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英國史)
'로마인 이야기'가 기원전 3 세기에서 기원 후 5 세기까지 서양을 지배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영국사는 16 세기에 흥륭(興隆)하기 시작하여 20 세기까지 전 세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영국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다. 앞의 책이 글에 천부적인 글 재주가 있는 사람의 로마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책은 불란서의 유명한 소설가가 기록한 영국의 역사이다.
영국이 이룩했던 영역의 크기는 흔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표현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영국은 문화적으로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셰익스피어(1564 - 1616)를 배출하였고, 과학에서는 뉴튼(1642 - 1727)을 낳았다. 그러나 영국 역사의 백미(白眉)는 의회민주주의의 성립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는 다른 나라에서 많은 피를 흘리는 혁명(革命)을 거치면서도 이룩하지 못하였던, 혹은 아직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의회민주주의가 영국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룩되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저자가 불란서 사람이어서 자기 나라가 대혁명(1789 년) 후에 적어도 100 년간 계속되는 혁명의 여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영국이 이룩한 새 정치체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이의 분석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영국 사람은 타민족의 종교에 대해 너그럽지 못하였으며, 앵글로 색슨족은 아직도 지구상에서 가장 인종 차별이 심한 대표적인 종족이고, 식민지 사람들에게 본국과 동일한 권리를 준 적이 없다. 앞서 소개한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한 큰 나라를 이루기에 적합한 조건, 즉 종교에 대한 개방성과 패자에 대한 포용성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이 나라가 어떤 방법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하였는가 하는 것은 영국 역사를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이 찬란한 영광과 다르게 적어도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 - 1603) 초기까지는 왕위 계승이나 왕의 결혼에도 스페인이나 불란서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하는 유럽의 3류 국가였다. 우리 나라 수 천년 역사상 고려시대 원나라에 의해 지배를 받던 때(1264 년부터 80 년 간) 단 한 왕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왕을 다른 나라에서 지명한 일이 없었다.
유럽의 변방의 나라인 영국의 원주민인 이베리아인이 기원전 5 세기 경 켈트족에게 멸망당했다. 켈트족은 기원전 54 년 로마의 '시저 Caesar'에 의해 점령당한다. 이 사실(史實)을 2 차 대전 당시 영국 수상 처칠(1874 - 1965)은 "시저에 의한 침공으로 영국은 역사의 시작이 독일보다 500 년 빠르게 되었고, 독일은 짧은 역사로 인하여 아직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여 1 차, 2 차대전을 일으키는 야만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영국이 시저에 의해 점령당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기원후 400 년 경에 앵글족과 색슨족이 영국을 침입하여 로마화한 켈트족을 모두 죽이거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내쫓는다. 800 년 부근에는 덴마크에 의해 점령되어 그쪽 왕의 통치를 받는다. 1066 년 불란서의 일개(一個) 영주인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여 자기 부하 5000 명에게 영국의 모든 땅을 나누어주어 통치하게 한다. 이 5000 명의 후손이 지금 영국의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이다. 이렇게 계속 점령당한 영국이 자기 나라의 역사를 세계에 자랑하고 있으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묘한 일이다.
그 후 200 년간 영국의 모든 공문서는 라틴어, 또는 불란서 글로 적혔으며, 귀족들은 불어만을 사용하였으므로 상당수의 앵글로 색슨족도 불어를 상용(常用)하여 영어 자체가 크게 변질되었다. 그 전의 영어는 독일어와 비슷하게 격(格) 변화가 있고 문법체계가 갖추어져 있었으나, 그 후의 영어는 글자로 적힌 일이 없고 문법을 알지 못하는 사회의 하층 계급이 주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단음절의 단어가 많이 생겨났으며, 규칙 즉 문법이 거의 없는 말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영어가 배우기 시작할 때는 쉬우나 배울수록 어려워지는 언어가 된 이유이다. 이렇게 귀족과 평민이 종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상태에 있는 나라의 국력이 강할 수가 없다. 이 시기에는 영국의 왕보다 프랑스의 한 지방이며 이 왕조의 기반인 노르만 지방의 영주가 되는 것이 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나라가 어떤 방법으로 발전하여 전 세계의 패권(覇權)을 쥐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된다. 또한 이 패권을 가지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정말로 의회 민주주의인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주제이다.
또한 산업혁명이 왜 영국에서 일어나야 했는가? 즉 중국의 광동에서 많은 양의 직물을 수입하던 영국이 갑자기 중국과 인도에 많은 직물을 수출하게 변화한 원인은 무엇인가? 의회 민주주의와 산업의 발전은 서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 시기의 사람들의 성격은 그 당시의 선진국인 불란서나 스페인과 어떻게 달랐는가? 이런 의문점 또한 영국사를 읽는 재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앞의 로마인 이야기와는 달리 영국의 융성을 몇 개의 단순한 요소로 구성하여 명쾌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상식적으로 보아서 한 민족의 융성의 비결을 몇 마디의 말로 나타내는 것은 오히려 비상식적일 수 있다. 이 책에서 뽑아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다음의 여러 문장은 위의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위의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들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사실을 종합하여 찾아야 할 것이다.
단지 다음에 소개하는 여러 문장은 영국이 '1500 년까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진 국가였는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도록 이 책의 내용에서 뽑은 것이다. 우리의 관념 속에 '선진국'이라는 이름으로 고정화 된 영국이란 나라가 16 세기 초까지 어느 정도의 문화와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실들을 살펴보는데 거의 대부분의 공간을 할애하였다. 우리나라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데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영국에 불리한 역사적인 사실을 의도적으로 여러분 앞에 많이 제시한다. 그러나 영국 학자의 저서들 즉,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혹은 H. G. 웰즈의 '세계 문화 소사'에서 저자들이 동양에 대해 무식하면서도 편견을 가지고 동양을 헐뜯은 것에 비하면 내가 이 책에서 뽑아낸 영국에 대한 불리한 내용들은 사실에 근거하는 지극히 온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앙드레 모로아는 1 차 대전시 장교로 영국군과의 연락 관계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불란서 사람들에게 영국이라는 나라를 알리기 위해 10 년간의 준비를 거쳐 이 "영국사"를 완성했다. 그는 2 차 대전 중에 미국에 체류하였다. 역시 미국에 대한 것을 불란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미국사"를 편찬했다. 이 두 책이 불란서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면서 불란서 사람들은 앙드레 모로아에게 불란서 역사를 써 달라고 제의했다. 그 결과로 "프랑스사"가 나오게 되었다. 소설가가 쓴 것이므로 세 책 모두 좋은 문장으로 되어 있어 읽기가 쉽고, 정치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문학, 사회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어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위의 세 책을 도서출판 기린원에서 우리말로 출판하였다.
좋은 부분
제 1 부 영국의 기원
p 10 제 1 장 영국의 위치
'우리는 대륙에 속하고 있으나 대륙과는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된다.'라는 볼링부르크의 말은 영국의 위치에 대한 본질적인 특성을 잘 정의하고 있다.
영국은 대륙에서 너무 가까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불란서의] 깔레 해변에서는 [영국의] 도버 절벽이 잘 보인다. 이러한 입지 조건이 언제나 침략자를 유혹하게 된다.
영국은 대륙에서 너무 가까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불란서의] 깔레 해변에서는 [영국의] 도버 절벽이 잘 보인다. 이러한 입지 조건이 언제나 침략자를 유혹하게 된다.
영국도 최초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침략을 당했고, 쉽사리 침략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p 16 제 3 장 켈트人
그 후 잉글런드에서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켈트어가 소멸되었다. 몇 가지 용어가 남아 있는데, 짐작컨대 이것은 정복자의 가족이 된 켈트여인들에 의해 보존된 것 같다. 예를 들면 '요람' cradle 같은 가정 용어, 또는 '강' avon, '물' ox 같은 지명에 쓰이는 말들은 켈트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임성삼의 주(註); 유럽에서는 점령을 당한 종족의 남자는 거의 다 살해되었다. 같은 시기인 기원후 5 세기에 프랑스를 점령한 프랑크족도 프랑스에 살던 켈트족 남자들을 몰살시켰다. 500 년 정도 영국에서 살았던 켈트족은 영어에 10 개 정도의 단어를 남기었을 뿐이다.
[임성삼의 주(註); 유럽에서는 점령을 당한 종족의 남자는 거의 다 살해되었다. 같은 시기인 기원후 5 세기에 프랑스를 점령한 프랑크족도 프랑스에 살던 켈트족 남자들을 몰살시켰다. 500 년 정도 영국에서 살았던 켈트족은 영어에 10 개 정도의 단어를 남기었을 뿐이다.
이와 달리 동양의 역사에서는 기원전 7 세기부터 전쟁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점령지의 백성을 자기 국민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 서양의 문화적인 차이가 가장 많은 부분이다.]
훨씬 후일에 켈트어인 clan(씨족), plaid(체크무늬), kilt(치마) 등이 스코틀랜드로부터, 그리고 shamrock(토끼풀), log(원목), gag(재갈) 등이 아일랜드로부터 잉글런드로 재수입되었다.
브레튼 또는 브리튼이란 말은 기원전 325 년에 그리스의 탐험가인 피테아스가 영국에 상륙했을 때 '문신한 사람의 나라' pretanikai nesoi 라고 명명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 영웅에 대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을 비롯한 전투원이 얼굴에 칠을 하고 전쟁에 임한 것은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들은 켈트인이다. '신사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Great Briton의 어원으로는 알맞지 않다. 우리나라에 대한 기록에는 몸이나 얼굴에 칠을 하였다는 사실이 없다. 단지 중국에 월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몸에 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성삼의 주(註);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 영웅에 대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을 비롯한 전투원이 얼굴에 칠을 하고 전쟁에 임한 것은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들은 켈트인이다. '신사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Great Briton의 어원으로는 알맞지 않다. 우리나라에 대한 기록에는 몸이나 얼굴에 칠을 하였다는 사실이 없다. 단지 중국에 월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몸에 칠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p 17 켈트인
가장 존경받았던 계층은 드루이드 druid라는 사제 계급이었고 그들은 인도의 브라만 또는 페르샤의 메이거스 ma gus와 유사한 것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아일랜드에 재현된 단식투쟁은 자신의 의사가 관철될 때까지 상대방의 문 앞에서 단식하는 힌두교도의 수법 dharna을 방북케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인도의 간디 Gandhi와 아일랜드의 맥스위니 간에는 정신적인 유사점이 있다. ... (드루이드 교의) 단 하나의 구절이 전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을 숭상하라. 비열한 행동을 하지 말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라.' 이것은 키플링의 신조와 비슷하다.
가장 존경받았던 계층은 드루이드 druid라는 사제 계급이었고 그들은 인도의 브라만 또는 페르샤의 메이거스 ma gus와 유사한 것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아일랜드에 재현된 단식투쟁은 자신의 의사가 관철될 때까지 상대방의 문 앞에서 단식하는 힌두교도의 수법 dharna을 방북케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인도의 간디 Gandhi와 아일랜드의 맥스위니 간에는 정신적인 유사점이 있다. ... (드루이드 교의) 단 하나의 구절이 전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을 숭상하라. 비열한 행동을 하지 말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라.' 이것은 키플링의 신조와 비슷하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시저의 '갈리아 전기'에는 사제들이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일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p 20 제 4 장 로마인에 의한 정복
군사적으로 강대한 국가의 행동 범위 내에 존재하는 약소 민족이 자유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골 지방을 정복한 로마군이 브리튼을 다음 목표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군사적으로 강대한 국가의 행동 범위 내에 존재하는 약소 민족이 자유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골 지방을 정복한 로마군이 브리튼을 다음 목표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p 29 제 5 장 로마의 후퇴; 기원후 420 년 경의 게르만족의 침입
(현대의 고고학적인 발견) 이러한 고고학적인 발견은 모두가 당시의 절박한 공포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파괴된 가옥과 별장에는 화재의 흔적이 있고 출입구는 황급하게 흙으로 막은 것 같고 관도 없는 백골이 즐비했다.
