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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오페라

[스크랩] 멘델스존 - String Quartet No.3

鶴山 徐 仁 2011. 9. 7. 10:03




String Quartet No.3 in D major, Op.44-1
멘델스존 / 현악사중주 3번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Fairmount String Quartet


1. Molto Allegro vivace (10:05)



2. Menuetto. Un poco Allegro (06:24)



3. Andante espressivo, ma con moto (06:11)



4. Presto con brio (07:02)




 


◈ Mendelssohn 생애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1809.
2. 3 ~ 1847.11. 4)는 독일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지휘자, 오르가니스트로서 19세기 낭만파 음악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행복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작품도 품위가 있도 명쾌하기만 합니다. 조부는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M.멘델스존입니다. 교양 있는 어머니와 일생 동안 두터운 애정으로 지낸 누이 파니 등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던 그의 어머니 리어는 영문학과 불문학, 이탈리아 문학을 연구하던 여성이어서인지, 멘델스존의 여러 가지 재능은 모계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11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 일찍부터 음악교육을 받아 여러 악기를 다루게 되었고, 그림과 어학에도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괴테와 절친한 보수적 음악가 F.첼터의 지도도 받기도 했습니다.

 

9세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고, 10세 때 작곡을 시작, 17세 때, 관현악곡 "한여름밤의 꿈" 의 서곡을 쓰는 등 매우 조숙한 천재였습니다. 노파심에 쓰는데, "한여름밤의 꿈"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곡입니다. 바로 결혼식장에서 들려주는 '결혼 행진곡'이 바로 그 곡입니다.


18세 무렵 베를린대학 청강생으로 헤겔의 미학 강의도 듣고 또 멘델스존가(家) 음악회에 모이는 베를린의 지식인들과도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29년 베를린의 징 아카데미에서 J.S.바하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마태 수난곡"을 재연하였는데, 이것은 바하 르네상스의 개막을 위한 19세기의 기념비적 연주로 높이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고전적인 형식미에 시적인 낭만적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자유로운 서정미와 환상미를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아름다운 자연 묘사가 작품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상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음악적인 재질은 9세에 이미 연주회의 무대에 설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멘델스존은 작곡가로도 유명해졌지만, 한편 1835년부터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지휘자로서도 크게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곡가로서, 또 연주가로서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코틀랜드 등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활약하여 비록 38세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음악 사상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비해 멘델스존의 생애는 그의 이름인 펠릭스(행운아)에 걸맞게 참으로 행복한 생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혜택받은 결혼과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 좋은 벗들과의 교우 등 남들이 하나 누리기도 힘든 행운을 여럿 움켜잡고서 짧지만 굵은 생애를 보낸 셈이 되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우아한 용모와 세련된 사교성 덕분에 귀족들의 모임에 다투어 초대되었고, 그의 연주회는 항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바흐, 헨델, 베토벤의 감화를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자신만의 진가를 유감없이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9세 때, 처음으로 연주회에 나가 사람들의 갈채를 받은 멘델스존은 예쁜 누이동생과 함께 피아노를 배웠고,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각국의 언어에 능통했고, 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능통해 그의 수채 풍경화의 솜씨는 아마추어의 범주를 벗어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29년 베를린의 징 아카데미에서 J.S.바흐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마태 수난곡"을 재연하였는데, 이것은 바하 르네상스의 개막을 위한 19세기의 기념비적 연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38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간 그를 아쉬워하던 당대 사람들은 그가 너무 많은 재능을 짊어지고 살았기에 요절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고 합니다.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은 유사함 점이 많습니다. 둘 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성을 보였고, 그림 등 다른 분야에서도 상당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던 누이를 두고 있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연주 여행을 끌려 다녔고 철없는 아내를 두어 고생 많은 결혼생활을 한 모차르트에 비해 멘델스존은 부유한 집안 덕분인지 공개 연주를 별로 하지 않았고, 지적이고, 훌륭한 여성과 결혼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도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 것 말고는 흡사합니다. 때문인지 멘델스존의 음악에서는 혁신적인 모습이나 치열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기까지 합니다.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유태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 역시 자신의 모국인 독일을 사랑했고, 독일인답게 사는 것을 큰 긍지로 삼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베를린 음악계는 비록 개종했다고 하지만 유태인의 아들이라고 그를 차별대우했기에 그는 베를린을 떠나 유태인에게 관대한 라이프치히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통 있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음으로써 라이프치히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또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숨겨진 명곡들을 세상에 소개한 공로도 세웠습니다. 실제로 그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 명곡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847년 평생 사이좋게 지내던 누이가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상심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던 멘델스존은 여섯 달 후인 그해 11월 누이의 뒤를 따라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 주요 작품


교향곡 ; "제3번 '스코틀랜드'", "제4번 '이탈리아'", "이탈리아교향곡", "안티고네", "스코틀랜드교향곡"  "한여름 밤의 꿈(서곡 24, 기타 부분 42)",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서곡 ; "핑갈의 동굴"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카프리초 브릴란드"


피아노곡집 ; "무언가(48곡, 29~45)", "엄숙한 변주곡", "오르간곡 소나타 6곡", "전주곡과 푸카 3곡"


오페라 ; "성파울로", "찬미의 노래", "에리야"


무언가 ; "봄의 노래"
 



 

 

멘델스존 7살때 초상화






◈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 사라 장 연주.





출처 : 표주박의 오늘이 마지막이듯
글쓴이 : 표주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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