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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神修養 마당

"천사처럼 벌지는 못했어도 천사처럼 써야지"

鶴山 徐 仁 2008. 7. 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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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처럼 벌지는 못했어도 천사처럼 써야지"

 

  

이종환(李鍾煥) 삼영화학그룹 회장(84)은 지난 10년 동안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했다. 2002년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해 '관정(冠廷)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한 후 계속 출연금을 늘리더니 최근까지 총 6000억원을 재단에 쏟아 부었다. 그가 평생 모은 재산의 95%에 달한다. 그는 "천사처럼 돈을 벌지는 못했어도 천사처럼 쓰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 회장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두 번째 사건은 이른바 '1000억원 위자료가 걸린 황혼이혼 소송'이었다. 1999년 이 회장의 부인이 제기한 이혼소송은 당시 '최고령에 사상 최고액수의 위자료를 청구한 사례'라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이혼을 거부했던 이 회장은 결국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여 위자료 50억 원에 합의 이혼했다가 8년 만인 작년에 재결합했다.

최근 자서전 '정도(正道)'를 펴낸 이 회장을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20일 만났다. 1970년대 초 이 회장이 아흔아홉 칸 기와집이 있던 자리를 사서 지었다는 집은 검소하고 단단해 보였다. 겉이 화려하기보다는 안이 실속 있는 분위기였다. 거실로 들어서는 이 회장의 인상이 딱 그랬다. 조용하게 할 말은 다 하는데 전혀 웃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작은 기업이지만 소신껏 했고 야당 하는 것처럼 사업을 하다 보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고 했다.

 

  • 평소 잘 웃지 않는 이종환 회장은 직원들에게‘무서운 회장님’으로 통한다. 표정이 너무 딱딱하니 웃어보라는 사진기자의 말에 이 회장이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늘 색깔 있는 안경을 낀다./ 이종환 회장은 점심식사로 자장면을 즐겨 먹고 비행기도 3 등석만 타는‘구두쇠’다. 그러나 필요한 일엔 거액을 흔쾌 히 쓰는‘큰 구두쇠’가 되고 싶다고 했다.최순호기자 choish@chosun.com
 

이 회장은 "듣는 게 있어야 말을 할 줄 아는데 잘 듣지 못하니까 말도 잘 못한다"면서 귀에서 빨간 보청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20년 전 한밤중에 집으로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어요. 간첩이 체포됐는데 저와 접촉한 적이 있다고 확인을 하라고 해서 끌려갔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치자금 좀 내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열심히 일하는 기업인을 어떻게 이렇게 불시에 끌고 올 수 있느냐'고 항의하다가 뺨을 한대 맞았는데 그때부터 이명(耳鳴)이 시작됐어요. 좀 더 잘 들어보려고 보청기를 다섯 벌이나 샀는데 다 시원치 않더라고요."

이 회장은 청각만 빼면 건강엔 거의 문제가 없다. 몸무게는 50년 가까이 똑같고, 치아도 단 한 개도 빠지지 않아 다 그대로다. 수십 년 동안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2시에 잠자리에 들어도 병치레 없이 견디는 체력은 타고났다. 아침에 접시에 수북하게 담은 채소와 죽을 먹고 저녁때도 소식하며 운동을 자주 한 덕이 크다고 한다.

―교육재단을 만든 후 "재산은 계속 줄지만 마음은 오히려 커진다"고 하셨지요. 정말 그러십니까?

"재단에 돈을 내면서 아깝다든지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재산이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재단에 다 집어넣겠다는 생각이고요. 남은 재산을 정리하는 중인데 2~3년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애들이 섭섭지 않게 좀 나눠주고 나머지는 재단에 넣으려고 합니다."

―교육재단을 만들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내가 장사꾼 아니요? 1965년쯤엔가 마산지역 경제가 참 어려울 때인데, 내가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마산에 있는 모교에서 1~5등 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줬어요. 나도 사정이 어려운데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땐 2~3년밖에 못 했어요. 그렇지만 진작부터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혹시 자녀분들이 반대하지는 않았습니까?

