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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名士멘토]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공부 잘하기 위해선 체력 길러야"

鶴山 徐 仁 2008. 11. 3. 15:06

 
 원문출처 : [名士멘토의 열공특강]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공부 잘하기 위해선 체력 길러야 합니다"
김태완 맛있는공부 기자 kimchi@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김수행(66) 교수는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의 대부로 꼽힌다.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이 아니라 이념면에서 '불온사상'에 가까웠던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에 평생을 천착한 것이다. 국내 처음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완역했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올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직에서 퇴임한 뒤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김 교수는 "제가 '불온사상'인 마르크스 경제학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창시절 겪은 가난과 영국 유학시절에 겪었던 영국사회의 진보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지난 10월 8일 성공회대 교수연구실에서 김 교수를 만나 공부와 삶의 이야기를 3시간 가까이 들었다.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할까"

1942년생인 김 교수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해방직후 귀국선을 탔다. 원적은 경북 김천시 황금동. 유년시절은 경주와 경산, 대구 등지에서 보냈다. 육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인 그는 "집안형편 탓에 늘 가난과 맞서야 했고 장남으로서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 마르크스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는 학창시절 겪은 가난으로 사회의 모순에 눈 뜨게 됐다고 말했다. 조영회 기자remant@chosun.com
대구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으로 치른 시험에서 12등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5등 안에 들 정도로 우수했다. "당시 세대가 그랬겠지만 촛불과 호롱불 아래에서 공부했다. 추운 겨울엔 장갑에다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공부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무던히 공부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머리는 그렇게 명석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종의 성실파였지요. 아이큐는 120정도로 기억해요. 선생님께서 기발한 질문을 자주하는 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정도였습니다. 공부를 하다 생기는 의문은 반드시 풀려고 애썼지요. 경북중에 합격하고서 등록금을 마련할 요량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큰 누나가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범대)를 나왔는데, 초등학교 교사가 되면서 우리집을 많이 도왔지요."

장남인 김 교수가 경북중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위해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에 진학한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와 1,2등을 다투던 친구들이 가난 탓에 진학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학교문집에 '달나라에 가난한 사람이 내 땅을 갖고 내 집을 짓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글을 실었다고 한다.

"몇 가지 의문을 품게 됐어요. 왜 공부 잘하는 학생이 계속해서 공부할 수 없을까? 왜 사회와 정부는 가난한 사람에게 무관심할까?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할까? 머리도 좋고 똑똑하던 친구들이 잘려나간 모습을 보면서 이 불만투성이의 의문은 더욱 커졌지요."

그는 대구상고 시절, 연식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전국대회에서 우승, 대구역에서 학교까지 시가행진을 할 정도로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당시엔 운동선수랍시고 수업에 빠져선 안됐기 때문에 공부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북중 시절, 기초를 다져놓은 덕에 고교수업은 중학교 과정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또 운동으로 체력을 기른 탓에 밤늦게까지 공부해도 버틸 수 있었다.

■서울대 상대 수석합격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에는 빚쟁이가 끊이질 않았고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결국 가족들이 모두 강원도 동해시로 이사가는 바람에 혼자 자취생활을 하게 됐다. 그 무렵 선배들로부터 '공부 열심히 하면 서울대 상대에 공짜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귀가 솔깃해졌다.

"머릿속엔 '늘상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빨리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엇갈렸지만 고2때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서울 상대에 합격하면 4년 학비전액을 보조하는 학교 장학제도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어요. 정구부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했다가 선배들에게 많이 얻어 맞았어요. 그렇게 대입준비를 하게 됐습니다. 만약 서울상대에 못가면 철도대학에 진학할 생각도 했어요."

김 교수는 미친 듯 공부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4~5시간만 자고 매진했다. 전과목 교과서를 거의 다 외웠다. 교과서 한 페이지를 다 외우면 찢어서 질근질근 씹었다. "씹으면서 다시 외웠다"고 했다. 그렇게 공부해도 지치지 않은 것은 운동으로 몸을 단련시켰기 때문이었다.

"시중에 나온 교재나 문제집은 죄다 풀었고 지금의 입시학원 성격인 '강습소'에서 수학과 영어과목도 수강했습니다. 경북중 시절, 수학을 가르치셨던 이을기 선생님을 찾아가 '수학공부를 어느 정도 해야 되느냐'고 여쭙기도 했죠. 선생님 앞에서 직접 수학문제를 풀었더니 문제집 한 권을 주시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셨지요. 하지만 혼자 공부하는 것이어서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무작정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도리밖에 없었지요. 외톨이로 공부하다가 자칫 원서기간을 넘길 뻔했어요."

그는 놀랍게도 1961학년도 서울대 상대 본고사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사회모순에 눈뜨며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대학시절, 경제학을 배우며 자본주의 문제점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똑똑한 친구들이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던 사회모순을 학문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당시엔 제대로 된 사회과학도서가 없어 일본책을 주로 읽었다.

대학 조교시절인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에 연루돼 보름 동안 남산에서 조사를 받았다. 대학 2년 선배인 신영복 선생에게 북한 소설책과 레닌의 '러시아자본주의발달사'를 빌려 읽고 포섭됐다는 죄목이었다. 결국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요주의 인사'로 지목돼 곤란을 겪었다.

이후 1969년 3월 외환은행에 입사했고 3년 뒤인 1972년 2월 런던지점 발령을 받았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어요. 병원이 무료고 학교교육도 무료, 실업수당에다 장기공공임대주택까지 모두 갖춰져 있었어요. 그런데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불황이 닥치자 파업으로 나라가 어수선했고 자본가와 노동자 간 싸움이 끊이질 않았어요. '공황이 뭔데 이러나' 싶었지요. 그런데 공황을 공부하려니 주류 경제학에는 공황이론이 없었어요. 그냥 시장논리에 맡기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공황이론은 마르크스 이론에 있습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황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표를 쓰고 33살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는 화폐금융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박사학위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택했다. 당시 경직된 한국사회를 감안하면 일종의 모험이었다. 김 교수는 런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할 때까지 집에 전화기를 두지 않았다. 행여 자신의 집으로 전화를 건 지인들에게 피해가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서른 넘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이십대 젊은 친구들과 경쟁을 하는데 기억력으로 따라갈 수 없잖아요. 남들보다 공부시간이 곱절 들었지요.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이론을 머리로 외울 때, 저는 사물의 전체를 이해해서 제 것으로 만들려 애를 썼어요. 비록 더디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론을 체화시키려 애썼던 것이지요."

그는 원없이 공부했다. 그리고 1982년 10월 마르크스 공황이론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김 교수는 "지금의 자본주의 현실을 자꾸 개혁하면, 그게 축적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며 예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다운 얘기를 했다."요즘 학부모를 보면 자녀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려고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 같아요. 성장과정을 지켜보고 자녀에게 맞는 적성을 찾도록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어린시절 운동을 많이 시켜 체력을 길러야 해요. 체력이 뒷받침 안 되고선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자본론'을 번역할 때 꼬박 하루 14시간씩 앉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학창시절 운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선 체력을 길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