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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社會 關係

[스크랩] 인터넷-폭도(Net Mob)의 죽음, 개인의 관점과 실명성 숨쉬는 SNS !

鶴山 徐 仁 2012. 11. 8. 18:11

 

 

인터넷-폭도(Net Mob)의 죽음, 개인의 관점과 실명성 숨쉬는 SNS !

 

떼(타진요) ! 개인(타블로) 죽창으로 찌르다.

 

 

 

인터넷-폭도(Net Mob)의 죽음

 


6.25가 터졌을 때 '평양것들'이 점령한 지역에선 폭도들이 횃불을 들고 '인민'의 이름으로 이른바 '반동분자 간나새끼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세계 곳곳 종교분쟁 지역에선 '
'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학살했다.


인터넷 포털 카페-게시판 세상에선 '
네티즌'의 이름으로 '생사람'을 여럿 잡았다. 


'타진요'들이 지난 3년 쏘아댄 화살에 맞은 타블로와 타블로 가족들의 생살은 얼마나 아팠을까?

타블로가 TV에 출연해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가족들의 아픔을 술회한 것을 계기로, (전체)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한국 인터넷 문화의 야만성을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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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캠프에서 타블로의 진솔한 속사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콧날이 시큰했고 눈시울을 적셨다. 그런데 만약 지금도 타진요 같은 사나운 카페-게시판이 기세등등 하다면? 힐링캠프는 감히 타블로를 출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SNS에서 황상민의  ‘생식기만 여자’ 발언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토악질을 일으켰다. 그런데 만약 지금도 인터넷이 2010년 천안함 괴담 당시의 카페-게시판들의 분위기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부끄러움 없이 낄낄대며
“박근혜는 생만녀(생식기만 여자인 존재)”라고 조롱하는 야비한 풍조가 팽배했을 것이다.


황상민은 구토 유발자가 아니라 ‘왕창 뜨는 지식인’이 될 뻔했다. 단 한 가지 계산착오--세월을 잘 못 계산했기 때문에 망했다. 황상민이 타임머신을 타고 2010년 천안함 괴담 혹은, (바람직하게는) 2008년 광우뻥 내지 2002년 장갑차 교통사고 난동 시절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대성공할 것이 틀림없다.


카페-게시판은 사람들을 인터넷-폭도로 만드는 타락의 온상이었다. 인터넷-폭도는 흔히
‘네티즌’이라 불렸다. 나는 2000년경부터 “네티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넷몹(Net Mob, 인터넷-폭도)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해 왔지만, 씨도 안 먹혔었다.


사람들은
‘네티즌에 의하면’이라는 일곱 글자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인터넷-폭도를 내세워서 사납고 야비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득세했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에 조중동이 네티즌을 두고 ‘인터넷-폭도’라고 불렀다면 사옥이 불탔을 게다. 조중동마저 인터넷 폭도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기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2005년경에 보았던, 원고지 여덟 장 분량의 어느 교수의 칼럼에서는 ‘네티즌에 의하면’이라는 구절이 무려 일곱 번이나 나왔던 기억이 있다.
 


이제 인터넷-폭도는 죽었다. 카페-게시판은 시들해졌다.
미디어 생태계(media ecology)가 바뀐 것이다. 


이 글은 인터넷-폭도의 죽음에 바쳐지는 조사(obituary)이다. 우리는 흔히 훌륭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만 조사를 쓰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은, 악당의 죽음에 대해서 더 열심히 조사를 써야 한다. 악을 악이라 부르지 못 하면 선을 선이라 일컫지 못 하기 때문이다.


열정이 사라지고 남은 독기가 인터넷-폭도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대충 2000년(초고속 인터넷 접속 서비스의 등장)부터 2010년(천안함 루머)까지 인터넷-폭도가 지배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 80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 동안, 청년 세대 전체가 맹렬한 주체사상(NL)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PD) 혹은 막가파 반항사상(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다. 이 청년 세대의 열정이 자유민주주의와 글로벌문명을 향해 승화되지 못하고 고착되었다. 


이것이 우리 사회 최대의 비극이다. 한때 순수했던 열정은 시들고 독기만 남아 앙심, 권력욕, 금전욕으로 타락했다. 이 독기와 타락이 인터넷-폭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이 사람들을 ‘
운동권 세대’라고 부른다. 