(현대의 고고학적인 발견) 이러한 고고학적인 발견은 모두가 당시의 절박한 공포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파괴된 가옥과 별장에는 화재의 흔적이 있고 출입구는 황급하게 흙으로 막은 것 같고 관도 없는 백골이 즐비했다.
비드 Bede 신부는 이 침공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고 사제들은 제단 앞에서 살육되었으며, 도망가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나머지는 기아에 못이겨 항복하거나,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일부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바다를 건너 도망했다. 얼마 되지 않는 남은 사람들은 바위 틈이나 숲과 산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켈트인은 서부 산악지대로 도망하여 오늘날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고 사제들은 제단 앞에서 살육되었으며, 도망가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나머지는 기아에 못이겨 항복하거나,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일부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바다를 건너 도망했다. 얼마 되지 않는 남은 사람들은 바위 틈이나 숲과 산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켈트인은 서부 산악지대로 도망하여 오늘날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서양에서는 몽고족이 야만스럽다고 하고 있으나, 몽고족이 점령했던 곳으로 먼저 살던 민족이 넓은 지역에 걸쳐 모두 없어진 경우는 없다. 그러나 아리안족에 의해 점령되었던 곳, 즉 인더스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등 모든 곳의 선주민이 모두 학살되어 종족 자체가 없어졌다. 문명이 이어지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류의 4 대 문명 중 3 대 문명이 그 당시 야만족인 아리안 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집트 문명에 대해서는 약간 고찰할 것이 있다) 이 3 대 문명을 일으킨 종족은 막연히 노란 피부의 사람들이었으며, 아리안 족이 아니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고 자세한 종족은 알지 못한다. 물론 아리안족인 현재의 고고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열심히 연구한 것 같지 않다.]
p 30
'프랑스와 잉글런드에 관한 중대한 사실은 이 지방에 로마의 기념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바로 로마의 기념물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와 잉글런드에 관한 중대한 사실은 이 지방에 로마의 기념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바로 로마의 기념물이라는 것이다.'
p 31 제 6 장 앵글, 주트, 색슨
'새하얀 피부, 장대한 체구, 예리한 푸른 눈, 붉은 색이 감도는 금발, 언제나 게걸스러운 식욕, 독한 술을 즐기고 늦게서야 이성에 눈뜨는 젊은이, 밤낮을 두고 계속 술 마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들인....'
'새하얀 피부, 장대한 체구, 예리한 푸른 눈, 붉은 색이 감도는 금발, 언제나 게걸스러운 식욕, 독한 술을 즐기고 늦게서야 이성에 눈뜨는 젊은이, 밤낮을 두고 계속 술 마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들인....'
색슨인과 앵글인은 성질이 포악했는데 이런 점은 후에도 여전했다. 그들 성격의 특징인 이 포악성을 억제할 목적으로 규정된 엄격한 예의범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켈트인이나 라틴인보다 온화해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침략을 하면 사람의 생명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전쟁을 마치 놀이처럼 여겼다.
'이 천성적인 야만성의 밑바닥에는 그래도 약간의 고상한 성품이 있어서 무엇보다도 경박한 행동에 젖지 않는 성실성이 있고, 여자들은 정절을 지켰으며, 결혼 생활도 순결했다. 일단 수령을 선출하면 그에게 충성을 다했고, 적에게는 잔인했지만 동료에게는 신의를 지켰다. 이 종족은 한 사람의 수령을 받들며 그에게 헌신과 존경을 바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기후가 온화한 지방의 주민에 비해 무서운 자연의 재난을 수없이 경험한 그들은 신앙심도 두터웠다. 장엄하고 침울한 감정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했다.
[임성삼의 주(註); 현재까지도 영국과 독일 그리고 북유럽사람들은 유럽의 남쪽 사람들에 비해 진지하고, 신의있고, 성실하며, 신앙심이 깊다. 이것이 이 나라들이 현대에 선진국이라 불리게 된 이유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겉 모습 속에 포악함이 있다는 것은 20 세기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살해된 5000 만 가까운 사람의 숫자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천성적인 야만성의 밑바닥에는 그래도 약간의 고상한 성품이 있어서 무엇보다도 경박한 행동에 젖지 않는 성실성이 있고, 여자들은 정절을 지켰으며, 결혼 생활도 순결했다. 일단 수령을 선출하면 그에게 충성을 다했고, 적에게는 잔인했지만 동료에게는 신의를 지켰다. 이 종족은 한 사람의 수령을 받들며 그에게 헌신과 존경을 바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기후가 온화한 지방의 주민에 비해 무서운 자연의 재난을 수없이 경험한 그들은 신앙심도 두터웠다. 장엄하고 침울한 감정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했다.
[임성삼의 주(註); 현재까지도 영국과 독일 그리고 북유럽사람들은 유럽의 남쪽 사람들에 비해 진지하고, 신의있고, 성실하며, 신앙심이 깊다. 이것이 이 나라들이 현대에 선진국이라 불리게 된 이유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겉 모습 속에 포악함이 있다는 것은 20 세기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살해된 5000 만 가까운 사람의 숫자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p 34
앵글로 색슨인이 도착했을 때 상륙한 부족들은 이미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결연된 귀족들을 거느린 추장 또는 왕을 받들고 있었다. ...
7 세기에는 영국에 7 개의 왕국이 있었고 8 세기에는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섹스의 3 개 왕국이 잔존했으며 9 세기에 이르러서는 단 하나의 왕국, 웨섹스만이 남게 되었다.
앵글로 색슨인이 도착했을 때 상륙한 부족들은 이미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결연된 귀족들을 거느린 추장 또는 왕을 받들고 있었다. ...
7 세기에는 영국에 7 개의 왕국이 있었고 8 세기에는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섹스의 3 개 왕국이 잔존했으며 9 세기에 이르러서는 단 하나의 왕국, 웨섹스만이 남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결국 우리 나라의 3 국 통일 시기에도 영국은 아직 7 개의 국가로 분할 되었었다. 그 작은 나라가 7 개로 분할되었다면 이것은 부족국가라고 생각한다.]
p 35 이 시기의 앵글로 색슨인의 재판 방법
증인이 없을 때에는 물 판정(피고의 손발을 결박하여 미리 준비된 못에 던져서 수직으로 가라앉게 되면 물이 그를 용납했다 하여 무죄로 삼았다) 또는 불 판정(불에 달군 쇠를 일정한 거리만큼 운반시켜 죄의 유무를 일정한 시일이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 화상을 가지고 판정한다.) 등 가혹한 시련에 의거해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여러 특징은 잔인하고 미개한 사회를 보여 주고 있으나 명예를 존중하는 감정과 강력한 지방 생활의 싹을 내포하고 있는 제도의 사회이기도 하다.
증인이 없을 때에는 물 판정(피고의 손발을 결박하여 미리 준비된 못에 던져서 수직으로 가라앉게 되면 물이 그를 용납했다 하여 무죄로 삼았다) 또는 불 판정(불에 달군 쇠를 일정한 거리만큼 운반시켜 죄의 유무를 일정한 시일이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 화상을 가지고 판정한다.) 등 가혹한 시련에 의거해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여러 특징은 잔인하고 미개한 사회를 보여 주고 있으나 명예를 존중하는 감정과 강력한 지방 생활의 싹을 내포하고 있는 제도의 사회이기도 하다.
[임성삼의 주(註); 기원후 9 세기에 이르러서도 이런 야만적인 재판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보다 천 년 전에도 우리 나라에는 이런 종류의 재판 제도가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의 재판 방법이 그 후에도 살아 남아 16 세기의 마녀 사냥 때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결투의 관습이 이미 역사 이전에 버려졌다. 역사책이나 전해오는 이야기에 결투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1900 년에도 결투가 행해졌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시기까지 결투가 용납되었다. 개인적인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는 관습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가 인류 문화의 발전 과정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결정 짓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p 39
유명한 고전적 일화가 있다. 언젠가 교황이 로마의 노예시장을 지나다가 새하얀 살갗과 금발을 가진 젊은이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브리튼의 앵글인이라고 대답했다. 교황은 '앵글인이 아니라 천사로다' Non angli sed angeli라고 말했다.
[임성삼의 주(註); 앵글인 angli 와 천사 angeli 의 발음이 거의 같기 때문에 유명해진 구절이다.
유명한 고전적 일화가 있다. 언젠가 교황이 로마의 노예시장을 지나다가 새하얀 살갗과 금발을 가진 젊은이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브리튼의 앵글인이라고 대답했다. 교황은 '앵글인이 아니라 천사로다' Non angli sed angeli라고 말했다.
[임성삼의 주(註); 앵글인 angli 와 천사 angeli 의 발음이 거의 같기 때문에 유명해진 구절이다.
같은 유럽사람끼리도 금발에 흰 피부를 가지고 푸른 눈을 하고 있으면 아름답게 느낀다. 그러나 실제 이런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럽 사람은 드물다.]
p 47 제 9 장 덴마크의 침략과 그 결과
787년에 처음으로 북구인의 배 3 척이 '도적의 나라'로부터 영국으로 쳐들어 왔다고 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787년에 처음으로 북구인의 배 3 척이 '도적의 나라'로부터 영국으로 쳐들어 왔다고 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p 53
알프레드는 전설상의 왕이지만 그의 전설은 진실이다.
알프레드는 전설상의 왕이지만 그의 전설은 진실이다.
[앨프레드 Alfred
Aelfred라고도 씀. 별칭은 앨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49~899.
남서부 잉글랜드의 색슨족 왕국인 웨식스의 왕(871~899 재위).
잉글랜드가 데인족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Anglo-Saxon Chronicle〉의 편찬은 그의 재위중인 890년경에 시작되었다.
브리태니커의 첫 부분임. 후에 자세한 내용이 있으나 상당한 분량이어서 생략함]
[임성삼의 주(註); 기원후 800 년의 영국 왕인 알프레드에 대해 역사적인 정확한 기술이 없으므로 전설상의 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잘 알려진 '아서왕 King Arthur 이야기'도 6 - 7 세기의 전설이다.
한 나라의 전설 시대가 어느 연대까지인가도 그 나라의 문화 발달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유태인의 역사에서 '다윗'왕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것은 약 기원전 1,000 년이다. 이때의 기록(구약의 이사야서)은 신화적인 면이 거의 없으며, 높은 정도의 인간성을 포함하고 있다. 로마의 경우 창설자 '로물루스'에 대한 이야기에는 신화적인 면이 상당히 있으나, 기원전 500 년 경 공화제가 이루어 진 이후에는 신화성적인 기술이 없어진다. 그리스의 경우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신화적인 면이 없어진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000 년 주나라 건립 이후에 신화성이 없어진다. 유태인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우리 나라는 박혁거세, 혹은 주몽 이후 곧 신화성이 없어진다고 본다.
그러나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에서는 기원후 1,000 년이 되어야 신화적인 이야기가 없어진다.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가장 뒤떨어진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의 신화에서 좋은 점을 찾자면 형성된지 오래지 않은 신화라서 매우 생생한(real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형성되었으므로 오래 전해오면서 단순화된 우리나라의 신화보다 명확하고, 구성이 약간 복잡하다. 또한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상당히 발전된 문장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형성된 신화이므로 문학작품으로 남기가 매우 쉽다. 아마 그리스의 신화도 이집트나 오리엔트의 문장을 빌어 완전한 형태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p 55
알프레드는 전쟁과 재난으로 황폐한 이 나라에 학문을 진작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알프레드는 전쟁과 재난으로 황폐한 이 나라에 학문을 진작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내가 이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기도서를 영어로 번역할 만한 사람이 템즈강 이남에는 없었던 것 같다.'
