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1년12월30일 QT - 사랑의 실종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1. 12. 30. 20:32



사랑의 실종


만약 내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면,
예수님이 내 삶 속에 계시는 것인가
반문해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베풀기 위해 성장한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 중에서-


때론 내 안에 있는 선한 것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공허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의 벽에 갇혀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부질없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텅 빈 듯이 보이는 우리의 가슴에도
그리스도의 생명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역시
결코 변치 않습니다.
사랑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더욱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빛의 사람들입니다.




어여쁘고 어여쁜 그대 - 아 1:14~17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15절).
<내 사랑>도 모자라 <어여쁘고 어여쁘다>며 입이 닳도록 신부를 칭송하는 신랑, 이게 바로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뭣 때문에 우리의 사랑에 그토록 목말라 하시고 우리를 이토록 <어여쁘고 어여쁘다>며 사랑하시는 건지 알면 알수록,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의 그 절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영원하신 사랑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14절).
<엔게디>란 사해 서해안 사막의 오아시스로 종려나무와 포도나무가 무성하게 어우러져 있고 특히 향기가 강렬하고 노란색이 감도는 흰색 꽃 고벨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신부가 신랑을 비유한 이 아름다운 표현이 참 인상적입니다. 맞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바로 오아시스에 피어있는 한 송이 고벨화와도 같은 존재이십니다.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엔게디 오아시스 그리고 거기에 피어있는 순결한 모습의 고벨화 한 송이, 그게 피로에 지친 고단한 여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마음의 기쁨과 쉼과 행복을 느끼게 했을까요?

비둘기 같은 눈
<…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5절).
이것은 다시 신랑이 신부에 대해 화답한 내용입니다. 그녀의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합니다. 독수리의 눈처럼 무섭고도 날카로운 눈이 아니라 선하고 순결한 비둘기의 눈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늘 높이 솟아올라 땅에 있는 먹잇감을 찾고 노리는 매의 눈이 아니라 겸손하고 정숙한 눈, 소박하고 경건하고 진실함을 뜻하는 비둘기의 눈을 닮았다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봐주십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마 3:16)보셨기 때문일까요? 우리를 보실 때도 그렇게 <네 눈이 비둘기 같다>며 언제나 선하고 아름답게만 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난 부분에 오히려 연민이 가고, 이상한 짓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듯 주님은 늘 당신의 신부된 교회를 그렇게 바라보십니다.

화창한 마음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16절).
우리네 정서로는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어여쁘다>고 합니다. 이는 신랑의 외모를 말하고, 또 <화창하다>는 것은 신랑의 마음이 몹시 밝다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이 있을까 싶을 만큼 시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생겼고, 마음도 가장 밝고 건강한 사람>이란 찬사 이상의 좋은 말이 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 그런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분이시고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 마땅한 멋진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집>(17절)이라고 합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살 집, 그것은 <푸른 침상>(16절)이고, <백향목 들보>에 <잣나무 석까래>(17절)로 지은 결코 낡거나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집입니다. 주님을 자랑스러워 하십시오. 주님이 신부를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우리의 집>에 감사하십시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