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잘나가던 집안이 망하려면 [ 1 ]

鶴山 徐 仁 2010. 8. 22. 16:33

august 의 軍史世界

 

잘나가던 집안이 망하려면 [ 1 ]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

 

흔히 역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부르기도 할 만큼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규모가 엄청난 군사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기습이 효과적으로 먹힌 작전으로도 두고두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연합군 입장에서 대성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만큼 적도 아군도 사전에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작전도 드믑니다.

 

[ 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언급되는 노르망디상륙작전 ]

 

1943년이 넘어서면서 연합군도 독일군도 조만간 서부유럽에 제2전선이 구축될 것을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3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노르웨이에서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대서양해변의 어디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인가가 바로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유럽대륙으로 침공을 단행할 연합군도, 반대로 이를 막아야 할 독일군도 모두에게 상당히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였습니다.

 

[ 막상 상륙지점을 예측하는 것은 피아 모두에게 고민이었습니다 (최근의 노르망디 해안가) ]

 

이처럼 분명히 작전의 선택권은 공격을 가할 연합군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사용하기도 매우 곤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상륙에 성공하여 유럽대륙에 교두보를 확보한 이탈리아에서 독일 남부로 향하는 유연한 북진을 계속해서 주장하였던 처칠 (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제1차 대전 당시 갈리폴리의 악몽 ( 관련글 참조 ) 과 1941년 디에프의 참혹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참당한 실패로 끝난 디에프 상륙작전 ]

 

처칠은 영국의 앞 마당에서 그러한 비극이 재현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한사코 거부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던 소련이 국난을 극복하고 1944년이 되어서 오히려 무서운 기세로 독일을 밀어붙이며 유럽의 패권을 쟁취할 것이 확실해보이자 미국이나 영국도 느긋하게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반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항전을 함께 하여왔지만 미국과 영국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결코 끝까지 같이 갈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1944년이 되자 소련군은 독일 본토를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

 

자칫하면 독일 패전 후, 유럽의 신질서 구축과정에서 소련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까지 예견되자 영국도 몽니를 부리며 그들의 앞마당에 제2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미국의 주장대로 독일본토를 최단거리에서 공략할 수 있는 북부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에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영국은 동의하였고 마침내 1944년 6월 6일 전사에 길이 남는 원대한 대작전이 벌어집니다.

 

[ 상륙 당시의 극적인 모습이 담긴 카파의 유명한 사진 ]

 

오버로드작전 (Operation Overload)로 명명된 사상최대 상륙작전의 핵심은 바로 기습이었습니다.  사실 규모의 여부에 상관없이 하드웨어적인 제약 때문에 어떤 상륙작전도 방어군을 일거에 압도할 만한 병력을 순식간에 해안에 상륙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상륙작전의 1차적 관건은 축차적으로 들어올 후속 병력이 안전하게 상륙할 수 있는 안전한 교두보를 얼마나 빨리 확보하고 고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상륙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교두보 확보입니다 ]

 

오늘날이라면 위성 등을 이용한 감시체계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연합군 상륙병력이 영국의 항구에 집결하는 순간부터 독일은 조기경보를 발동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그런 첨단의 정보수집체계가 당시에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규모 부대의 상륙작전 준비를 오래 동안 비밀로 유지하기는 곤란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독일의 감시망에 잡힐 것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연합군은 더더욱 기습을 노려야했습니다.

 

[ 공격을 충분히 예측하고 대비하였던 독일이었지만 방어에 실패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기습적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대병력을 일거에 상륙시켜는 것이 당연히 좋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해상 이동로가 짧아야 했는데, 결국 그 넓은 대서양해변 중 노르망디에서 앤트워프 사이에 있는 해변 중 하나가 예정통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것은 아군은 물론 독일군도 당연히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분명한 사실을 알고 또한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를 하였음에도 독일은 방어에 실패하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