[임성삼의 주(註); 기원후 1200 년에의 영국의 일반적인 사제들도 예배의 공용어인 라틴어를 잘 읽지 못하였고, 보통의 귀족들 역시 글을 못 읽었다. 참고; 유명한 소설 '아이반호'에 이 사실이 나옴]
[임성삼의 주(註); 기원후 1200 년에의 영국의 일반적인 사제들도 예배의 공용어인 라틴어를 잘 읽지 못하였고, 보통의 귀족들 역시 글을 못 읽었다. 참고; 유명한 소설 '아이반호'에 이 사실이 나옴]
p 57
(영국왕이 덴마크에 대항하다) 전사한 후 절망에 빠진 현인회의는 23세의 젊은 군대장인 덴마크왕의 동생 커누트에게 왕관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다. 커누트는 엄격하고 잔인한 적이었으나 한편 이지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외국인은 진정한 영국왕이 되려고 노력했다.
(영국왕이 덴마크에 대항하다) 전사한 후 절망에 빠진 현인회의는 23세의 젊은 군대장인 덴마크왕의 동생 커누트에게 왕관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다. 커누트는 엄격하고 잔인한 적이었으나 한편 이지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외국인은 진정한 영국왕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곧 영국인과 데인인[덴마크 사람]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적수였던 에드먼드왕을 배반한 귀족 일당을 '자기의 주인을 배반한 놈들이 어찌 나의 충실한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사형에 처했다.
[임성삼의 주(註);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정의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
[임성삼의 주(註);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정의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
p 61 제 11 장 노르만 정복
커누트왕이 죽은 후 색슨왕의 정통적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는 현인회의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극단적인 신앙 때문에 참회왕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커누트왕이 죽은 후 색슨왕의 정통적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는 현인회의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극단적인 신앙 때문에 참회왕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p 62
'애비없는 자식' 윌리엄공은 로베르공과 팔레즈에 사는 피혁업자의 딸 아를레따 사이에 출생한 사생아였다. 그는 부친의 인지를 받고 그 뒤를 이었다.[노르만 공이 되었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미성년인데다 사생아인 그를 몹시 괴롭혔으므로 그의 인간수업은 매우 험난했다. 이러한 시련을 겪는 동안 그는 훌륭한 통치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멘느 지방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애비없는 자식' 윌리엄공은 로베르공과 팔레즈에 사는 피혁업자의 딸 아를레따 사이에 출생한 사생아였다. 그는 부친의 인지를 받고 그 뒤를 이었다.[노르만 공이 되었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미성년인데다 사생아인 그를 몹시 괴롭혔으므로 그의 인간수업은 매우 험난했다. 이러한 시련을 겪는 동안 그는 훌륭한 통치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멘느 지방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p 63
윌리엄이 영국의 왕위를 요구한다는 것은 계보로 따진다면 전혀 근거 없는 일이었다. 그는 참회왕 에드워드와 대고모가 같다는 것뿐이었고 게다가 그는 서자였다. 뿐만 아니라 11세기에 영국의 왕위는 현인회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선출제였던 것이다.
윌리엄이 영국의 왕위를 요구한다는 것은 계보로 따진다면 전혀 근거 없는 일이었다. 그는 참회왕 에드워드와 대고모가 같다는 것뿐이었고 게다가 그는 서자였다. 뿐만 아니라 11세기에 영국의 왕위는 현인회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선출제였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유럽의 역사에서 이렇게 선출되는 왕은 완전한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
p 64
윌리엄은 국제적인 강도행위를 하나의 성전(聖戰), 특히 이득이 많은 성전으로 전환시키는 비상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다. ...
5, 6천 명의 기병을 포함한 1만 3천 - 1만 5천 명의 병력(을 영국 정벌을 위해 준비하였다.)
기어코 그는 1066 년 성탄절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왕관을 썼다.
[임성삼의 주(註); 1066 년 영국을 점령하는 데 1만 5천 명의 병력이 사용되었다. 참고로 1018 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왔을 때 강감찬 장군은 우리 군사 20만 8천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나는 적의 두 배의 병력을 준비하여, 우리 군대의 희생을 최소로 하며 침입군을 무찌른 이 전투가 가장 자랑스럽다.
윌리엄은 국제적인 강도행위를 하나의 성전(聖戰), 특히 이득이 많은 성전으로 전환시키는 비상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다. ...
5, 6천 명의 기병을 포함한 1만 3천 - 1만 5천 명의 병력(을 영국 정벌을 위해 준비하였다.)
기어코 그는 1066 년 성탄절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왕관을 썼다.
[임성삼의 주(註); 1066 년 영국을 점령하는 데 1만 5천 명의 병력이 사용되었다. 참고로 1018 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왔을 때 강감찬 장군은 우리 군사 20만 8천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나는 적의 두 배의 병력을 준비하여, 우리 군대의 희생을 최소로 하며 침입군을 무찌른 이 전투가 가장 자랑스럽다.
우리나라가 이 시기에 유럽에 있었다면 영국, 프랑스, 독일을 다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제 2 부 프랑스계 왕조
p 71 제 1 장 노르만 정복의 성과 : 중앙정부
정복과 분배가 끝나자 토지 영유자와 점령 수비대를 겸한 약 5000 명의 노르만 기사가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충성을 바친 영국인은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모든 요직을 노르만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정복과 분배가 끝나자 토지 영유자와 점령 수비대를 겸한 약 5000 명의 노르만 기사가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충성을 바친 영국인은 프랑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모든 요직을 노르만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현재의 인도나 모로코에 있어서와 같이 당시에도 한 나라에서 두 언어가 사용되었다. 지배계급인 궁정 영주나 법관들은 프랑스어를, 고위 성직자는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했고 9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노르만왕들이 사용한 고대 프랑스왕들의 고대 프랑스어의 관용 서식이 아직도 영국에서 사용되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나의 귀에는 현재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연설에서 약간의 프랑스어 억양이 들린다.]
왕과 영주의 지방 관리인은 일반인이 색슨어를 쓰고 있었으므로 프랑스어와 색슨어를 공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300 년 동안 영어는 고유의 문학과 문법을 가지지 못한 채, 회화용, 그것도 일반인의 회화용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영어는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왜냐하면 언어에 있어서는 상류계급만이 보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언어가 기록되지 않으면 대단히 빨리 변화한다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알 수 있다. 그곳에 10 년을 살아 그곳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던 우리나라 선교사가, 두 해 정도 우리 나라에 돌아와 있다가 다시 아프리카에 가면 그동안 언어가 많이 변화하여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학자들이 사용한 그 전의 색슨어는 복잡한 어미변화를 하는, 격(格)을 가진 게르만어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일반인은 만사를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어 영어도 품위라는 제약에서 해방되어 놀랄 만한 유연성을 가지게 되었다.
교양이 없는 사람이나 외국인이 발음을 하면 단어의 액센트가 있는 음절만이 남게 된다. 이리하여 대단히 많은 단음절어가 생기게 되어, 이 단음절어가 영시(英詩)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이 표현이 칭찬처럼 보이나 칭찬이 아니다.]
색슨과 데인의 농민은 그들의 주인과 접촉하는 동안 몇몇 프랑스 단어를 배워, 이것이 거의 원형대로 영어가 되었다. 종교용어에는 수도원장 prieur→prior, 예배당 chapelle→chapel, 미사 messe→mass, 자선 charite→charity, 은총 grace→grace 등, 군사 용어에는 탑 tour→tower, 군기 etandard→standard, 성 chateau→castle, 평화 paix→peace 등, 그리고 궁정 cour→court, 왕관 couronne→crown, 회의 conseil→council 등이 있고, 감옥 prison과 사법 justice이란 단어는 영, 불어가 동일한 만큼 양자간의 행정관계가 얼마나 밀접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preux라는 단어의 운명이다. 이 말은 프랑스어로는 '용감한 기사'란 뜻인데 영어로는 '오만한'이라는 뜻의 proud라는 단어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한 쪽에서는 주인으로서, 다른 한 쪽에서는 하인으로서 본 데서 생겨난 같은 말인 것이다.
인간의 행위의 결과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영어의 침체가 도리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빚어 냈듯이 노르만 정복은 영국의 자유의 시발점이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책에서는 영국의 자유가 이중적인 사회체제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p 73
노르만 정복은 과거와의 관계를 무자비하게 단절하지는 않았다. 단절하려 했어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장이 아무리 우수했다 해도 5000 명 밖에 안되는 소수가 적국민에게 과거 수 세기를 내려온 관습을 포기하라고 명령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르만 정복은 과거와의 관계를 무자비하게 단절하지는 않았다. 단절하려 했어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장이 아무리 우수했다 해도 5000 명 밖에 안되는 소수가 적국민에게 과거 수 세기를 내려온 관습을 포기하라고 명령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p 81
정복과 노르만인에 대한 영국 원주민의 가장 심각한 불만의 하나는 왕유림의 창설이었다. 노르만디공이던 당시, 이미 정복왕 윌리엄은 사슴과 산돼지 사냥을 하기 위한 광대한 삼림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왕이 되자 그는 이 오락을 계속하기 위해 수도 윈체스터 근방에 새로운 숲을 만들었는데,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60개의 촌락과 광대한 농지와 교회당을 파괴하고 수 천명의 주민을 몰락하게 했다고 한다. ... 다음 세기에는 왕유림(王有林)이 전 국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고, 이 삼림을 가혹한 법으로 보호했다. 윌리엄 시대에는 왕유림에서 사슴을 한 마리 잡으면 두 눈을 뽑았다. 산돼지, 토끼를 잡으면 사지 절단, 그 후에는 왕유림에서 사슴을 죽이면 교수형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내용이 '로빈 훗'의 배경이다. 영국은 1800 년에도 상당히 엄격한 법률을 가지고 있었다. 디킨즈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배경이 되는 이 시대에 손수건 하나를 훔치는 것은 경죄(輕罪)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이 가벼운 죄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정복과 노르만인에 대한 영국 원주민의 가장 심각한 불만의 하나는 왕유림의 창설이었다. 노르만디공이던 당시, 이미 정복왕 윌리엄은 사슴과 산돼지 사냥을 하기 위한 광대한 삼림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왕이 되자 그는 이 오락을 계속하기 위해 수도 윈체스터 근방에 새로운 숲을 만들었는데,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60개의 촌락과 광대한 농지와 교회당을 파괴하고 수 천명의 주민을 몰락하게 했다고 한다. ... 다음 세기에는 왕유림(王有林)이 전 국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고, 이 삼림을 가혹한 법으로 보호했다. 윌리엄 시대에는 왕유림에서 사슴을 한 마리 잡으면 두 눈을 뽑았다. 산돼지, 토끼를 잡으면 사지 절단, 그 후에는 왕유림에서 사슴을 죽이면 교수형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내용이 '로빈 훗'의 배경이다. 영국은 1800 년에도 상당히 엄격한 법률을 가지고 있었다. 디킨즈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배경이 되는 이 시대에 손수건 하나를 훔치는 것은 경죄(輕罪)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이 가벼운 죄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p 107 제 6 장 헨리 2세의 왕자들
헨리 2세(1133∼1189)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그가 기꺼이 그의 제국을 분할해 준 왕자들은 서로 증오하고 모두가 왕을 배반했다. 한 아들은 왕의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가문에는 형제가 서로 싸우고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 조상으로부터의 유전으로서 우리 핏줄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알 것이다.'
