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2년5월5일 QT - 종의 마음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2. 5. 6. 01:27



종의 마음


수건은 하나님이 지상에서 선택하시는 무기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무기야말로 지상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진정한 근원이다. 우리의 주님이 수건을 두르셨고,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셨다. 수건은 종이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토미 테니 ․ 데이빗 케이프의 [종의 마음] 중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즉 주님의 종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 지 보여 주셨습니다. 수건 하나를 통한 섬김이 세상을 살아갈 우리의 무기입니다. 지금도 그 누군가의 발을 닦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수건 한 장으로 사랑하기에 충분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내게 알게 하소서 - 욥 10:1~8
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4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5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8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1절).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분명 이 땅에 존재하는 데 대한 하나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주님도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고 하셨습니다. 욥이 겪었던 답답함도 자신의 그 극심한 아픔과 영혼의 고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나와 변론하시는지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2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때는 그것이 곧 우리와 다투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우리와 다투실 때는 언제나 그만한 이유가 있으십니다. 우리는 아무런 까닭 없이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이유 없이 토라져 남과 말을 안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런 법이 없으십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과 다투시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불평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불의하다거나 냉정하시다고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다투시는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모든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자 합니다. 이유를 모른다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묻지 마십시오. 다 내 탓이요 내 미련한 까닭입니다. 내게 그 원인이 있고 내게 무한 책임이 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학대하시고 멸시하시는지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3절).
욥은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주시고 가혹한 아픔을 당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하나님을 성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를 과연 어떻게 조화시켜야 옳은지에 대해 매우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학대하시거나 멸시하시지 않으며 악인들의 꾀에 영광의 빛을 비추시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느낄 뿐이며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고 때로는 혹독한 아픔도 겪게 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순도 높은 정금으로 정련하기 위해 풀무불 시련을 통과하게 하는 것과도 꼭 같은 것이어서 복될지언정 불행한 징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라 감사하므로 고난이 더 이상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 되게 하시길 빕니다.

무슨 까닭으로 내 허물을 찾으시는지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6절).
주님은 빛이십니다. 누구나 어두움 속에 있을 때는 제 허물이나 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의 빛 앞에 서면 자신의 모든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굳이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찾으신다기 보다는 주님의 빛 앞에서 우리의 모든 모순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동안은 별다른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릴리 해변에서 주님을 뵙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하며 고백했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죄성을 비로소 발견하고는 주님 앞에 엎드려 떠나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경우도 하나님이 그의 죄와 허물을 들추셨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빛 앞에서 욥의 허물과 모순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뿐입니다. 늘 빛 앞에서 사십시오.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은 곧 착각과 자기기만 속에서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