민주화세대라고? 민주화는 ‘의도하지 않았던 부산물’일 뿐이다. 87년 6월 전두환이 민주화를 수용하자, 수많은 청년들이 이렇게 울부짖었다.


“여기서 혁명을 끝낼 수는 없다.”
운동권 세대가 의도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족해방혁명(NL) 혹은 급진사회주의혁명(PD)이었다.

민주주의는 타협의 부산물, 의도하지 않았던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그 세대에 붙인다는 것은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래서
나는 민족해방(NL)과 인민민주주의(PD) 노선에 따라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 스스로를 ‘민주화 세력’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좀 기괴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모욕이며 파괴이다. 과거가 없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나의 과거를 모욕하고 파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민주화보상도 신청하지 않았고 재심도 청구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자가 되고 싶으면 자신의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편이 당당하다.


"그땐, 혈기에 열 받아서 마르크스-레닌주의자(혹은 김일성주의자)였지.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 그래서 나중에 생각을 바꿨어.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해."

이것은 과거를 지우는 행동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의절’(disowning)이다.  ‘과거에 대한 의절’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시집이, 1990년대 초 서울대 운동권 출신의 여류 시인 최영미가 써서 크게 히트 시킨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다. 공지영이 무명이었던 시절이다. (시인이 무슨 의도로 썼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에서 받은 느낌은 이렇다.

 

"혁명은 끝났어.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돼.
그래. 우리는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
하지만 이 혼란과 고통이 출발점이야."


최영미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 시집은 당시 운동권 출신들이 겪었던 사상적, 정서적 공황과 혼란을 속살까지 드러내 주었다. 만약 운동권 세대가 최영미의 문제의식을 계속 들고 팠더라면, 지금쯤은 모두 번듯한 인격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 자아, 세계에 관한 진실을 당당하게 마주보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진 1990년경부터 미친 듯이
막가파 반항사상(포스트모더니즘)을 들이켰다. 


이런 사고방식이다.

 

“진실? 웃기지마! 존재하더라도 알 도리가 없거든! 

중요한 것은 열정이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반항이 중요해! 

힘을 모아서 때려부수는 것—이것이 인생의 의미야!”


 

막가파 반항사상은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서로 정반대되는 사상들이 같이 어울리도록 만들어 주는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막가파 반항사상을 매개로, 운동권 세력은
사상적 혼숙(그룹섹스)을 시작했다. 사상의 차이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원래 서로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어야 마땅한
김일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영구적 국제혁명)가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독사와 족제비와 까마귀가 한 살림을 차린 것이다. 


나중에는 전투적 페미니즘과 동성애 제도주의(동성 사이의 결혼, 동성 부부의 입양, 군대 안의 동성애 등을 합법화하려는 운동)까지 이 그룹섹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느 아름다운 재단이 지원해 온 단체들이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듯, 이 음탕한 혼숙에는 모든 정파, 모든 사상이 다 끼어들었다.


니체는 이같이 예언했다.
  

나는 너희들 [현재의 인간]들에게 온 거야.

[문화 국가]로 온 거지…

나는 웃고 또 웃었지.

너무 웃어서 나중엔 다리가 덜덜 떨리고 심장이 달달 떨리더군.

페인트 깡통이란 깡통은 여기에 다 모인 것 같더군!

그래! 그 얼굴보다 더 훌륭한 가면은 없을 거야.

얼굴을 그 모양으로 색칠해 놨으니 누가 알아보겠어!

온몸에 과거의 문자들을 잔뜩 그려 놓았더군.

게다가 그 위에 다시 다른 문자들을 그려 놓았더군.

어떤 사람도 그 뜻을 해독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잘도 감췄더군…

너희를 감싼 베일에서는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시대와 모든 인민들의 흔적이 뒤죽박죽, 알록달록하게 나타나.

너희 몸짓에서는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관습과 모든 종교의 흔적이 뒤죽박죽, 알록달록하게 나타나.


운동권 세대의 독기는 알록달록 합성괴물을 만들어냈다.
모든 사상이 뒤죽박죽으로 혼재된 채, 더 이상 진실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괴물. 


진실을 경멸하는 괴물. 


진실이야말로
[생명이 번영하는 길]을 비추는 서치라이트이며, 자아를 자아답게 만들어주는 시험대이거늘! 


운동권 세대의 독기는, 오직 세상에 대한
앙심(ressentiment)을 내뿜는 불개들을 만들어냈다. 


