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
잘나가던 집안이 망하려면 [ 끝 ]
이길 수 없었던 방어전
여타 사회처럼 군부 또한 사람이 모인 집단이다 보니 당연히 알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독일 군부라고 해서 결코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보수적인 독일 군부의 권위를 대표하는 인물인 룬트슈테트와 특유의 지휘 능력에 더해 히틀러의 총애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소장파 롬멜과의 미묘한 대립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둘의 의견 충돌은 개인의 이기심보다 작전의 수립 및 전개에 있어서 벌어진 갑론을박이었다는 점입니다.
[ 룬트슈테트(左)와 롬멜 ]
대립의 핵심은 서부기갑집단으로 대표되는 기갑부대의 운용과 관련한 문제였는데, 당시 이를 놓고 군부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최대한 해안가 가까이에 기갑부대를 배치하여 놓고 있다가 상륙하는 적을 즉시 바다로 밀어붙이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반면 내륙으로 연합군을 최대한 끌어들인 후 기갑부대를 앞세워 일거에 소탕하자는 주장도 있었는데 이들 의견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립하였습니다. 전자를 주장한 사람이 롬멜이었고 반대 측의 대표자가 룬트슈테트였습니다.
[ 붉은 색으로 표시된 기갑부대의 운용에 대해 대립하였습니다 ]
제2차 대전이 중반기를 넘어서면서부터 모든 나라의 모든 지휘관들이 옆에 두고 운용하고 싶어 하였을 만큼 어느덧 기갑부대는 지상군의 핵심전력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공급이 한정된 핵심 전력을 자신의 책임 하에 그리고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습니다. 서류상으로 수직관계에 있었지만 같은 원수 계급에 있던 두 사람 간에 상명하복이 이루어지기 힘들었고 이처럼 의견대립이 팽팽히 나타나고는 하였습니다.
[ 서부기갑집단 소속의 5호전차 팬터 ]
그런데 이와 별개로 정식계통을 넘어 총통에게 직접 의견을 상신하는 행동을 보여 온 롬멜을 평소부터 경원시하던 반대파가 많았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서부기갑집단 사령관 슈베펜부르크였습니다. 그리고 롬멜은 예하인 제7군 사령관 돌만과도 마찰이 있었습니다. 돌만은 1939년 제7군 창설당시부터 사령관이었는데 당시에 롬멜은 일개 사단장이었습니다. 은연 중 롬멜의 고속승진을 못마땅해 하던 돌만은 어느덧 직계 상급자가 되어버린 젊은 원수와 사사건건 대립하였습니다.
[ 롬멜을 극렬히 반대한 슈베펜베르크
하지만 그도 자신의 부대를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
이처럼 서부전선을 제1선에서 방어할 롬멜을 기준으로 전후좌우 지휘계통이 제대로 협조가 이뤄지기 힘든 중구난방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막상 핵심인 기갑부대를 룬트슈테트나 롬멜 모두 지휘할 수 없었고 그것은 서부기갑집단사령관 슈베펜부르크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입니다. 어느덧 독일의 기갑부대는 히틀러의 직접 명령 없이 이동이나 작전투입이 불가능한 별개의 조직이 되어버렸던 것이었습니다.
[ 어느덧 독일의 기갑부대는 총통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따라서 기갑부대를 그렇게도 자신들이 관할 할 수 있도록 줄기차게 요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상륙을 개시한 D-Day 당일 독일의 일선 지휘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자리에서 총통이 빨리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기갑부대를 즉시 이용할 수 없어 독일의 장군들은 연합군을 뻔히 쳐다보면서도 상륙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독일의 전차들은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도 못해보고 돈좌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
단지 결과를 알기 때문에 전사에는 롬멜의 방어 전략이 룬트슈테트의 계획보다 효과적인 계획이었다고 쉽게 판정을 내리지만 설령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갑부대를 이처럼 히틀러가 직접 통솔하였기 때문에 D-Day 당일 상륙거부전을 펼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최고 권력자가 사소한 부분까지 세세히 간섭하고 지휘부간의 알력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던 1944년 6월 서부전선의 독일군 지휘체계는 승리를 달성하기에 너무 힘든 이질적인 모습으로 곪아있었습니다.
[ 1944년 연합군의 상륙성공 이면에는 독일 스스로의 잘못도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
한마디로 정신 나간 선주가 관리하는 사공이 많은 배였고 이렇게 선주가 이상하고 사공이 많다보니 제대로 된 초기대처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실패의 모든 원인이라 단정 할 수는 없지만 겉으로 완벽에 가까웠던 정예독일군이 제대로 상륙거부전을 펼치지 못한 원인이 되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보이는 문제를 제때 고치지 않고 회피만 하려다 잘나가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듯 1944년 6월 독일의 실패는 두고두고 전쟁사의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출처] 잘나가던 집안이 망하려면 [ 끝 ]|작성자 au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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