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멸망하자 그 유민의 일부가 일본으로 갔는데, 이 때 그 유민들을 이끈 사람은 고구려의 왕족인 약광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666년에 고구려로부터 파견된 사절의 일행 중에 제2위 현무 약광의 이름이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의 왕족 약광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일본으로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에서 나라를 잃어버린 고구려인들을 이끌고 새로운 삶을 개척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고구려의 후예들이 그를 기리는 신사를 세워서 지금까지 모셔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려신사이다.
고구려 후예들이 남긴 흔적이 지금의 사이타마현 고려향에 남아있는데, 이 유적들을 따라 가보도록 한다.
고려역은 고려향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의 기차역이다. 이곳이 고려향이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고구려의 왕족 약광이 1799명의 고구려인들을 이끌고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했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역 앞에는 장승이 서 있다.
고려역 뒤쪽으로 가면 석기시대 주거지가 있는데, 사이타마현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석기시대 주거지를 나와서 동쪽 방향으로 약 4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건착이 나온다.
건착은 일본말로 킨차꾸라고 하는데, 수건을 걸 수 있는 목아지란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말로 하면 물도리동이나 하회마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지도를 보아 알 수 있듯이 물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짓기에 안성마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은 건착의 강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강물이 왼쪽으로 휘어지면서 둥근 평야를 형성한다.
건착의 전체 모양이다. 해가 지는 곳의 산 밑으로 물이 돌아서 왼쪽으로 나오고, 그것이 이 다리 밑으로 흘러가게 된다.
다리 밑을 돌아 나온 강물이 다시 오른쪽으로 꺾이면서 고려신사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약광은 이곳에서 고구려 후예들을 이끌고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구려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건착에서 동쪽으로 1킬로 정도 떨어진 산기슭 묘소 옆에 신사를 세웠으니 그것이 고려신사와 성천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려신사와 성천원은 원래 고려천역에서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시 고려천 역에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천 역은 고려역에서 동쪽으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신사를 가기 위해서는 보통 이 역에서 출발합니다. 역을 나오면 바로 앞 광장에 조형물이 보이는데, 그것의 맨 위쪽을 보면 그것 역시 장승의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큰 길을 따라서 약 300미터 정도를 서쪽으로 가다 보면 고려신사 가는 이정표가 나오고
그 길을 계속가면 고려천을 건너서 고려신사와 성천원으로 가게 됩니다.
보통 고려신사를 먼저 가는데, 그것보다는 약광의 묘소가 있는 성천원을 들러서 신사로 가는 것이 순서일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사후에 그의 성불을 돕기 위하여 쇼오라쿠지를 지었는데,
이것이 성천원이 되었습니다. 성천원 앞에도 역시 장승이 서있는데, 이곳은 석장승입니다.
성천원 들어가는 입구 문입니다. 이 입구 문 위쪽으로 보면 글씨가 써 있는데,
고려산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성천원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 서 있는 석불상입니다.
좌우에 세 개씩 있는데, 약간 섬뜩한 느낌을 주는 모습입니다.
성천원 들어가는 옆에 약광의 묘소가 있는데, 양마석까지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묘소 옆의 비석에는 고구려왕의 릉이라고 되어 있고, 묘소 내부에는 석탑이 있으며, 위 쪽에는 고려왕 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석탑은 가야의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과 모양이 흡사합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정도를 가면 고려신사 정문이 나옵니다.
위의 사진은 고려신사 정문이고, 아래 사진은 고려신사 중문입니다.
일본 신사의 문은 꼭 이렇게 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중문 바로 왼쪽에는 이곳을 찾은 유명인사들의 명패를 새긴 판이 서 있습니다.
한일회담대표 허정,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최린, 독립운동가이며 공화당 의장이었던 윤치영,
고려대학교 전총장 김준엽, 사물놀이 김덕수 등의 이름이 보입니다.
그전에는 여운형의 성함도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신사 안내문이 있고, 조금더 들어가면 조선시대 최후의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과 그의 부인 방자 여사가 심은 나무 두 그루가 보입니다.
이곳을 지나 들어가면 고려신사 본당이 나오는데, 본당의 위쪽에는 고구려라는 현판이 뚜렷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원래 발음은 고구리인데, 지금은 고구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발음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麗는 곱다는 뜻이 아니라 걸려있다는 뜻의 리로 발음되기 때문입니다. 고구리 혹은 고리라고 읽어야 맞는 발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일본어로는 지금도 고쿠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발음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고구리는 하늘 민족이란 뜻입니다.
신사 본당은 일본의 여느 신사와 다를 것이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본당 옆에는 고구려 직계 후손들이 경영하는 접수처가 있고, 그 건물 안에는 탐방객이 쉬어 갈 수 있는 방이 있습니다. 그 방 안에는 고구려 벽화나 장승, 안내도 등이 걸려 있습니다.
제가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진의 여성은 고구려 벽화의 여인과 닮아 있었습니다.
이곳을 나와서 뒤쪽으로 돌아가면 고구려 후예들이 살았던 집모양을 복원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집의 형태는 일본의 전통가옥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건물의 아래쪽을 보면 주춧돌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문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고려향과 고려역에서부터 시작하여 건착과 성천원, 그리고 고려신사까지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곳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문화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람은 변했지만 문화는 그 흔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어서 1300여년 동안이나 고구려 문화의 맥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이 지역은 일본 선사문화의 중심지이도 한데, 경주의 석굴암에서 정동방향에 위치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석굴암은 태양숭배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태양의 원천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가면서 남겨놓은 흔적들이 바로 일본의 선사문화를 형성했다는 것이 됩니다. 석굴암에서 정동방향으로 일직선을 그으면 일본의 서쪽은 야마구찌라는 곳이 되고, 동쪽은 나리타 공항이 있는 치바 부근이 되는데, 이 일직선상에 남아있는 선사문화는 대부분 한반도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석굴암은 태양숭배사상과 재생의식이 결합된 조형물이라고 보아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을 발견한 일본인들이 석굴암의 본존불을 남쪽으로 7도 가량 틀어놓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미흡하나마 이 사진들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