이 불개들은 2000년에서 2010년까지 이렇게 외치며 인터넷 공간을 지배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네티즌이야! 

나야 말로 선과 정의야! 봐! 

나야 말로 거대한 떼(multitude)이잖아! 

떼의 머릿수보다 위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


위대하기는 개뿔! 


인간은
‘정신의 독립성’을 가진 존재—참된 개인일 때에만 인간다워질 수 있다.


가 인터넷을 장악하면 인터넷-폭도가 된다. 


온갖 희안하고 참혹한 일이 벌어진다. 


장갑차 교통사고를 빌미잡아 한미동맹을 깨부수자고 날뛰기도(2002) 하고, 


존재하지 않는 광우병 위험성을 부풀려서 온 국민을 패닉에 몰아 넣기도(2008) 하고, 


천안함 폭침에 대해서 미군 오폭, 이스라엘 잠수함 충돌, 좌초, 피로 파괴 등 온갖 루머를 만들기도(2010) 한다.



 

인터넷-폭도는 소통과 쏠림이라는 문화유전자를 악용했다


운동권 세대의 독기만으로는 무려 10년 가까이 인터넷 공간을 지배한 인터넷-폭도의 괴력은 나올 수 없었다. 이 괴력은 (비극적이게도) 우리의 문화유전자에서 나왔다.


우리 문화유전자 안에는
소통(communication)쏠림(vortex)을 향한 강력한 경향이 존재한다. 


반만년 동안 세계 최강의 폭력집단이었던 중국 바로 옆에 위치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말, 음식, 주택, 의복, 풍습, 문자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힘은 바로 강력한 내부 소통과 일정 방향에 대한 쏠림 에너지 덕분이었다. 긴 세월을 거치면서 소통과 쏠림은 우리의 문화유전자가 되었다. 


예를 들어 보자.


불교가 들어와서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주자학이 들어 와서 세계에서 가장 단아한 유교 문화를 만들었다. 


기독교가 들어 와서 세계에서 가장 신실한 가톨릭과 개신교가 되었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영어의 Christianity이다. 로만가톨릭, 개신교, 앵글리칸, 그리스정교, 러시아정교가 포함된다.)


소통의 내용이 수시로 바뀌고 쏠림의 방향이 아침 저녁으로 널뛰면,
냄비근성이 된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모든 면이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이다. 


우리의 문화유전자인 소통과 쏠림 역시, 부정적 함정--냄비근성--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폭도는 냄비근성을 악화시켰다


운동권 세대가 만들어낸 독기가 알록달록, 온갖 사조와 사상이 잡탕이 된 불개로 타락한 만큼, 이 불개의 인터넷에서의 존재 양태--인터넷-폭도 역시 시시각각 횡설수설 할 수 밖에 없다. 오늘은 이 논리에서 이 주장을 해서 세상을 뒤집고, 내일은 저 논리에서 저 주장을 해서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든다. 


(뱀발: 나는 1997년 경부터 인터넷 CUG에서 ‘냄비근성’이라는 말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나는 2008년 이전까지는 오픈 공간에서는 글을 쓰지 않았다. 

MIT를 나와서 미국에서 교수를 하다 자살한 故 양신규 박사(필명 skyang)가 이 용어를 오픈 공간에 전했다. 그는 한때 서프라이즈 같은 곳에서 가장 논쟁을 심하게 벌인 ‘전설적 존재’였다. 그와 공감했던 사람들이 만든 카페가 여럿 있는 데 그 중에서도 ‘회의주의자 좌파’(Scepticalleft) 같은 곳은 지금도 활발하게 운영된다. 

 

내가 만들거나 혹은 최초로 사용한 말 중에 양박사를 통해 오픈 공간으로 옮겨간 것들로는 ‘포퓰리즘/포퓰리스트’ 혹은 ‘지식기반사회’라는 단어들도 있다.)
 

소통과 쏠림이라는 우리 고유의 문화유전자는 인터넷-폭도의 영향력을 더욱 더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타블로와 그 가족의 인생을 박살낸 카페 ‘타진요’에는 무려 20 만 명의 회원이 몰렸다. 쏠림이다. 


하루 종일 수백 건 씩  게시글이 올라오고 댓글이 달리고 댓글에 다시 댓글이 붙었다. 소통이다. 


