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2.24 23:04
최근 4년간 한국 성장속도 엔진 힘 빠져버린 3.1%
고령층은 변화 거부하고 소외된 빈곤층도 자리잡아
감성적 위로나 파괴 아니라 썩은 곳 잘라내고 체질 바꿔야
- 송희영 논설주간
도쿄의 세미나 자리에 노인들이 많아진 것은 벌써 10여년 전부터다. 저명인사의 무료 강연회는 퇴직자들의 신청이 많아 추첨에 뽑혀야 참가할 수 있다. 자산 관리 비법을 설명하는 세미나에 비싼 참가비를 선뜻 내고 참석하는 고객층도 은퇴자 집단이다.
어느 경제 세미나에서 토론 참석자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 중 디플레가 좋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 들어 보세요." 디플레란 디플레이션(deflation) 의 일본식 표현이다. 경기는 바닥을 헤매는 가운데 물가가 하락하는 국면으로 20년 장기 불황을 압축한 단어다. 디플레 퇴치야말로 일본 총리에게 우선 순위가 가장 높은 국정 과제 중 하나다. 하지만 TV 화면 속의 청중 7~8할은 디플레가 좋다고 손을 들었다.
인구구조가 바뀌면 민심도 변한다. 머리 희끗희끗한 청중들이 갈수록 늘어가는 서울의 세미나 풍경에서 10년 후 민심을 어림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이 다수가 되는 시대가 닥쳐왔다.
나랏빚이 너무 늘어 파산(破産) 직전이라고 아우성쳐도 일본의 노인 유권자들은 "뭘 바꾸느냐"며 세금 인상에 반대표를 던진다. 주택가에 대형 수퍼가 들어서지 못하게 기껏 막아놨더니 "걸어서 10분 거리 내에 수퍼가 없으면 안된다"고 보챈다. 나라 경제가 뒷걸음치든 말든 물가가 하락하면 노인들에겐 천국이다. 우동 값은 오늘보다 내일 더 떨어지고, 모레는 더 싼 장어덮밥을 먹을 수 있다. 이런 세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UN의 인구 전망치를 보면 2010년 현재 일하는 국민(생산연령인구)에 비해 돈벌이 안 하는 사람들이 많아 가장 부담스러운 나라는 나이지리아다. 100명이 86명을 먹여살린다. 2050년에는 일본이 1위로 올라선다. 38년 후 한국은 세계 5위 노인국가로 등극한다. 땀 흘려 일하는 100명에게 85명의 아이·노인들 밥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것이라고 한다.
경제가 쑥쑥 성장할 때는 밥투정하는 식구도 적어 보인다. 하지만 한국은 성장이 멈춰가는 나라다. 엔진이 꺼지지는 않았지만 최근 4년간의 성장속도 3.1%는 유럽·일본 같은 고령(高齡)국가와 비슷하다. K팝이 뜨고 반도체·TV가 세계 1위라고 으스대봤자 나라 경제는 거침없이 뛰어 달리던 모습을 잃었다. 느릿느릿 잔걸음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곧 "그냥 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이나 먹자"는 계층이 여론을 주도할 것이다.
경제성장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류가 풍요로운 삶을 목표로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한 계기는 18세기 산업혁명이라고 본다. 공업화가 역사상 가장 폭발력이 컸던 성장의 분기점(分岐點)이었다.
우리 경제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띄우며 분기점으로 삼았고, 수출기업을 키워 성장을 지속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등짝 따습게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노출하며 분배를 강조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벌개혁을 외치며 대기업 중심 구조를 손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8번 바뀌면서 경공업에서 중공업을 거쳐 IT산업에 이르기까지 정책 변화를 추구했으나, 국가 경제를 지탱해온 수출 대기업 중심의 프레임을 변형시키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이 한미FTA를 추진하고 이명박 정권이 고환율·저금리 정책을 고집해온 이유도 50년 동안 유지해온 경제의 틀을 잘못 고쳤다가 경제 전체가 주저앉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 개방 속도를 한층 높이고 내수(內需) 소비를 중시하는 경제로 전환을 시도하다 외환위기의 날벼락을 맞았던 악몽이 줄곧 정책 당국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제 한국 경제는 다시 한 번 큰 분기점을 마련해야 할 시기가 왔다. 뛰어갈 힘을 잃었으면서도 "내 손으로 성장의 역사를 썼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계층은 늙었고, 동시에 그들의 성공 뒤에 소외된 낙오자 집단과 빈곤층도 우리 사회에 자리잡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자'는 세력과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세력이 마찰을 일으킨다. 그들의 분노, 그들의 자부심을 불쏘시개 삼는 정치인도 많다. 서로 내뱉는 울분의 총알은 사방으로 튀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며 번지르르한 감성(感性) 언어로 위로하는 카운슬러나 '나쁜 것은 폐기하라'며 파괴를 앞세우는 운동가가 아니다. '정주영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며 혀를 굴리는 컨설턴트도 필요 없다. 경제의 썩은 곳을 잘라낼 집도의(執刀醫)와 노약해진 체질을 뛰어 달릴 수 있는 몸으로 바꿔줄 트레이너가 절실하다. 우리는 한 번 더 높은 곳으로 비상(飛上)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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