헨리 2세(1133∼1189)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그가 기꺼이 그의 제국을 분할해 준 왕자들은 서로 증오하고 모두가 왕을 배반했다. 한 아들은 왕의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가문에는 형제가 서로 싸우고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 조상으로부터의 유전으로서 우리 핏줄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알 것이다.'
P 108
프랑스 왕과 아들 리차드에 쫓겨 르 망스 Le Mans[임성삼의 주(註); 대우의 자동차 르망의 이름이 나온 도시]에 포위된 헨리 2 세는 자기의 출생지이며 부친 앙주 백작의 묘소가 있는 화염충천하는 이 도시로부터 패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도망하면서 신을 원망했다. 왕이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좁은 오솔길로 도망가는데 아들인 리처드 자신이 이를 추격했다. ... 국새상서가 영국의 반역자 명단을 가지고 돌아왔다. 명단 첫 번째에는 사랑하는 아들 존의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의 위치가 위험해지자 그도 배반한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짐은 자신의 일도 세상의 일도 이제는 생각할 기력조차 없다'고 외친 후 혼수 상태에 빠졌고, 심한 출혈로 드디어 별세했다.
프랑스 왕과 아들 리차드에 쫓겨 르 망스 Le Mans[임성삼의 주(註); 대우의 자동차 르망의 이름이 나온 도시]에 포위된 헨리 2 세는 자기의 출생지이며 부친 앙주 백작의 묘소가 있는 화염충천하는 이 도시로부터 패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도망하면서 신을 원망했다. 왕이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좁은 오솔길로 도망가는데 아들인 리처드 자신이 이를 추격했다. ... 국새상서가 영국의 반역자 명단을 가지고 돌아왔다. 명단 첫 번째에는 사랑하는 아들 존의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의 위치가 위험해지자 그도 배반한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짐은 자신의 일도 세상의 일도 이제는 생각할 기력조차 없다'고 외친 후 혼수 상태에 빠졌고, 심한 출혈로 드디어 별세했다.
세상에서 정치가라고 숭상하던 인물[헨리 2 세]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방랑기사였다. 일부로부터는 '사자의 심장' Coeur de lion [임성삼의 주(註); Lichard, the Heart of Lion, 사자심왕 리처드로 로빈후드의 이야기에 대단히 좋은 왕으로 나온다. 소설 '아이반 호우'에서도], 혹은 '예스 아니면 노의 리처드' Richard Yea-and-Nay라고 불린 리처드 1 세는 부친의 성질과 플랜태지니트 혈통의 특유한 격정을 물려 받아 여색에 대한 무한함 탐닉과 용감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 그의 일생은 횡포와 분노의 광란같은 것이었다.
p 112
그의 신하인 리모주 자작이 샬뤼성 근방의 밭에서 로마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황금 장식품을 발견했는데, 리처드는 모든 재물은 국왕의 소유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요구했다. 이 대수롭지 않은 분쟁이 전쟁으로 발전하여 샬뤼성을 포위하고 있던 동안에 리처드는 화살에 맞아 그 상처가 덧나서 1199 년 4 월 6 일 군대 막사에서 사망했다. ... 그는 '나쁜 자식, 나쁜 형제, 나쁜 남편, 나쁜 국왕'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리처드를 평가할 때는 그의 전설, 인기, 그리고 국민의 충성을 참작해야 한다.
그의 신하인 리모주 자작이 샬뤼성 근방의 밭에서 로마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황금 장식품을 발견했는데, 리처드는 모든 재물은 국왕의 소유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요구했다. 이 대수롭지 않은 분쟁이 전쟁으로 발전하여 샬뤼성을 포위하고 있던 동안에 리처드는 화살에 맞아 그 상처가 덧나서 1199 년 4 월 6 일 군대 막사에서 사망했다. ... 그는 '나쁜 자식, 나쁜 형제, 나쁜 남편, 나쁜 국왕'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리처드를 평가할 때는 그의 전설, 인기, 그리고 국민의 충성을 참작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설에서는 대단히 좋은 왕으로 숭앙받는다.]
p 113 제 7 장 대헌장 Magna Carta
헨리 2세와 리처드에게는 위대한 인간성이 있었으나 존[John Landless 실지왕(失地王) 존; 로빈훗에서 섭정으로 나오며 나쁜 사람으로 설정된다. 이 존 왕(王)이 대헌장에 서명하는 주인공이다.]에게는 추악한 성품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 존의 교묘한 작전에도 불구하고 1204 년에 노르만디는 프랑스에 수복되었고, ... 헨리 2세 사후 10 년이 경과하게 되자 앙주가의 제국은 거의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헨리 2세와 리처드에게는 위대한 인간성이 있었으나 존[John Landless 실지왕(失地王) 존; 로빈훗에서 섭정으로 나오며 나쁜 사람으로 설정된다. 이 존 왕(王)이 대헌장에 서명하는 주인공이다.]에게는 추악한 성품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 존의 교묘한 작전에도 불구하고 1204 년에 노르만디는 프랑스에 수복되었고, ... 헨리 2세 사후 10 년이 경과하게 되자 앙주가의 제국은 거의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임성삼 주(註); 이 왕국의 본거지인 노르만디 지방을 잃게 되었다.]
p 115
왕은 스테인즈와 윈저 중간에 있는 러니미드 초원에서 귀족들과 회동하기를 승낙하고 그곳에서 대헌장 Great Charter, Magna Carta에 서명했다.
왕은 스테인즈와 윈저 중간에 있는 러니미드 초원에서 귀족들과 회동하기를 승낙하고 그곳에서 대헌장 Great Charter, Magna Carta에 서명했다.
'여기에 국법이 있고 공동단체에 소속될 권리가 있다. 왕은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 왕이 이것을 위반하면 충성의 의무는 해소되고 신민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p 116
[임성삼 주(註);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권리이다. 단 반란에서 질 경우 생명을 보장하는 문서는 아니다.]
'자유민은 귀족의 합법적인 판결 또는 국법이 결정한 바에 따르지 않고서는 구속, 추방 기타 여하한 제재도 받지 않는다' p 117
[임성삼 주(註); 실제로는 귀족 마음대로 하는 정치이다.]
존왕은 대헌장을 승인한 그 순간부터 이것을 모면할 궁리만 했다. 그는 나무 조각을 씹으면서 땅에 딩굴 정도로 격분했다.
'그들은 25 명의 왕을 나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외쳤다.
얼마 후에 그는 다시 교활한 이중 외교수단을 행사해서, 이미 화해한 바 있는 교황 이노센트 3세에게 접근하여 그 지긋지긋한 대헌장을 준수하겠다고 한 서약을 해제해 주기를 요망했다. 교황은 자기가 선임한 대주교가 선동한 무기반란에 대하여 격분하고 있던 터이라 런던 시민을 파문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은 랭튼의 권고에 따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회의 종을 치고 미사도 거행했다. ... 존은 1216 년 10 월 19 일에 복숭아와 덜익은 사과술을 과식한 끝에 사망하게 되었다.
p 120 제 8 장 공동체 I : 도시와 동업조합
가옥은 작고 도로는 협소했다. 초가지붕이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했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최초로 런던에 공공급수장이 생긴 것은 12 세기였고 일반 시민은 물 대신 맥주를 먹었기 때문에 이 물은 주로 빈민에게 제공되었다.
가옥은 작고 도로는 협소했다. 초가지붕이기 때문에 화재가 빈번했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최초로 런던에 공공급수장이 생긴 것은 12 세기였고 일반 시민은 물 대신 맥주를 먹었기 때문에 이 물은 주로 빈민에게 제공되었다.
오물을 길거리에 버렸기 때문에 악취가 대단했고, 때때로 발생하는 전염병은 인구의 일부를 앗아갔다. 모든 도시는 반촌락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런던에까지도 성내에 야채밭이 있었고, 시장은 거듭 일반인에게 돼지를 길가에 내놓지 말라는 명령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임성삼 주(註); 위의 오물은 분뇨(糞尿)를 말한다. 집에 화장실 없었으며 요강을 사용하고, 밤중에 이층 창문에서 길가에 쏟았다고 한다. 버릴 때는 큰 소리로 lo(보시오!)라고 외쳤다 한다. 어떤 책에 의하면 이 lo는 불란서 말의 l'eau(발음은 lo와 동일, 물)로 "물이요"라는 뜻이다.
이런 풍습이 거의 18 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밤에 도시의 길을 걸을 때는 분뇨에 맞지 않기 위해 조심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한심한 분뇨 처리 방법이었다.]
p 126
13 세기에는 일반은 거의 무지했고, 심지어 무식한 성직자도 적지 않았다. 1222 년에 랭튼 대주교는 각 주교관구 내의 성직자들에게 시험을 보게 해서 과연 그들이 성서를 이해하고 있는가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각 주교에게 하달했다. 솔즈버리 수도원장 윌리엄의 보고를 보면 진상은 개탄할 만했다. ...
13 세기에는 일반은 거의 무지했고, 심지어 무식한 성직자도 적지 않았다. 1222 년에 랭튼 대주교는 각 주교관구 내의 성직자들에게 시험을 보게 해서 과연 그들이 성서를 이해하고 있는가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각 주교에게 하달했다. 솔즈버리 수도원장 윌리엄의 보고를 보면 진상은 개탄할 만했다. ...
1316 년 루이 드 보몽이 더햄의 주교가 되었을 때, 그는 라틴어를 몰랐다. 축성식(취임식) 석상에서 그는 신앙 성명서를 읽지 못했다. metropolitanus라는 말에 걸려 몇 번 읽으려다 되지 않으니까 프랑스어로 '읽은 것으로 합시다'라고 외쳤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임성삼 주(註); 소설 "아이반 호우"에서도 나오지만 이 시대의 귀족, 성직자들은 거의 쓰고 읽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존 왕이 자기 이름을 적을 줄 몰랐으므로 대헌장에 한 서명도 그저 x 자를 그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788 년 신라시대에 독서출신과로 시작된 과거 제도에 의한 인재의 등용으로 이런 무지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유럽에서는 시험에 의한 인재의 등용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필기시험 없었다. 필요한 경우 간단한 구술(口述) 시험에 의하여 사람을 뽑아 썼다. 이것이 현재의 유럽이나 미국 대학의 구술 시험의 기원이다. 유럽에서는 1800 년대 말에 중국의 과거제도에 대한 연구에 의해 필기 시험이 시작되었다.]
p 139 제 11 장 헨리 3 세와 시몽 드 몽포르
이제는 노르만 귀족들의 자제도 영어만 배우게 되고 영국인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1272 년]
1066 년부터 1272년 간의 시기는 영국 역사상 가장 성과가 많은 시기의 하나였다.
이제는 노르만 귀족들의 자제도 영어만 배우게 되고 영국인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1272 년]
1066 년부터 1272년 간의 시기는 영국 역사상 가장 성과가 많은 시기의 하나였다.
제 3 부 봉건제도의 성쇠
p 166 제 5 장 흑사병과 그 결과
흑사병은 아시아로부터 침투되어 1347 년에 키프러스 섬을 맹타했다. 1348 년 1 월에는 프랑스 아비뇽에, 8 월에는 영국의 도세트 해안으로부터 내륙지방인 데븐과 서머세트에까지 만연했다. ... 아마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약 2500 만명이 사망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특히 이 병이 지속적이었다. 1349 년에 어느 정도 종식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다시 맹위를 떨쳐 영국의 인구는 약 250 만으로 감소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심각한 경제변동을 초래했다. 공유경작지가 전보다 더 적은 사람들에게 배정되었으므로 농민 계급은 부유하게 되었다. ...
전국적으로 흑사병 이후 2, 3 년 동안에 농업임금은 남자가 50%, 여자는 100%나 상승했다.