인터넷-폭도는 카페-게시판을 이용해서 소통과 쏠림을 타락시켜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인터넷-폭도에 참여하든가 혹은 인터넷을 떠나든가, 둘 중 하나 밖에 선택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인터넷-폭도는 카페-게시판의 익명성과 빅브라더를 이용했다


인터넷은 상상하지도 못 할 정도로 강력한 소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에 열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카페-게시판에 열광했다. 그래서 게시판 기능의 고도화는 한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원래 선진국의 게시판은 매우 단순했다. 예를 들어 초기 미국의 게시판 중에는 아예 댓글 달기 기능이 없던 것들도 많다.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다는 기능, 댓글의 글자 색과 폰트 크기를 바꿀 수 있는 기능, 댓글에 이모티콘을 넣는 기능은 모두 한국에서 개발되었다/널리 퍼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카페-게시판의 댓글 놀이야말로 한류이다.


SNS가 나오기 전에 가장 널리 사용되어 온 인터넷 소통 방식인 카페-게시판에는 몇 가지 치명적 문제가 있다. 이를 차분히 살펴 보자. 


두어달 전에 나는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박선생님이시죠?”

“네. 그런데요.”

“저는 투데이신문의 홍길동 기자입니다. 칼럼 원고를 하나 부탁드리려고..”

“저는 원고지 8매짜리 칼럼을 잘 못 쓰는데요…”

“길어도 좋습니다. 이번에 포털 등에서 주민등록번호 실명 확인하는 것이 금지됐잖아요? 그에 대해 좀 비판해 주시죠.”

“..근데, 제가 왜 비판해야죠? 저는 실명확인 금지에 찬성하는데요?”

“네? 아니, 선생님, 보수시잖아요?”

“보수죠. 깡보수. 근데 왜 실명확인에 찬성해야죠?”

“네? 아니,..실명확인이 안 되면 아무 소리나 마구 갈겨 쓰게 되지 않습니까?”

“여보세요! 똑바로 들으세요! 지금 포탈이 진짜 실명입니까? 고소 고발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처벌하는 게 실명이에요? 참된 실명은 말이죠..사후적 처벌이 아닙니다. 일반 사용자들이 게시판에 나타난 다른 사람의 닉네임을 보고 즉석에서, 실시간으로, ‘아, 이 사람이 대충 누구지, 아마?’라고 식별할 수 있는 상태—이것이 실명이에요. 저는, 그런 칼럼 안 씁니다. 다른 필자 알아 보세요. 바쁘니까 이만!”


실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늬만 실명. 또 하나는 참된 실명


하나씩 살펴 보자.


무늬만 실명
은, 일이 벌어진 다음에, 고소 고발이 이루어진 다음에 경찰, 검찰, 판사만 알게 되는 실명이다. 일반 사용자들은 실명을 모른다. 이것은 사실상의 익명이다.


추잡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내가 여중생 성매매 카페에 가입해서 열 두어살 짜리 소녀들을 여러 명 간음했다고 가정해 보자. 걸렸다고 쳐보자. 최강의 변호사를 사고, 피해자 부모에게 돈 바치며 싹싹 빌고, 온갖 커넥션을 동원해 경찰, 검찰, 판사에게 선처를 부탁하고, 재판정에서 닭똥 같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한마디로 생쇼를 한 덕분에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전체 과정에서 비밀을 잘 유지하면 친구와 선후배는 물론, 처, 아들, 딸마저 내가 이런 추잡하고 흉측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게 만들 수 있다. 이 행위에 관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익명으로 남는 것이다.


심지어 매일 조사받고 재판받는 과정에서도 ‘청소년 선도를 위한 지킴이 센터’라는 카페에 가입해서 전혀 다른 닉네임으로 다른 학부모들에게 근사한 말을 늘어 놓을 수도 있다.


익명은 떼이다


떼는 거짓과 선동의 밥이다. 


개인으로서의 당당한
책임성(accountability)이 성립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인간은 난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나의 말이 아니라 실존주의 철학과 현대신학의 아버지인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무늬만 실명’으로 운영되는 카페-게시판에서는 사용자들이 서로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사실상의 ‘익명 공간’이다.

익명 존재의 집합이 떼이다. 떼 속에서는 개개인의 실명성이 감추어진다.

인간이 떼가 될 때에는 거짓과 선동에 대해 취약해진다. 개인의 ‘정신적 독립성’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유지하는 것이 ‘중뿔난 짓’—불리한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카페-게시판의 또다른 약점은
시솝이라 불리는 빅브라더의 존재이다. 


