의 경이로움 만큼이나 신묘막측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의 신비와 오묘함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의 신비와 그 오묘하신 하나님의 솜씨 앞에서 더욱 겸허하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지식의 경이로움을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16절).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지식에 있어 완전하시다는 것은 곧 그분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영화로움 가운데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직관적입니다. 그분은 배우거나 들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므로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모든 세세한 부분들에게까지 미치고 전체에까지 다 이릅니다. 그의 지식에는 어렴풋한 것이 없으시고 장래가 아니라 현재적으로 아시며 모든 숨겨진 것이 다 드러나게 됨으로써 알게 되시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들은 지식의 불완전함을 시인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나 과학자들이라 해도 자연의 신비와 조화를 다 알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보다 양심적이라는 점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게 곧 겸허함일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의 본체되심과 하나님의 지식의 경이로움을 고백하는 성도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
|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