[임성삼의 주(註); 아시아에서는 이렇게 심한 전염병이 만연한 적이 없었다. 유럽의 500 년에서 1500 년 사이는 실로 암흑시대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1 년에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았으며, 하수도가 없어 집안의 허드렛물이나 심지어 요강까지도 길에 버렸다. 쓰레기 수거 시스템도 없었다. 그 결과가 흑사병의 만연이었다. 게르만족에게는 그 전(前)인 로마시대의 급수, 하수 시스템, 대중 목욕탕 등을 배울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제 4 부 튜더왕조 또는 군주정치의 승리
p 247 1558 년 11 월 17 일 엘리자베스 즉위
엘리자베스는 부왕이나 할아버지왕처럼 극소수의 친위대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런던의 일부 민병만 가지고도 완전히 격파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였다. 그녀는 단지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강력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침공이 박두하자 그녀가 불러들인 것은 원수나 군사령관이 아니라(군대가 없으니 사령관이 있을 리 없었다) 런던 시장이었다. 15 척의 선박과 5000 명의 군대를 요청했더니 런던 시티는 30 척의 함선과 1만 명의 군대를 제공하겠다고 전해 왔으며 전국적으로 이와 같은 충성이 쇄도했다.
[임성삼 주(註); 이정도의 병력으로 유럽의 바다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이 당시 유럽의 힘이 매우 작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엘리자베스는 부왕이나 할아버지왕처럼 극소수의 친위대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런던의 일부 민병만 가지고도 완전히 격파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였다. 그녀는 단지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강력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침공이 박두하자 그녀가 불러들인 것은 원수나 군사령관이 아니라(군대가 없으니 사령관이 있을 리 없었다) 런던 시장이었다. 15 척의 선박과 5000 명의 군대를 요청했더니 런던 시티는 30 척의 함선과 1만 명의 군대를 제공하겠다고 전해 왔으며 전국적으로 이와 같은 충성이 쇄도했다.
[임성삼 주(註); 이정도의 병력으로 유럽의 바다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이 당시 유럽의 힘이 매우 작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p 273
프랑스인의 지혜가 몽떼뉴나 라 브뤼에르 같은 모랄리스트의 덕택인 것처럼
프랑스인의 지혜가 몽떼뉴나 라 브뤼에르 같은 모랄리스트의 덕택인 것처럼
영국인의 본능적, 시적, 동적인 지혜는 셰익스피어의 덕택이다.
[임성삼의 주(註); 실제로 한 문학자의 힘이 이 정도로 클 수 있을까?
[임성삼의 주(註); 실제로 한 문학자의 힘이 이 정도로 클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포크, 스푼 등 식사 도구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이런 것이 없어 맨 손으로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이나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도 식사하는 장면이 거의 안나오는 이유도 그들이 맨손으로 식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 세도 평생 맨 손으로 식사했다.
이 자체는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나, 영국인이 쓴 책에 아프리카나 중동 사람들이 맨 손으로 식사하는 것을 미개인의 표시인 듯이 적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서양의 식사 예절이 가장 뛰어난 것인 양 적는 경우가 많아 위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다. 사실상 유럽의 식사 방법과 차례 등은 기원후 750 년 경 스페인과 프랑스에 침입했던 아랍인들이 전해준 것이다. 이 때 여러 가지 예절도 함께 배워주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아랍인은 지금도 맨 손으로 식사를 하므로 식사 도구에 대한 것은 전해주지 못했다.]
제 5 부 의회의 승리
[임성삼 주(註); 이 이후는 몇 줄의 글로 내용이 대표될 수 없다. 이 5 부를 이루고 있는 여러 장의 제목을 열거함으로 대체적인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임성삼 주(註); 이 이후는 몇 줄의 글로 내용이 대표될 수 없다. 이 5 부를 이루고 있는 여러 장의 제목을 열거함으로 대체적인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제 2 장 국왕과 의회의 충돌
제 4 장 의회없는 국왕
제 5 장 장기의회
제 6 장 내란의 시작
p 319
크롬웰의 신앙은 경건했으나 명랑하지는 못했다. 그는 우울했고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으며 생애의 일부를 신비적인 교령(交靈)상태에서 보냈다. 그는 영국인으로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감격파였고 툭하면 눈물을 잘 흘렸다. 크롬웰은 자기의 신조를 수호하는 데는 엄격했으나, 순결한 정신으로 생활하는 미천한 크리스천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기울였다.
[임성삼의 주(註); 나는 크롬웰이 자기의 이념(理念)과, 선(善), 정의(正義)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한 고결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크롬웰의 신앙은 경건했으나 명랑하지는 못했다. 그는 우울했고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으며 생애의 일부를 신비적인 교령(交靈)상태에서 보냈다. 그는 영국인으로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감격파였고 툭하면 눈물을 잘 흘렸다. 크롬웰은 자기의 신조를 수호하는 데는 엄격했으나, 순결한 정신으로 생활하는 미천한 크리스천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기울였다.
[임성삼의 주(註); 나는 크롬웰이 자기의 이념(理念)과, 선(善), 정의(正義)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한 고결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제 7 장 군대와 의회의 대결
제 8 장 크롬웰의 집권
제 8 장 크롬웰의 집권
p 314
[국왕과 싸우기 위한 의회군의] 군대 경비는 이번 혁명의 주요 원인이었던 찰즈 2 세의 선박세의 100 배나 되는 막대한 액수였다.
[임성삼 주(註);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세금이 과중(過重)하여 혁명을 일으키나, 혁명의 과정에 파괴된 것은 계산하지 않고도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의 세금의 액수가 그 전보다 100 배나 더 커져 있는 경우이다. 현대의 국가에서는 인플레이션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은본위제였으므로 실제 납부 액수가 올라간 것이다.]
[국왕과 싸우기 위한 의회군의] 군대 경비는 이번 혁명의 주요 원인이었던 찰즈 2 세의 선박세의 100 배나 되는 막대한 액수였다.
[임성삼 주(註);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세금이 과중(過重)하여 혁명을 일으키나, 혁명의 과정에 파괴된 것은 계산하지 않고도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의 세금의 액수가 그 전보다 100 배나 더 커져 있는 경우이다. 현대의 국가에서는 인플레이션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은본위제였으므로 실제 납부 액수가 올라간 것이다.]
1653 년 4 월 20 일, 대통수(大統帥) 크롬웰은 하원으로 들어가서 자기 의석에 자리잡았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그만, 나는 당신들의 수다스러움에 끝장을 내야겠다. 당신들은 이제 의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의회는 그만이다. 당신들 중에는 유곽의 포주도 있고 술주정뱅이도 있다. 부정하거나 아니면 부패한 사람들이다. ... 당신들은 의원으로서 참석할 자격이 없다."
"그만, 그만, 나는 당신들의 수다스러움에 끝장을 내야겠다. 당신들은 이제 의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의회는 그만이다. 당신들 중에는 유곽의 포주도 있고 술주정뱅이도 있다. 부정하거나 아니면 부패한 사람들이다. ... 당신들은 의원으로서 참석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하원 권력의 신성한 상징인 의사봉을 들고 "이 지저분한 물건을 어떻게 한다?"고 하면서 직원을 불러 갖다 버리라고 고함쳤다. 의원을 전부 축출하고 나서 출입문을 잠갔다. 군인 하나가 열쇠와 의사봉을 가지고 나갔고 장기의회는 그 누가 말했듯이 꿈처럼 소리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임성삼 註; 왕의 횡포에 대항하여 의회가 무력으로 대항하였고, 의회의 대장으로서 왕과 싸워 왕을 사로잡아 사형에 처한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할 때의 광경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임성삼 註; 왕의 횡포에 대항하여 의회가 무력으로 대항하였고, 의회의 대장으로서 왕과 싸워 왕을 사로잡아 사형에 처한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할 때의 광경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 9 장 청교도의 유산
크롬웰은 일생을 두고 악마와 싸웠으며 죽을 때까지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신의 영감을 얻어 모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신에 취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었다.
크롬웰은 일생을 두고 악마와 싸웠으며 죽을 때까지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신의 영감을 얻어 모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신에 취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었다.
이 교의가 생활을 음울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신봉하는 사람들을 강건하게 단련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쾌락이나 행복이라고 불렀던 모든 것을 자진해서 포기한 이들은 진지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
죄악을 두려워하는 신조 때문에 병사는 군률을 지키고 상인은 약속을 지켰으며 노동자는 근면했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준엄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준엄했다. 크롬웰의 출정 병사가 제대한 뒤에도 한 사람도 유랑자나 도적이 된 일은 없었다. 직업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번창한 사람이나 빵장수, 석수, 장인 중에서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면 크롬웰의 부하였던 노병이라 해도 틀림없다고 왕당파까지도 인정할 정도였다.
[임성삼 註;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主流)를 이루게 된 나라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청교도적인 정신은 영국을 3 류 국가에서 1 류 국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한 청교도의 이 정신이 또 하나의 1 류 국가인 미국을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가 부강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병사는 군률을 지키고 상인은 약속을 지켰으며 노동자는 근면'한 것뿐일 지도 모르겠다.]
제 10 장 왕정복고
[임성삼 주(註); 프랑스나 영국 또는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혁명 이후에 곧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일은 없다. 역사의 반발력이 그만큼 센 이유에서인지 다시 먼저의 체제로 돌아가는 일이 거의 반드시 생긴다.]
[임성삼 주(註); 프랑스나 영국 또는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혁명 이후에 곧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일은 없다. 역사의 반발력이 그만큼 센 이유에서인지 다시 먼저의 체제로 돌아가는 일이 거의 반드시 생긴다.]
p 352
왕정복고 이후 ... 정당의 태아가 잉태되고 있었다. ... 일부는 ... 국왕을 지지했고 이를 반대하는 편에서는 그들을 어느 아일랜드 해적의 이름인 토리즈 Tories를 따서 불렀다. ... 국왕 지지파들은 이 모욕적인 별명을 자랑삼아 사용했다. 토리즈 측에서는 국왕의 반대파를 휘그즈 Whigs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스코틀랜드 서부의 청교도 일파인 휘거모어즈 Whigamores의 약칭이었다.
1679 년 국왕이 17 년만에 처음으로 선거를 실시했는데 양쪽 당파는 집회, 시위행렬, 열렬한 연설 등 오늘날의 선거운동과 비슷한 활동을 했다.
왕정복고 이후 ... 정당의 태아가 잉태되고 있었다. ... 일부는 ... 국왕을 지지했고 이를 반대하는 편에서는 그들을 어느 아일랜드 해적의 이름인 토리즈 Tories를 따서 불렀다. ... 국왕 지지파들은 이 모욕적인 별명을 자랑삼아 사용했다. 토리즈 측에서는 국왕의 반대파를 휘그즈 Whigs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스코틀랜드 서부의 청교도 일파인 휘거모어즈 Whigamores의 약칭이었다.
1679 년 국왕이 17 년만에 처음으로 선거를 실시했는데 양쪽 당파는 집회, 시위행렬, 열렬한 연설 등 오늘날의 선거운동과 비슷한 활동을 했다.
p 353
영국인은 아직도 의회에서 일단 승부가 결정되면 정적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승자가 패자를 학살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는 의회 운영규칙을 모르고 있었다. 국왕과 토리즈의 승리[1681 년]는 휘그즈의 처형을 가져왔다. 휘그즈의 지도자인 러셀, 아거논, 시드니는 교수되었고 에섹스는 런던탑에서 자결했다.