가입, 회원등급, 강제탈퇴 등이 모두 시솝의 권한이다.


웃지 못 할 예는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이다. 정봉주와 시솝 측이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에 문재인을 지지할지, 손학규를 지지할지 의견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봉주가 탈퇴 혹은 강제탈퇴. 정봉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카페에서 정봉주가 사라진 것이다. 이게 시솝의 힘이다. 이 정도로 막강하다.


빅브라더(시솝)
의 존재는 사람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래서 카페-게시판의 글은 편향성을 가지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일반 회원이 카페-게시판에 글을 쓸 때에는 그 카페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자기 검열, 자기 금제를 작동시키게 된다.


빅브라더(시솝)의 힘은 좀더 교묘한 방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프라이즈의 ‘해우소’(변소) 제도이다. 게시판에 쓴 글꼭지에 대해 일정 횟수 이상의 ‘싫어요’가 쌓이면 게시판에서 글이 사라진다. 똥통으로 처박히는 것이다. 이 경우, 시솝이 글을 마음대로 삭제해도 ‘해우소’ 제도에 의해 삭제된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폭도
는 카페-게시판의 익명성빅브라더를 이용해서 힘을 떨쳐 왔다. 


총정리해 보자. 


다음 4가지 요소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인터넷 공간을 특징지워 왔으며 이 요소들은 인터넷-폭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해 왔다.

 

1) 운동권세대의 열정이 자유민주주의와 글로벌 문명을 향해 승화되지 못하고 타락한 독기

2) ‘소통과 쏠림’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문화유전자

3) 카페-게시판의 익명성(사실상의 익명성)과 떼 근성(거짓과 선동에 대한 취약성)

4) 카페-게시판의 빅브라더(시솝)



 SNS는 떼에게는 황무지, 개인에게는 옥토이다


요즘 포탈들이 장사가 안 된다고 신음하고 있다. 포탈의 힘은 카페-게시판이었다. 검색 자체만 따지면 구글과 경쟁하기 어렵다. 


그런데 SNS의 등장 때문에 장사가 죽을 쑤게 된 것이다. 


SNS는 카페-게시판의
떼의 관점에 정반대되는 개개인의 관점(individual perspective)과, 카페-게시판의 떼의 익명성과 정반대되는 개인의 실명성(individual identification)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SNS는
인터넷-폭도의 상극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관점(perspective)이다. 


관점이 개인이다. 


내가 나다운 존재가 되는 것은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당한 이유는 그 관점을 솔직담백하게 의심하고 끊임없이 수정하기 때문이다. 


관점을 가지되 진실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것이 바로 자아됨의 비밀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자아의 특징’으로 꼽는 ‘통짜 인격’(integrity)이 바로 이것이다.


반면에 개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전체주의다. 그 중에서도
평양은 인류최악, 세계최악의 전체주의이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 만약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직행한다.

 

 “사람은 저마다 관점이 있는 법 아닙니까? 한번 관점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평양것들이 떠받드는 관점은 오직 하나 ‘수령의 관점’이다. 그 눈알이 이미 인조 눈알로 바뀐 미라로 누워 있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령은 민족과 당에 ‘영원한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민족과 당을 통하여 ‘영생’하기 때문이란다.


SNS는 개인의 관점을 위한 서비스이기 때문에, 전체주의의 상극
이다. 


나의 관점에 따라, 내가 선택한 친구들에 의해 나의 세계(트위터의 타임라인, 페이스북의 뉴스피드)가 구성된다. 한마디로 ‘내가 구성하는 세계’(The World Configured by Me)이다. 


만약 내가 악질 사채놀이 업자들만으로 친구를 구성하면, 나의 세계는 돈, 채권, 추심, 해결사, 납치, 감금, 인신포기각서 등만으로 흠뻑 물든 세상이 된다. 


만약 내가 MTB 매니아들로만 친구를 구성하면, 나의 세계는 자전거 부품, 신발, 복장, 코스, 여행 등으로만 흠뻑 물든 세상이 된다. SNS는 한마디로 관점의 축제, 개인의 축체이다.


여기에는 카페-게시판의 빅브라더도 존재하지 않고 ‘분위기’도 없다. 그냥 내 생각과 느낌을 적으면 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 트윗 입력창 위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시나요? What are you doing now?”


처음에는 이 말이 너무 우습게 보였다. 


