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 [名士 멘토의 열공특강] "누구나 주어진 24시간, 내 편으로 만들었죠" | |
김정기(49) 주(駐) 상하이 총영사는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영어교재 '거로' 시리즈 저자로 알려진 그는 고교 중퇴후 상경해 학원에서 칠판닦기 허드렛일부터 시작, 20대에 대학가 영어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국제변호사가 됐으며 귀국 후 교수, 대학총장(한국싸이버대)을 거쳐 지난 5월 외교관이 됐다. 또 현실정치에 도전, 고배를 마신 아픈 기억도 있다. 김 총영사는 "나를 밀어올린 원동력은 '불안'"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한계와 맞닥뜨리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새로운 도전에 목마르게 했다. 기자는 김 총영사와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했다. "공부는 제가 꿈을 향해 도전을 품게 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새로운 봉우리에 도전하기 위해 절벽 아래로 내려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러나 쉽지 않은 길을 택해 계속 도전했습니다." ■고교중퇴생이 최고 영어강사가 되기까지 김 총영사는 1977년 마산중앙고를 자퇴하고 상경, 학원 조교로 고단한 서울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무일푼 신세였지만 절망 속에서도 꿈을 잃진 않았다. "그 시절, 온통 가난과 절망으로 앞뒤가 꽉 막혀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꿈은 제 삶을 받혀주는 비상구였어요. 꿈을 접지 않기 위해 정말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맘 놓고 공부하고 싶었고, 공부하고자 하는 발버둥으로 버틸 수 있었어요."
"언젠가는 거꾸로 된 삶을 '큰 길'로 바로 세워놓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어요. 무일푼이었지만 성공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넌 운이 좋다더라' '넌 잘 될 거야'며 격려하신 어머니의 믿음이 전이돼 새로운 삶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조교가 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는 영어강의를 했다. 고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집을 뛰쳐나온 그가 주제넘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살기위해' 미친듯 가르치며 공부했다. 30분 강의를 위해 수백 번씩 사전을 뒤적였고 몇 시간 동안 수업내용을 연구했다. "먼저 영어공부 요령을 익혀야 했어요. 두꺼운 영어책의 목차와 머리말을 먼저 파악해 핵심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사실 책 한 권을 놓고 볼 때 핵심은 10%에 불과해요. 처음엔 속독으로 전체 흐름을 읽어 핵심을 체크했습니다. 하지만 영어는 시간투자가 관건이었어요. 많은 양의 영어소설을 읽으며 독해능력과 어휘력을 키웠고, 또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영어를 배워나갔어요. 가르치기 위한 시간투자가 바로 영어를 잘 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18살의 그는 하루를 25시간처럼 보냈다. 시간을 아껴쓰며 공부한 덕에 얼마후 대학가에서 인기강사로 자리잡았다. 당시 그는 "공평하게 주어진 24시간조차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철저하게 시간을 배분했지요. '이제부터 무얼하지?' 하는 막연함보다는 그날 해야 할 일을 조목조목 세분해 하루라는 시간표 안에 밀어넣고 실행에 옮겼지요. 시간이 유한하다는 점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쓰지않고 시간을 아껴써야 했지요. 하지만 바쁘다고 그저 허둥거리기보다 아무리 짧아도 저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된다' 그는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전국 대학을 순례하듯 돌며 영어를 가르쳤다. 명문대생들이 '고퇴생'의 강의를 듣기위해 몰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기가 커갈수록 알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다. "대학가 영어강사로 이름 날리던 그 순간, 이대로 살아선 안 된다는 느낌, 고인 물은 썩는다는 '불안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두 달 준비해서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한 뒤 미국대학에 도전했습니다. 1986년 뉴욕주립대에 입학해 교도소를 연상시키는 기숙사에서 원 없이 공부했습니다. 돌아보면, 제 인생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공부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큰 축복처럼 느껴집니다. 수업 전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관련 교재를 찾아내 열심히 읽고 수업준비를 했어요. 미국 친구들이 읽을 필요가 없다는 책까지 모조리 찾아 읽었죠.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김 총영사는 1990년 뉴욕주립대 정치학과 150명 졸업생 중 유일하게 '최우수 졸업(Summa Cum Laude)'의 기쁨을 안았다. 귀국 후 영어강의와 저술활동을 하던 그는 '거로 영어시리즈' 60여종을 펴내기도 했다. 제작비용만 20억원이 들었다. 그리고 1997년 홀연히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떠났다. "시리즈 완간 이후 할 일이 없어져 방황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돌파구로 미국 로스쿨에 도전했습니다. 1997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시작한 미국 로스쿨 과정은 논산훈련소 신병처럼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로스쿨 시험인 LSAT을 치고 시라큐스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취미생활은커녕 차 한 잔 마시고 도서관 밖으로 나가 잠시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할 틈도 없었다. 감시자도, 정해진 규율도 없었지만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후 미국 위스콘신주 마아퀘트대로 옮겨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변호사가 됐고 밀워키 지방법원에서 판사시보를 하다 2000년에 귀국했다. 그리고 40살이 되던 그 해 한국싸이버대 법학부 교수가 됐으며 42살 때 이 대학 총장에 선임됐다. ■인생의 시간표 김 총영사는 학부 유학을 떠날 때도, 그리고 로스쿨 진학을 위해 다시 떠날 때도 미국 일류대학에 대한 환상은 품지 않았다. 고교 중퇴라는 아픔을 겪은 그에게 '서열화'는 맞서 싸워야 할 성채와 같았다. "하버드와 컬럼비아 국제대학원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일류대학에 가서 평범하게 묻혀버리느니 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중상위권 대학에 가겠다고 결심했어요. 닭의 벼슬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굳이 일류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고 별 고민없이 간판보다는 실리를 택할 수 있었죠." 그는 어린 시절 세웠던 인생의 공부 시간표를 떠올리곤 한다. '서른까지 정치학을 공부하고, 마흔을 넘기지 않아 법학을 공부하며, 쉰부터는 인간과 삶의 본질적 문제를 성찰하는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목표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표에 맞춰 열심히 살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습니다. 공부는 꿈을 향한 도전을 위해 평생 안고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사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공부를 한다면 세상과 인간을 트인 눈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배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일궈온 제 삶의 저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구원의 문제에 천착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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