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는 지난달 '신(新)뉴딜'로 불리는 총 7870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대책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4분의 1이 넘는 2100억달러가 중산층을 위한 세금감면용(用)이다. 실업자 재취업 교육,
저소득층 대학생 자녀 등록금 지원 같은 다른 명목의 재정지출에도 중산층 예산이 꽤 들어 있다.
그걸 다 합치면 중산층 몫은 40%에 가깝다.
오바마 대통령은 작년 대선 기간 중에
"중산층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취임 후엔 조 바이든 부통령을 팀장으로 하는
'중산층 살리기 전담팀'(Middle Class Task Force)을 발족시켰다.
오바마 정부의 중산층 챙기기는 선거공약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넓고 두터운 중산층은
미국 경제의 20년 호황을 지탱해온 성장동력이었다.
그들이 금융·경제위기로 맥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부(富)의 사다리를 어렵사리 기어오르던 중산층은 집을 압류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업이 망해 줄줄이 삶의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들을 다시 붙잡아 일으키지 못하면 미국 경제의 회생도 기대할 수 없다.
미국뿐 아니다. 중산층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 경제, 특히 아시아 경제를 떠받쳐왔다.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와 인터넷이 세계를 '평평한'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묶어놓으면서
러시아·중국·인도 등 아시아의 빈곤층은 대거 중산층으로 올라섰다.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글로벌 신(新)중산층'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 '중산층' 특집에서
"하루 소득이 10~100달러인 계층이 1990년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서
2006년 57%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그 37억명 가운데 60%를 아시아가 차지한다.
이들은 지난 20년간 생산과 소비의 주역으로서 아시아의 세계 GDP 비중을 2.5배로,
수출 비중을 세배로 끌어올렸다. 지금 아시아 경제는
그 든든했던 버팀목이 부러져 나가면서 일제히 사상 최악의 마이너스 성장으로 빠져들었다.
미국발 경제 태풍에 맞서 작년 말 GDP의 16%, 4조위안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던
중국은 다시 2조위안의 추가 경기대책을 준비 중이다.
현지 언론은 실직한 농촌 출신 도시근로자 등
중산층 민심을 달래는 대책이 중심이 될 거라고 전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대만도 GDP의 5~8%에 달하는 재정지출·감세에다
수조원어치 상품권까지 뿌리면서 소비 진작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도 정부·여당에서 30조원 이상 '수퍼 추경(追更)'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숨가쁘게 주저앉는 경기에 대응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나 어디에 얼마나 재정을 풀지 따져보기도 않고 무작정 금액부터 지르고 보는 식의
'대포성 추경'은 곤란하다. 수십조원 적자국채를 더 찍어내
여기저기 엉뚱한 곳에 돈만 퍼주고 경기도 살리지 못하면
그 뒤치다꺼리는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위기에 걸맞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모두가 어렵지만 이럴 때 평상시 복지 정책 펴듯 재원을 고루 배분하는 게
전략적으로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 경제의 허리인 중산층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붕괴 위기에 놓여 있다.
지금은 '한계 중산층'의 추가 붕괴를 막아 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일 때 다른 나라보다
앞서 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을 모아야 한다.
빈곤층으로 굴러 떨어진 중산층의 재기(再起)를 돕는 시스템도 보완해야 한다.
미국처럼 '태스크포스'까지 만들진 않더라도 중산층 살리기에 좀더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 이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