무엇하긴? 트윗질 하고 있지..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 내가 무슨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냐는 뜻이었다. SNS가 매 순간 순간 사용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의 관점에 따라 당신의 친구를 선택하세요. 그러면 당신과 친구들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계를 타임라인/뉴스피드에서 실시간으로 보여드립니다.”

페이스북 창업자 저커버그는 위의 말을 좀 더 멋있게 표현했다.

 

“대여섯 명의 적을 만들지 않으면 5억 명의 친구를 만들 수 없습니다. 
You cannot make 500 million friends without making a few enemies.”  

적과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관점을 가진다는 뜻이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맹숭맹숭한 사람에게는 적도 친구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저커버그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그러나 훨씬 더 솔직하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 자신의 관점을 가지십시오. 진실에 비추어 그 관점을 수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관점이 없다면 당신은 적도, 친구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Have your own perspective; don’t be afraid to renew it, if truth tells you to do so. Without your own perspective, you deserve neither friends nor enemies.”


 

둘째, 실명성(identification)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식별되어 ‘책임 있는 존재’가 될 때에만 개인이 성립한다. 


프라이버시(privacy)는, 나 개인이 식별되는 상황에서만 소중해 진다. 


내가 누군인지 알려 지지 않는, 천한 떼 속의 한 명에 불과한 상황이라면 활짝 트인 곳에서 바지를 내리고 대변을 본들 무슨 상관이랴? 


실명성은 프라이버시의 어머니이다. 실명성이 곧 개인이다.


SNS는 주민등록번호 실명확인을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정체를 쉽게 식별할 수 있다. 


페이스북의 경우에는 친구가 백 명만 되어도 정체가 드러난다. 반면, 트위터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익명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량급 트위터러가 되면 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 정체가 드러난다. ‘@oisoo’가 이외수라는 것을 아니까 ‘@oisoo’의 트윗 메시지가 읽혀지는 것 아닌가? 만약 ‘@oisoo’와 이외수가 따로 따로 노는 존재라면 ‘@oisoo’의 글에는 아무런 매력이 없게 된다.


이렇듯 SNS는
개개인의 관점, 개개인의 실명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관점과 실명성은 모두 개인의 특성이다. 


반면에, 떼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 자신의 관점이나, 그 자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떼의 관점(타블로는 거짓이다)떼로서의 집단명칭(타진요)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SNS는 떼에게는 자갈밭이고 개인에게는 옥토이다. 


인터넷-폭도는 인터넷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떼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인터넷-폭도는 SNS 환경에서 그 힘을 잃고 급속하게 시들 수 밖에 없다. 


반면에 개인—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는 SNS 환경에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 


SNS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당당한 개인’으로 체험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인터넷-폭도의 죽음


인터넷-폭도의 마지막 축제는 2010년 천안함 루머였다. 사실 이는 인터넷-폭도가 누릴 자격이 있던 축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시점에서 SNS트위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시차(time lag)가 작용했다.


그 시점까지 트위터는 카페-게시판의 인터넷-폭도를 위한 보조 미디어에 지나지 않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시점까지 트위터는 인터넷-폭도가 선점하고 있었다. 2010년 여름까지 인터넷-폭도는 한편으로는 카페-게시판을 지배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트위터를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SNS의 특성—‘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가  힘을 발휘하는 공간’이라는 특성은 아직 꽃피지 못 하고 있었다.


변화는 서서히 왔다. 생각이 바른 개인들이 2010년 여름부터 하나 둘 트위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인, 진실거짓, 설득선동 사이에 전쟁이 시작됐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2011년 여름)를 둘러싼 논쟁이 첫 싸움이었다. 


서울의 ‘전면적 세금급식’을 거부하기 위한 주민투표(2011년 8월)가 두번째 싸움이었다. 


서울시장 재보권 선거 때 박원순의 종북 옹호 행적에 대한 비판(2011년 10월)이 세번째 싸움이었다. 


종북 세력에 대한 비판과 김용민 강간살인 망언에 대한 비판(2012년 3월, 4월)이 네번째 싸움이었다.


이런 일련의 싸움을 통해 트위터 공간에서 힘의 균형은 5:5까지 급속하게 성장했다. 개인, 진실, 설득을 중시하는 자발적 참여자들이 꾸준히 늘어난 덕분이었다. 