[임성삼의 주(註); 흔히 우리는 우리 나라의 당파싸움이 매우 심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의 당파 싸움은 우리보다 더 심하다. 우리의 동인, 서인이 서양에서는 왕당파와 반대파로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영국인은 아직도 의회에서 일단 승부가 결정되면 정적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승자가 패자를 학살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는 의회 운영규칙을 모르고 있었다. 국왕과 토리즈의 승리[1681 년]는 휘그즈의 처형을 가져왔다. 휘그즈의 지도자인 러셀, 아거논, 시드니는 교수되었고 에섹스는 런던탑에서 자결했다.
[임성삼의 주(註); 흔히 우리는 우리 나라의 당파싸움이 매우 심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의 당파 싸움은 우리보다 더 심하다. 우리의 동인, 서인이 서양에서는 왕당파와 반대파로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우리는 조선 왕조의 4 대 사화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전부 합해 50인이 안되나 서양에서는 한 번의 당파싸움에 1만 명이 죽는 경우가 흔하다. 영국의 내전인 장미 전쟁에서는 전체 기사의 3 분의 1이 죽었고, 프랑스의 성 바돌로뮤 대학살에서는 며칠 사이에 적어도 8000 명의 신교도가 학살되었으며, 대혁명 중의 희생자는 하룻밤에 5000 명이 살해된 것을 비롯하여 적어도 5 만 명을 넘었으며, 1871 년 빠리 꼬뮨사건에서는 내전이었는데도 1만 명 이상이 죽어 1870 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 사람이 죽은 숫자를 능가했다. 이렇게 당파싸움으로 지새운 유럽의 역사에서는 당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데,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518 년간에 정권 경쟁으로 50 인이 정도의 희생자를 낸 정치 이념 논쟁을 무조건 매도한다는 것은 잘못된 개념일 수밖에 없다.]
제 11 장 제임즈 2 세와 1688 년 혁명 [명예혁명]
p 358
1688 년 6 월 30 일, 윌리엄과 메어리에게 보낼 초청장이 댄비와 현명하고 명망이 높은 핼리팰스를 포함한 수명의 귀족에 의해서 서명되었다. 이들은 생명을 내걸고 있었고 ... 많은 장교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윌리엄은 1688 년 11 월 5 일에 토베이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했다. 제임즈 2 세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믿을 만하지 못했다.
반란측은 제임즈 2 세를 체포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 도망할 길을 터 주도록 애썼던 것이다. 그는 다행으로 생각하고 국무집행을 방해하려고 국새를 템즈강에 버린 채 프랑스로 도망했다. 그러나 국새뿐만이 아니라 국왕까지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보수적인 혁명은 내란, 처형, 특히 사형집행 없이 성취되었다. 영국인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어려운 기술을 서서히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1687 년 뉴튼의 3 대 법칙이 포함된 프린키피아 즉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naturalisprincipiamathematica)≫가 발표되었다.]
p 358
1688 년 6 월 30 일, 윌리엄과 메어리에게 보낼 초청장이 댄비와 현명하고 명망이 높은 핼리팰스를 포함한 수명의 귀족에 의해서 서명되었다. 이들은 생명을 내걸고 있었고 ... 많은 장교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윌리엄은 1688 년 11 월 5 일에 토베이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했다. 제임즈 2 세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믿을 만하지 못했다.
반란측은 제임즈 2 세를 체포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 도망할 길을 터 주도록 애썼던 것이다. 그는 다행으로 생각하고 국무집행을 방해하려고 국새를 템즈강에 버린 채 프랑스로 도망했다. 그러나 국새뿐만이 아니라 국왕까지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보수적인 혁명은 내란, 처형, 특히 사형집행 없이 성취되었다. 영국인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어려운 기술을 서서히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1687 년 뉴튼의 3 대 법칙이 포함된 프린키피아 즉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naturalisprincipiamathematica)≫가 발표되었다.]
제 6 부 군주제와 과두제
제 1 장 왕위에 오른 네델란드인[윌리엄 3 세; 1688 - 1702]
p 370
1640 년의 내란은 영국이 절대주의적인 군주제를 거부한 것이고 1660 년의 왕정복고는 공화국이 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따라서 [1688 년] 영국은 공화국인 동시에 군주국일 수 있는 방법을 다시 한 번 찾아 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서 찾아낸 것이 현재의 영국의 체제이다.]
제 2 장 앤 여왕의 치세[1702 - 1714]
제 3 장 월폴의 시대
[조지 1 세; 1714 - 1727]
p 386
[왕과] 왕의 시종들은 영어를 전혀 해독하지 못했으므로 궁정의 대신들은 라틴어를 사용했다. 국민들이 이러한 희극을 용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로 생각될 것이나 이러한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휘그당원이었다.
제 3 장 월폴의 시대
[조지 1 세; 1714 - 1727]
p 386
[왕과] 왕의 시종들은 영어를 전혀 해독하지 못했으므로 궁정의 대신들은 라틴어를 사용했다. 국민들이 이러한 희극을 용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로 생각될 것이나 이러한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휘그당원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외국 출신의 왕이 영어와 영국의 상황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정치는 당연히 국무총리인 당시의 재무장관에게 위임되어 총리에 의한 정치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의 영국 정치 방법은 상당한 정도 우연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좋은 정치를 계속 유지한 것은 영국 국민의 힘이다.]
조지 1 세가 즉위하자 휘그당은 볼링브르크를 수 개월 동안 국외로 망명시키고 옥스퍼드 백작은 런던탑에 2 년 간이나 유폐시킴으로써 토리당을 무력화시켰다. 그런 다음 선거구를 교묘하게 조종하고 선거인을 매수하여 하원 내의 당세(黨勢)를 강화했다. 하원의 지지를 확보하게 되자 의원의 임기를 3 년에서 7 년으로 연장했다. 이것은 1911년에 수정되어 임기가 5 년으로 단축되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p 388
이 월폴경 Sir Robert Walpole은 위대하게 보이는 모든 특성을 회피하려 했으나 영국의 위대한 대신의 한 사람이었다. 노포크 향사의 아들인 그는 농촌 지주에 알맞는 취미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동료 대신의 서신보다도 자기 밀렵감시인의 서신을 먼저 뜯어 보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 월폴경 Sir Robert Walpole은 위대하게 보이는 모든 특성을 회피하려 했으나 영국의 위대한 대신의 한 사람이었다. 노포크 향사의 아들인 그는 농촌 지주에 알맞는 취미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동료 대신의 서신보다도 자기 밀렵감시인의 서신을 먼저 뜯어 보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월폴은 재무장관이었으며 수상이라고 불리지 않았으나, 실제로 영국의 첫 총리라고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서적과 음악을 싫어했다. 그는 재미있는 향연과 부인들과의 유흥을 몹시 좋아했고 조지왕과는 몇 시간 동안이라도 엉터리 라틴어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임성삼의 주(註); 이 영국의 왕은 영어를 말하지 못하였다.] 쾌락주의자였던 그는 고상한 이상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고 상대방이 애국심을 말할 때에는 큰 소리로 웃어 넘겼다.
그에게는 학설과 십자군이 금기사항이었고 역사책에 의해 자기의 행동을 평가하려는 사람을 신임하지 않았으며 유능한 사업가가 일을 처리하듯이 그날 그날의 국무를 집행해 나갔다. 그는 너무 능숙한 솜씨로 국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많은 일을 했어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위대한 원칙은 '쉬고 있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말라', '잠자고 있는 개를 깨우지 말라'였다. 그는 당원의 충성을 믿지 않았으며 젊은 후배에게 '항상 변하지 않고 ...'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월폴을 국민에게 정치기강이나 계획을 제시한 일이 없었으나 그의 상식은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20 년간이나 권세를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그의 통치형식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그는 약소국가는 모험을 피해야 하고 권위가 서 있지 않은 왕조를 강화하려면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성삼; 이 시기 즉 1700 년대 초반의 영국 수상이 자기 나라를 약소국가라고 부른 것에 주의할 것.]
따라서 그는 프랑스와의 협상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국교회와 근왕당의 결속을 저지함으로써 토리당을 정권으로부터 멀리하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일은 위대한 목적이라고 할 수은 없었을 것이나 이것을 달성함으로써 수 년 간 비할 데 없는 번영이 가능했다. 그리고 당쟁으로부터 과거와 같은 잔인성을 제거한 것도 그의 공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권력을 놓게 되었을 때에도 그를 간단히 투옥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정권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 시대를 이끌어간 국무총리급 인물의 성격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군주제도에서는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제갈공명, 사마 중달, 주유, 그리고 우리 나라의 을파소, 황희와 맹사성, 프랑스의 리슐리외 등. 이런 사람들 중 상당한 수가 단순한 개념으로 나라를 통치하여 성공하였다.
이 월폴도 영국이 도약하여 세계의 1 류 국가를 만들어 내는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Sir Robert Walpole, 1st Earl of Oxford 1676 ~ 1745
영국 정치가. 노퍽주 출생. 1701~42년 휘그당 하원의원을 지냈다. 1711년 실각하였으나, 14년 조지 1세의 즉위와 함께 의회에 복귀했다. 15~17년 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으나 국왕과 정견이 맞지 않아 사임했다. 21~42년 다시 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20년의 시정기간 중 평화정책을 고수하고 정당간의 항쟁과 종교적 대립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한편 산업과 상업의 발달을 촉진함으로써 국가의 부(富)를 늘렸다. 대외적으로는 평화외교를 펼쳐, 33 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개입을 원하는 국왕의 제의를 거부하기도 했다. 42년 총선거에 패한 뒤 사직하였으나, 영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내각책임제를 창시하였으며, 영국 총리의 원조(元祖)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백과사전]
영국 정치가. 노퍽주 출생. 1701~42년 휘그당 하원의원을 지냈다. 1711년 실각하였으나, 14년 조지 1세의 즉위와 함께 의회에 복귀했다. 15~17년 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으나 국왕과 정견이 맞지 않아 사임했다. 21~42년 다시 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20년의 시정기간 중 평화정책을 고수하고 정당간의 항쟁과 종교적 대립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한편 산업과 상업의 발달을 촉진함으로써 국가의 부(富)를 늘렸다. 대외적으로는 평화외교를 펼쳐, 33 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개입을 원하는 국왕의 제의를 거부하기도 했다. 42년 총선거에 패한 뒤 사직하였으나, 영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내각책임제를 창시하였으며, 영국 총리의 원조(元祖)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백과사전]
한 인물이 역사를 창조한다고 하면 흔히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한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월폴 같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며, 내란을 종식시켰으며, 영국의 산업혁명을 최대한 이끌어 다음 시대에 영국의 세계 제패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내각 책임제를 처음 실행한 사람이야 말로 역사를 창조한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임성삼의 주(註); 평화를 유지하고, 국가 내부의 항쟁과 대립을 없애고, 산업과 농업을 발전시켜 국가를 부유하게 하고, 그 후에 계속 유지되는 내각책임제를 만든 이 사람은 정말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제 4 장 1700 - 1750 년의 정신
p 395
휘그당의 철학가 존 로크는 유럽 철학가 중에서도 대가로 불리웠다. 그는 1688 년 혁명의 이론가로서 유명해졌다. 그의 결론은 왕권 신수설을 천직 인권설로 대치하는 데 있었다. 홉즈가 인간 성악설로부터 연역해서 '강력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한 데 대하여 로크는 자연상태에 있을 때에도 이성적인 동물인 인간은 도덕의 규범인 법률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로크의 낙관론적인 사상으로부터 루소 Rousseau의 '사회계약론', 프랑스의 인권 선언, 아메리카의 독립선언 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p 395
휘그당의 철학가 존 로크는 유럽 철학가 중에서도 대가로 불리웠다. 그는 1688 년 혁명의 이론가로서 유명해졌다. 그의 결론은 왕권 신수설을 천직 인권설로 대치하는 데 있었다. 홉즈가 인간 성악설로부터 연역해서 '강력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한 데 대하여 로크는 자연상태에 있을 때에도 이성적인 동물인 인간은 도덕의 규범인 법률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로크의 낙관론적인 사상으로부터 루소 Rousseau의 '사회계약론', 프랑스의 인권 선언, 아메리카의 독립선언 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p 399
포르투갈과의 조약이 체결된 후 부유층은 포르토 와인을 지나치게 마셨다. 볼링부르크는 1 병, 카터렛은 2 병, 월폴은 3 병이라는 대주가였다. 당시에는 정치가를 이렇게 분류하는 관습이 있었다. 대신이 술에 취해서 여왕 앞에 알현하거나 귀족이 자기 딸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이 조금도 수치가 아니었다.
