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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AGAIN 살수대첩 [ 7 ]

鶴山 徐 仁 2009. 2. 20. 23:37

august 의 軍史世界

 

AGAIN 살수대첩 [ 7 ]

 

 

 

사창리에서 재현된 악몽

 

솔직히 1.4 후퇴이후 긴급히 재편 된 국군의 질은 형편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병력들은 낙동강까지 밀리는 동안 격렬한 방어전에 투입되어 대부분 사라져 버렸고 반격과 더불어 새롭게 징집된 병사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북진대열에 동참하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병력조차도 후퇴 시 급격히 소모되었고 그나마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병사들도 중공군의 기습때 겪었던 무서운 악몽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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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후퇴 후 긴급 편성 된 병력자원은 질이 떨어졌습니다 ]

 

지휘부 또한 창군이후 제대로 된 훈련도 못한 상태로 공비토벌과 38선 경비에만 매달려 있다가 전쟁에 임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대응능력이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갑자기 등장한 중공군이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자 신속히 대응방법을 찾지 못하여 당황하였고 더불어 상대적으로 미군에 비해 떨어지는 화력도 국군의 무기력증을 더하였습니다.  전선의 중앙을 담당하던 청성부대 또한 전쟁 초기의 자신감은 어느덧 사라지고 초산의 악몽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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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이 구사한 전술에 대한 대응능력이 부족하였습니다 ]

 

1951년 4월 20일 드디어 중공군의 주력이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지점인 광덕산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국군 6사단지역으로 집중되며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됩니다.  미 9군단 소속이었던 청성부대는 지평리전투로 중공군이 잠시 움추려든 틈을 타 김화를 공격하려 하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진격로는 신포리와 사창리를 연결하는 좁은 단일 통로 밖에 없었는데 사창리로 6사단이 진입한 바로 그 순간 중공군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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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진격로 한가운데 청성부대가 놓여있었습니다 ]

 

중공군과 마닥뜨린 6사단은 곤란하게도 험준한 지형으로 인하여 각 예하 연대가 적절히 상호 지원 및 연결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중공군은 지형을 이용하여 청성부대의 간격을 뚫고 은밀히 침투하는데 성공하였고 배치가 완료되자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치열한 야간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청성부대가 공교롭게도 부대 간의 연결이 부실하였던 그날 밤 심리전을 병행한 중공군 특유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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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전을 병행한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

 

한밤 중의 고요를 찢는 꽹과리, 피리, 나팔소리와 더불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적들의 총탄은 순식간에 6사단 장병들을 몇 개월 전의 악몽으로 내몰았습니다.  북진 당시 압록강까지 가장 빨리 진격했던 청성부대가 중공군에게 순식간 퇴로를 차단당하면서 수 없는 고난과 커다란 피해를 입어야 했던 바로 그 순간으로 말입니다.  동시에 공포에 빠진 장병들의 머리 속에는 초산의 끔직했던 기억이 오버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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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개입 초반에 겪었던 악몽이 너무 컸습니다 ]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중공군에게 포위 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병사들로 하여금 싸워 보지도 않고 무조건 도망 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수 시간 만에 포위 망 밖에 있던 예비 연대의 역습기회 마저도 상실한 채 방어선이 붕괴 되었고 청성부대의 급작스런 침몰로 후방에서 화력지원을 하던 미군 포병파견대대가 순식간에 중공군에 포위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까지 연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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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성부대의 붕괴로 후방에서 지원하던 미 포병대마저 포위 되었습니다 ]

 

이러한 6사단의 줄행랑은 서측의 미 1해병사단과 동측의 미 24사단 사이에 대규모의 돌파구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비록 중공군의 기습과 포위의 형태가 초산의 악몽을 떠올리기는 하였지만, 사실 사창리의 전선은 좌우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초산당시와 전혀 달랐습니다.  설령 고립되었다 하더라도 지평리에서의 미 2사단처럼 방어선을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을 하면 전세를 구원 되고 전세를 역전시킬 가능성도 충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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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창리 전투비 (사진출처-kr.blog.yahoo.com/amxnxt) ]

 

그런데 6사단은 초산전투 당시 구원 하여 줄 수 없으니 알아서 후퇴하라던 그 뼈아픈 악몽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청성부대는 사창리전투에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순식간 전의를 상실하여 장비를 내팽겨 치고 중구난방의 철수를 하였던 것입니다.  현지 고수를 엄명한 미 9군단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던 오히려 초산전투 당시보다 못한 오합지졸의 줄행랑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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