2012년 5월 경부터는 거침없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김구라의 정신대할머니 비하 발언, 임수경의 ‘탈북자 변절자 새끼’ 발언을 거쳐 최근 김광진과 황상민의 망언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떼, 진실과 거짓, 설득과 선동 사이에 팽팽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페이스북은 트위터와는 상당히 다르다. 


페이스북은 차분히 지식과 뜻을 교환하기에 알맞다. ‘지식인 까페’ 혹은 ‘차분한 사교 공간’이다. 반면에 트위터는 짧은 주장과 정보가 순식간에 전파되는 공간—따라서 의견과 의견, 관점과 관점 사이에 매우 뜨거운 싸움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페이스 북에서는 차분하게 인맥이 다져지고 뜻과 지식이 모인다. 힘이 길러진다. 


트위터에서는 이 힘이 폭발적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각각의 고유한 의미와 쓰임새를 가지고 있다. 


SNS에서의 싸움은 이미 그 승패가 결정되어 있다. SNS의 특성 자체가 개인, 진실, 설득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떼, 거짓, 선동은 힘을 쓸래야 쓸 수 없는 공간이 바로 SNS이다. 


지난 12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해 왔던 인터넷-폭도에게 사망선고가 내려져 있다. 뜻 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조금만 더 늘어난다면 인터넷-폭도는 타고 남은 재처럼 흩어지게 된다. 그때 그들은 떼가 아닌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서 거듭나게 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인터넷 소통이 미디어 생태계를 이끈다
 


내가 말하는 인터넷은 유선, 와이파이, 모바일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PC와 스마트폰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인터넷 프로토콜(IP)을 사용한 소통 전체를 ‘인터넷 소통’이라 부른다.


우리는 흔히 공중파나 조중동 같은 메이저 언론이 강력한 존재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그들은 거대 사업체일 뿐이다. 가진 것과 지킬 것이 많은 사업체의 관점에서 보면, 미디어는 비즈니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고객의 트렌드를 좇고 상황의 요구에 순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815년 엘바 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탈출해서 파리에 이르는 시기 동안 언론이 보여줬던 보도 태도의 변화이다. 메이저 언론이란, 이같이 시류를 좇을 뿐이다. 시류가 바뀌면 순식간에 논조를 바꾼다. 

 

3월 9일: “괴물이 유배지를 탈출하다”


3월 10일: 코르시카 사람이 이끄는 공격, 주앙(Juan)에 상륙하다


3월 11일: 호랑이, 가쁘(Gap)에 나타나다. 군대가 그의 진격을 가로막다.
              그는 산중에 고립되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3월12일: 괴물이 그레노블(Grenoble)까지 진격하다


3월 13일: 독재자, 리옹에 도달하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공포에 질리다.


3월 18일: 왕위 찬탈자, 수도에서 60시간 걸리는 거리까지 도달하다


3월 19일: 보나파르트, 진격 중. 그러나 파리까지는 불가능.


3월 20일: 나폴레옹, 내일 파리 외곽까지 진격할 듯


3월 21일: 나폴레옹 황제,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


3월 22일: 어제 밤, 황제 폐하께서 파리에 당당히 입성하시어 뚜일르리에(Tuileries) 궁에 도착하시다. 온 시민이 이 같이 큰 기쁨을 누린 적 없어.

언론사를 두고 간사하다고 욕할 것 하나도 없다. 위와 같은 논조 변화는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민심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할 뿐이다. 신문이 변덕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민심이 죽 끓듯 했다. 처음엔 나폴레옹의 탈출을 무서워하다가 나중엔 순순히 나폴레옹을 따랐다.


물론 이때의 여론은 각 언론사 별 충성 고객 기반의 분위기를 뜻한다. 메이저 언론이 하는 일은 ‘일어난 바 없는 여론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여론의 변화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메이저 언론은 여론의 트렌드의 창날(spear head)이 아니라
앰프(amplifier)이다.


그렇다면 여론의 트렌드는 누가 이끄나? 누가 여론의 트렌드에 물고를 트나?


인터넷 민심(넷심)
이 이끌고 물고를 튼다.


이제 카페-게시판이 아니라
SNS가 인터넷 민심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거짓-친화적인 인터넷-폭도가 아니라 진실-친화적인 개인이 민심을 만드는 주체가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깨어있는, 자발적 시민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 알의 밀알이 들판 전체를 밀밭으로 바꾸고 한 알갱이의 원자가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이것이 세상을 바꾼다.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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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 뉴데일리 박성현 논설위원 >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여정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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