[임성삼의 주(註); 포르토 와인은 포도즙에 설탕을 더 섞어 발효시킨 것이다. 보통의 포도주가 알콜 함량이 11 ~ 12 % 정도인 데 비해 포르토는 18 % 정도이다. 여기의 한 병은 통상적으로 750 mL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월폴의 주량은 소주로 환산하면 약 4 병 반에 해당한다. 위의 문장에서 "술에 의한 정치가의 분류"는 물론 가장 많이 마시는 월폴이 최상급(最上級) 정치가이고 적게 먹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하급이라는 뜻이다. 영국 사람들은 지금까지 술취하는 데 대해 서구에서 가장 관대하다.]
제 5 장 대(大) 피트 시대
포르투갈과의 조약이 체결된 후 부유층은 포르토 와인을 지나치게 마셨다. 볼링부르크는 1 병, 카터렛은 2 병, 월폴은 3 병이라는 대주가였다. 당시에는 정치가를 이렇게 분류하는 관습이 있었다. 대신이 술에 취해서 여왕 앞에 알현하거나 귀족이 자기 딸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이 조금도 수치가 아니었다.
[임성삼의 주(註); 포르토 와인은 포도즙에 설탕을 더 섞어 발효시킨 것이다. 보통의 포도주가 알콜 함량이 11 ~ 12 % 정도인 데 비해 포르토는 18 % 정도이다. 여기의 한 병은 통상적으로 750 mL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월폴의 주량은 소주로 환산하면 약 4 병 반에 해당한다. 위의 문장에서 "술에 의한 정치가의 분류"는 물론 가장 많이 마시는 월폴이 최상급(最上級) 정치가이고 적게 먹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하급이라는 뜻이다. 영국 사람들은 지금까지 술취하는 데 대해 서구에서 가장 관대하다.]
제 5 장 대(大) 피트 시대
[윌리엄 피트 William Pitt, 1st Earlof Chatham 1708∼1778 백과사전에서
영국 정치가. 웨스트민스터 출생. 대(大)피트라 한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장교를 거쳐, 1735년 하원의원이 되어 특유의 웅변술로 하원에서 명성을 얻었다. 1742∼44년 대륙병력 보조금 체계와 J.카터릿의 하노버왕가정책을 반대하였으며, 그 뒤 재무성 국고국장과 추밀고문관을 지냈다. 뉴캐슬내각의 외교정책을 반대하여 실각하였다가 56∼61년 국무장관을 지냈다. 1756년의 7년전쟁에서는 프리드리히대왕을 지원, 북아메리카식민지에 대한 프랑스 위협을 해소하였다. 66년 총리가 되고 건강 악화로 68년 사임하였다. 미국 식민지의 세금부과를 반대하는 등 뛰어난 지도력·추진력으로 위대한 하원의원이라 불렸다]
영국 정치가. 웨스트민스터 출생. 대(大)피트라 한다.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장교를 거쳐, 1735년 하원의원이 되어 특유의 웅변술로 하원에서 명성을 얻었다. 1742∼44년 대륙병력 보조금 체계와 J.카터릿의 하노버왕가정책을 반대하였으며, 그 뒤 재무성 국고국장과 추밀고문관을 지냈다. 뉴캐슬내각의 외교정책을 반대하여 실각하였다가 56∼61년 국무장관을 지냈다. 1756년의 7년전쟁에서는 프리드리히대왕을 지원, 북아메리카식민지에 대한 프랑스 위협을 해소하였다. 66년 총리가 되고 건강 악화로 68년 사임하였다. 미국 식민지의 세금부과를 반대하는 등 뛰어난 지도력·추진력으로 위대한 하원의원이라 불렸다]
p 408
피트의 경우야말로 한 사람의 확고한 결단이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켰다고 생각되는 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피트의 경우야말로 한 사람의 확고한 결단이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켰다고 생각되는 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영국의 한 역사가는 피트가 없었더라면
인도에 프랑스 제국의 기초가 구축되었을 것이고,
미시시피강까지 프랑스의 세력권이 확대되었을 것이고, 프랑스가 아메리카 합중국의 모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흔히 역사적인 상황이 위인을 만드는가, 혹은 위인이 역사를 만드는가는 문제가 논의된다. 이 피트라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든 사람에 속한다. 만일 이 피트에 대한 책을 보게되면 읽어보기 바란다.]
제 6 장 조지 3세와 아메리카 식민지
p 413
[영국의] 중상주의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p 413
[영국의] 중상주의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식민지는 수출입 상풍의 적재를 영국 선박에 한정할 것,
둘째는 식민지의 무역은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항구에서 직접 거래하는 것이 유리할 때라도 영국 항구를 경유할 것,
셋째로는 식민지는 영국의 공장과 경합되는 공장을 건설하지 말 것 등이었다.
피트까지도 만약에 아메리카가 양모 한 오라기나 말편자 한 개라도 만든다면 그들의 도시를 군대로 가득차게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당시의 식민지에 대한 통치 방법을 잘 알 수 있다. 남의 나라에 자신의 앞날을 맡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실제적으로 이 당시 영국과 식민지 미국은 동일한 종족이라고 생각되었는데도 통치 방법은 위와 같았다. 그러니 종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인도에 대한 영국의 통치 방법은 미루어 알 수 있다.]
p 415
[1770 년] 영국은 1 표 차로 차(茶)에 대한 세금 하나만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영국은 단지 16,000 파운드[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가치로 20억 원 정도라고 생각된다.많이 잡아야 100 억]라는 푼돈 때문에 하나의 제국[미국]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p 415
[1770 년] 영국은 1 표 차로 차(茶)에 대한 세금 하나만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영국은 단지 16,000 파운드[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가치로 20억 원 정도라고 생각된다.많이 잡아야 100 억]라는 푼돈 때문에 하나의 제국[미국]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워싱튼은 어느 전투에서나 20만 명 이상의 병사를 거느려 본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다른 책에서는 가장 큰 전투에도 3만 명 정도의 미국 사람이 투입되었을 뿐이었다고 읽은 적이 있다.]
p 418
대 피트의 둘째 아들인 젊은 피트는 21 세에 이미 부친처럼 거물이 되었고 그는 그의 힘을 다해서 의회정치 제도를 확립하려고 결심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교육을 받아 온 그는 하원에 나오게 되자마자 빛나는 인품을 나타내어 곧 최고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대 피트의 둘째 아들인 젊은 피트는 21 세에 이미 부친처럼 거물이 되었고 그는 그의 힘을 다해서 의회정치 제도를 확립하려고 결심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교육을 받아 온 그는 하원에 나오게 되자마자 빛나는 인품을 나타내어 곧 최고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피트는 연소한 데도 불구하고 위신과 침착을 겸비한 비범한 인물로 부상되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청렴결백하고 불요불굴의 성격을 물려 받고 있었다. 여러 가지 유급한직(有給閒職)이 제공되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이 휘그당의 의사를 무시하고 24 세의 피트를 수상에 임명했고 얼마 안되어 수상의 권위는 국왕을 능가하게 되었다. 피트는 20 년간이나 영국을 통치했으며 그는 정치생활에 청렴이라는 미덕을 도입했다.
그는 부정부패와 싸웠고 국채의 증가를 방지했다. 그가 편성한 예산은 오늘날까지도 완벽한 시범으로서 찬양 받고 있다.
그는 부정부패와 싸웠고 국채의 증가를 방지했다. 그가 편성한 예산은 오늘날까지도 완벽한 시범으로서 찬양 받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소(小) 피트는 영국이 미국을 잃고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것을 잘 마무리하여 나중에 나폴레옹과 대결할 수 있는 힘을 만들었다.
William Pitt 1759∼1806 백과사전에서
영국 정치가. 켄트주 헤이스 출생. 대(大)피트의 둘째아들로, 소(小)피트라고 한다. 14세 때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갔으며,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였다. 1781년 하원의원, 이듬해 재무장관을 거쳐 83년 총리가 되어 재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개혁을 단행하였고, 노예무역 폐지와 산업혁명의 장애가 되는 관세경감을 주장하였다. 93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정부비판세력을 억제하는 한편 대(對)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아일랜드반란 수습문제를 둘러싼 국왕과의 마찰로 1801년 사임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어 1805년 제 3 차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해 나폴레옹에 대항하였다. 영국의 위신과 상공업 육성을 꾀한 인물로 평가된다.]
영국 정치가. 켄트주 헤이스 출생. 대(大)피트의 둘째아들로, 소(小)피트라고 한다. 14세 때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갔으며,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였다. 1781년 하원의원, 이듬해 재무장관을 거쳐 83년 총리가 되어 재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개혁을 단행하였고, 노예무역 폐지와 산업혁명의 장애가 되는 관세경감을 주장하였다. 93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정부비판세력을 억제하는 한편 대(對)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아일랜드반란 수습문제를 둘러싼 국왕과의 마찰로 1801년 사임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어 1805년 제 3 차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해 나폴레옹에 대항하였다. 영국의 위신과 상공업 육성을 꾀한 인물로 평가된다.]
제 7 장 프랑스 혁명과 나뽈레옹
p 421
1792 년에 피트는 영국 함대의 상비병력을 2000 명으로 감원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역사상 유럽의 정세로 보아 15 년간의 평화를 기대한다는 것이 현재보다도 확실한 시기는 없다.'
예언한다는 것은 예언자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예언을 하게 된 것은 프랑스가 1789 년 혁명 이후 매우 무질서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피트 같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 년 째 총리를 지내면서 예측한 이같은 말이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완전히 틀리게 된다.
p 421
1792 년에 피트는 영국 함대의 상비병력을 2000 명으로 감원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 역사상 유럽의 정세로 보아 15 년간의 평화를 기대한다는 것이 현재보다도 확실한 시기는 없다.'
예언한다는 것은 예언자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예언을 하게 된 것은 프랑스가 1789 년 혁명 이후 매우 무질서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피트 같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 년 째 총리를 지내면서 예측한 이같은 말이 나폴레옹의 출현으로 완전히 틀리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평화로운 시절이라도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해군 상비병력이 2000 명인 적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재 항공모함 한 대에 필요한 병력의 수가 이 숫자를 능가하며, 2 차 대전 중의 전함 한 대에도 5000 명 가까운 인원이 필요하였다고 기억한다.]
제 8 장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p 436
도로건설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게 된 것은 겨우 1815 년 이후의 일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기사 머캐덤이 도로면을 수분이 침투하지 않는 표층으로 포장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p 436
도로건설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게 된 것은 겨우 1815 년 이후의 일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기사 머캐덤이 도로면을 수분이 침투하지 않는 표층으로 포장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서 수분이 침투하지 않는 표층이란 아스팔트와 비슷한 물질을 말한다. 현재의 아스팔트는 주로 석유에서 제조된다. 석유를 채취할 목적의 첫 유정 굴착은 1859 년이므로 1815 년에는 석유에서 생산된 물질로 도로를 포장할 수는 없었다.
