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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의 선택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태도를 결정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당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당신을 열등하게 느끼도록 만들 수 없다.”
모든 상처, 분노, 실망, 좌절 그리고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과 감정들이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고 욕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 자신이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기기 때문이다.
-피터 허쉬의 ‘성공을 디자인하는 삶의 비밀’ 중에서-
세상은 갖가지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지도록 우리를 미혹하고, 서로를 판단하게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요, 십자가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당신의 소중한 가치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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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즐거움 전 9:9~18 |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13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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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즐거움을 시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즐거움을 보장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삶의 흥을 깨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북돋우시는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비난할 때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천국은 상가집이 아니라 찬치집입니다. 실제 주님은 천국을 자주 잔치집에 비유하셔습니다. <에덴>이란 말도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부부생활의 즐거움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절). 주님은 가나의 혼인집에서 공생애 첫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왜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첫 이적으로 삼으셨을까요? 천국의 본질,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즉, 행복한 가정, 행복한 부부의 즐거움이 곧 천국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즐거움을 이 세상 그 어떤 즐거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부부의 행복, 부부의 즐거움이 가장 천국의 그것에 근사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부부관계에 비유했고,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다>(엡 5:31-32)고 했습니다. 부디 행복한 부부가 되셔서 천국의 즐거움을 이미 이 땅에서 누리는 복된 가정이 되십시오.
노동의 즐거움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10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신성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평생 남을 가르치며 사는 랍비들도 반드시 기술을 하나씩 익혀야 했습니다. 학자 출신인 바울 같은 사람도 장막 짓는 장인이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의 속담에 <자식에게 노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도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안식할 권리도 없습니다. 엿새 동안 힘껏 일한 사람만이 이레째 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직업의 신성을 믿습니다. 모든 노동과 근로가 주님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노동에서 즐거움을 누리시고 행복을 느끼십시오. 노동이 노역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요 소명이라고 믿으면 누구나 기쁨과 보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늦가을 거리나 공원의 낙엽을 쓸면서도 그게 고된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믿으시면 그 노동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부디 노동의 즐거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십시오. 노동이 고역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고 행복이 되도록 노동의 신성을 확신하십시오.
지혜의 즐거움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17절). 작은 성읍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장정들이 있어야 성읍을 지킬 수 있는데 거기에는 장정들이 없어 전쟁이 나면 적에게 당장이라도 그 성읍을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읍에 가난했지만 지혜로운 이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자 그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지혜로운 책략을 세우고 적과도 협상하여 평화조약을 이끌어 냄으로써 그 성읍의 안보를 지켜냈다는 것입니다(13-15절). 따라서 <지혜가 힘보다 낫고>(16절), <지혜자의 말이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며>, <지혜가 무기보다>(18절) 낫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부디 신령한 지혜로 행복을 누리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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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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