석탄가스는 1700 년대 후반에 석탄에서 만들어져 빛을 얻기 위해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부산물로 다량의 콜타르가 발생하였으므로 도로의 포장에 이것을 이용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1901 년 처음으로 콜타르를 도로포장에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방법의 덕택으로 4 두 역마차의 속도가 1 시간 4 마일로부터 7 마일, 10 마일로 증가했고 이 속력 때문에 말의 피로를 덜기 위해서 많은 말이 사용되었다. 1831 년부터는 철도가 발달하여 역마차는 점차 후퇴했다.
[임성삼의 주(註); 말 네 마리가 끄는 역마차의 속도가 한 시간에 6.4 km에 불과하였다. 내가 빠르게 걷는 속도이다. 이것이 도로 포장의 결과 한 시간에 16 km의 속도로 2.5 배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속도 또한 요즈음의 개념으로는 매우 느리다.
그러나 이 속도의 증가는 요즈음의 개념으로는 한 시간에 80 km인 기차의 속도가 200 km로 변화한 것이다. 보통의 철도가 고속전철로 바뀐 것이다. 또한 아직까지 승객을 나르는 프로펠러 비행기의 속도는 시간당 200 km이다.]
p 458
유태인에 관한 최초의 법안은 1830 년 의회에 제출되었었고 1860 년에 그들은 영국시민으로서의 완전한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유태인에 관한 최초의 법안은 1830 년 의회에 제출되었었고 1860 년에 그들은 영국시민으로서의 완전한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영국 사람과 천 년 이상을 같이 살아온 유태인에게 영국에서 시민권을 준 것이 1860 년이다.
여기의 시민권이 투표권을 포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국이 여성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 1938 년이라고 기억한다.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1947 년부터 완전한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우리보다 몇 백 년 앞서서 국민의 기본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참고; 프랑스 여성이 자기의 은행 구좌를 마음대로 자기의 이름으로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1970 연대 이후라고 들었다. 그 때까지는 결혼 전이었으면 아버지의 허락을, 결혼 후라면 남편의 허락을 증명하는 서류가 없으면 은행에 구좌를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유럽의 보수성을 말하는 또 다른 이야기 한 가지; 1992 년에 70 세가 넘은 프랑스 할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본인이 이혼녀라고 하여 파리에서 100여 km 떨어진 고향에 가면 1950 연대에도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돌을 던졌다고 한다. 물론 모든 동네의 여자들이 길에서 만나도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의 보수성에 대한 다른 이야기; 이 할머니가 파리에서 30 년 이상을 한 동네에서 살았으나 그 동네의 사람들은 그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파리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은퇴한 후에는 내가 머물었던 파리에서 70 km 떨어진 다른 도시에 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 7 부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로
p 465
[1830 연대에] 내각은 나소 시니어 Nassau Senior와 에드윈 채드윅 2 명을 수반으로 하는 [빈민] 구제 위원회를 임명했는데 이 두사람은 모두 빈곤문제에 대해서 완고하기만 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소 시니어는 빈민을 구제하지 않는 것이 빈곤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일 없이 철저할 만큼 잔인하게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p 465
[1830 연대에] 내각은 나소 시니어 Nassau Senior와 에드윈 채드윅 2 명을 수반으로 하는 [빈민] 구제 위원회를 임명했는데 이 두사람은 모두 빈곤문제에 대해서 완고하기만 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소 시니어는 빈민을 구제하지 않는 것이 빈곤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일 없이 철저할 만큼 잔인하게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하겠는가, 굶어 죽겠는가의 양자택일하게 되면 일을 택하게 된다.
젊은 사람은 늙어서 구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축을 할 것이고 늙은이도 자식들의 봉양을 받아야겠다는 것을 알면 자식들을 사랑하도록 애쓸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부양해 줄 사람이 없거나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 이외에는 절대로 구제해서는 안된다. 특히 부분적인 보조는 금물이며 전적인 구제 아니면 아예 구제를 없애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요즈음도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이와 유사한 논리를 들을 때가 있다. 이런 발언을 대 피트나 소 피트 같은 큰 인물이 하는 것은 보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이런 발언이 없다. 이미 이런 낮은 논리는 다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우리 과거와의 단절이 있는 현대에 재산을 우연히 축적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간혹 들을 수 있다. 시대에 뒤진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제 3 장 자유무역의 승리
p 471
1845 년과 1846 년 두 해에 걸쳐 아일랜드에 감자 흉년이 닥쳤다.
p 471
1845 년과 1846 년 두 해에 걸쳐 아일랜드에 감자 흉년이 닥쳤다.
[임성삼 주(註); 내 기억으로는 1845 년 이전의 아일랜드 인구 800 만 중에서 아일랜드의 감자 흉년이 영향을 미치는 기간에 200 만이 이민을 떠나고, 200 만이 굶어 죽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에 남아있던 인구가 400 만으로 감소 되었다.
이 시기의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어 "해가지지 않는 제국(帝國)"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국력으로 같은 나라의 통치하에 있는 바로 옆의 섬에서 200 만이 굶어 죽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정치가는 농산물의 수입세를 올려 영국 농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식량을 살 돈이 없으니 곡식 값을 올리거나, 그대로 두어도 굶어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이것이 식민 제국주의의 통상적인 행태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p 473
아일랜드의 흉년 때문에 리버풀 항구에만 1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상륙하게 되어 빈민굴의 참상을 더 한층 극심하게 만들었다.
아일랜드의 흉년 때문에 리버풀 항구에만 1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상륙하게 되어 빈민굴의 참상을 더 한층 극심하게 만들었다.
1844 년에 맨체스터를 방문한 엥겔스는 35만 명의 노동자가 축축하고 불결한 좁은 판잣집에서 습기와 먼지 투성이의 공기를 마셔 가면서 빈틈없이 몰려 살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광산에서도 반나체의 여자들이 말이나 소처럼 혹사당했고 아이들을 갱도에서 하루종일 통풍구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지내고 있었다. 레이스 공장에서는 네 살짜리 어린아이까지도 부려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덕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을 것이며 작가들이 강조하기 위해서 최악의 사례를 묘사한 경우였으리라. 좌우간 이러한 과장이 여론을 환기하는데 유용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제 5 장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p 482
19 세기 초기만큼 과학적 발명이 풍습과 사상은 물론 자연 풍경까지 급속하게 변화시킨 적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것처럼 보였다. ... 1812 년에 기선이 클라이드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1819 년에는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었다. 1821 년 스티븐슨이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제작했고 1830 년 웰링튼공은 맨체스터와 리버풀 간의 철도를 부설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편지를 보내는데 1 페니짜리 우표만 부치면 되는 새로운 제도가 창안되어 편지 쓰는 습관이 새로운 계급에서 유행하게 되었고 신문도 휘그당이 우편료를 5 펜스에서 1 페니로 인하했기 때문에 발행부수가 증가하게 되었다.(타임즈 1785 년, 데일리 뉴우스 1846 년 창간)
p 482
19 세기 초기만큼 과학적 발명이 풍습과 사상은 물론 자연 풍경까지 급속하게 변화시킨 적은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것처럼 보였다. ... 1812 년에 기선이 클라이드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1819 년에는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었다. 1821 년 스티븐슨이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제작했고 1830 년 웰링튼공은 맨체스터와 리버풀 간의 철도를 부설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편지를 보내는데 1 페니짜리 우표만 부치면 되는 새로운 제도가 창안되어 편지 쓰는 습관이 새로운 계급에서 유행하게 되었고 신문도 휘그당이 우편료를 5 펜스에서 1 페니로 인하했기 때문에 발행부수가 증가하게 되었다.(타임즈 1785 년, 데일리 뉴우스 1846 년 창간)
[임성삼 주(註); 1850 년대의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었다. 1700 년대가 시작하기 전에 뉴턴은 지구와 달, 그리고 태양의 관계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 때에 시작한 미분은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Laplace(1749 - 1827)는 수학과 물리학의 체계로 우주의 모든 진행을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논리를 파괴하기 위하여는 적어도 70 년 이상이 필요하였다. 1926 년이 되어 양자론이 확립될 때까지는 이 "Laplace의 악마"라는 "기계학적 결정론"이 가지는 논리적인 모순을 완벽하게 타파할 수 없었다.
더구나 1900 년 가까이 되었을 때 서구의 정신적인 세계는 더 이상의 물리학적인 논리의 발전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시기 미국의 특허청장은 대통령에게 "이미 특허를 받을 모든 발명은 이미 끝났으므로 20 세기에는 특허청이 필요없을 것"이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
제 6 장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톤
p 402
글래드스톤은 1868 - 1874 년 간 수상 자리에 있었고 디즈레일리는 1874 - 1880 년까지, 그리고 1880 - 1885 년 간 다시 글리드스톤이 수상으로 있었다.
p 402
글래드스톤은 1868 - 1874 년 간 수상 자리에 있었고 디즈레일리는 1874 - 1880 년까지, 그리고 1880 - 1885 년 간 다시 글리드스톤이 수상으로 있었다.
[임성삼 주(註); 이 시기가 영국의 가장 융성한 기간이다. 한 나라가 힘이 있을 때 실수하는 유형을 알기 위해서는 좋은 자료이다. 즉 앞으로 국제적으로 미국이 할 일은 이 범주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좋은 책이 있으면 읽기를 바란다.]
제 14 장 결론
p 551
영국의 역사는 인류의 뛰어난 성공을 서술하고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외딴 섬에 자리 잡았던 색슨인과 데인족의 일부가 그 곳으로 들어와, 그대로 남게 된 켈트인과 로마인과 섞여 살다가 노르만디로부터 건너 온 모험가에 의해 조직된 후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지구의 3 분의 1을 지배하게 된 경과의 기록이 바로 영국의 역사인 것이다.
p 551
영국의 역사는 인류의 뛰어난 성공을 서술하고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외딴 섬에 자리 잡았던 색슨인과 데인족의 일부가 그 곳으로 들어와, 그대로 남게 된 켈트인과 로마인과 섞여 살다가 노르만디로부터 건너 온 모험가에 의해 조직된 후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지구의 3 분의 1을 지배하게 된 경과의 기록이 바로 영국의 역사인 것이다.
p 552
영속성과 순응성이라는 귀중한 두 가지 덕성으로 영국에서는 평온한 진화가 이루어졌다. 볼퍼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
"과거에 해 보지 않았던 현명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늘 해오던 우매한 일을 하는 편이 훨씬 좋다."
영국은 지금도 이전과 다름없이 선례로써 다스리고 있다.
영속성과 순응성이라는 귀중한 두 가지 덕성으로 영국에서는 평온한 진화가 이루어졌다. 볼퍼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
"과거에 해 보지 않았던 현명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늘 해오던 우매한 일을 하는 편이 훨씬 좋다."
영국은 지금도 이전과 다름없이 선례로써 다스리고 있다.
[임성삼 주(註); 미국은 영국의 발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의 진보가 우리 눈에 앞으로 향하는 강력한 자세로만 일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을 이끄는 사람들은 영국의 "우매한 진보"를 가장 잘 알고 그것을 진보에 응용하여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 553
현대의 세계는 영국과 영국연방에 대하여 과거에 성공적으로 해결한 것보다도 더욱 곤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영국은 이제 자기보다 우세한 인구와 자원을 가진 강대국과 견주게 되었다. 이제까지 영국제품과 용역을 수입하던 많은 국가가 자급자족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남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현대의 세계는 영국과 영국연방에 대하여 과거에 성공적으로 해결한 것보다도 더욱 곤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영국은 이제 자기보다 우세한 인구와 자원을 가진 강대국과 견주게 되었다. 이제까지 영국제품과 용역을 수입하던 많은 국가가 자급자족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남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시간은 가치가 있다. 우리의 마음이 휴식을 취하며, 읽는 동안 삶의 즐거움을 얻는다.
David London - Capture the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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