"검소하게 살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내가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다는데 자식들이 왜 반대를 합니까."

이 회장은 2남 4녀를 뒀다. 큰 아들이 삼영화학그룹의 이석준(李碩埈) 부회장이다.

―교육 이외의 다른 사업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원래는 인천 부평 지역에 장기요양이 가능한 신경정신과 병원을 지으려고 했어요. 우리 둘째 아들이 올해 마흔다섯인데, 오래 전부터 자폐증을 앓아서 지방의 한 전문요양소에 입원해 있었어요. 그런 병일수록 처음에 잡아야 하는데 아들이 미국에 떨어져 있는 동안 그런 증세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어쨌든 우리 아이 같은 병을 앓는 자식을 둔 부모 마음을 헤아려 제가 땅 3만 평을 내놓아 지으려 했던 병원은 도무지 허가가 나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었는데 규제를 풀 길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장학사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지요."

이 회장은 1980년대 초반 당시 중학생이던 둘째 아들을 세계 최고의 인재로 키우려고 미국으로 일찌감치 유학을 보냈다. 마침 아는 목사가 돌봐주겠다고 해서 믿고 맡겼다. 아들이 학교도 잘 다니고 잘 지낸다는 목사의 편지도 자주 와서 그런 줄만 알았다.

몇 년 후 이 회장이 미국 출장 길에 들러 보니, 아들은 어느 시골 골방에 방치돼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영어로 '하이, 파파' 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만나러 갔는데, 아들은 심각한 상태였다. 그 목사는 돈만 챙기고 이 회장의 아들을 시골학교에 팽개쳐 둔 것이다. 아들의 병을 고쳐보려고 미국의 좋다는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 다녔지만 차도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지방의 전문요양소에 장기입원을 시켜두고 자주 만나러 갔다. 그러다보니 더 나은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돼 병원 설립을 시도했던 것이다.

―둘째 아드님은 자주 만나십니까?

"요즘 고향 의령의 복지마을에 삽니다. 제가 그곳에 기부금을 내서 집을 지었습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곳이지만 좀 기여를 했지요. 이젠 내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요. 그 아이의 병은 낫는 병이 아니에요. 책이라도 좀 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작은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이 회장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젊을 땐 술자리에 나온 정부관리와 은행장이 모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먹을 날려 술집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일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작은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두 눈을 질끈 감고 잠시 침묵했다.

―결국 그 아드님 문제가 장학사업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군요.

"또 있어요. 일본인 은사 한 분이 13년 전엔가 87세에 천황 훈장을 받게 되었어요. 그날 장수 축하연도 같이 열었지요. 그런데 새벽 1시에 그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걸 보니 이제 나도 언제 갈지 모른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사람이 죽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구나 싶었고요. 제가 번 돈, 얼마나 어렵게 번 돈입니까. 그 전에 잘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독특한' 방식의 교육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방법입니까.

"인재양성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줄 수도 있지요. 저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인재를 키워보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아버지가 재벌이라도 실력 있어서 장학금 받아가겠다고 하면 줍니다. 실제로 모 대기업 사장 딸도 장학금을 받아가요. 혹시 돈 있는 집 자식들에게까지 마구 장학금을 준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실력과 가능성을 먼저 봅니다."

 

  • 명륜동 집 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종환 회장 부부. 이 회장은 자서전에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해“피난지 마산에서 꽃같이 어 여쁜 처녀와 만났다. 평안도 사람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다”고 썼다.최순호 기자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의 장학금 운용은 실력 있는 학생들을 과감하게 지원하는 방식이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유 있게 지원해준다. 미국 하버드대에 다니는 유학생은 연간 최고 5만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주는 최고액수 장학금인 약 4만5000달러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2002년 이후 지금까지 관정재단에서 국내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3000명, 해외유학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약 700명이다. 이 회장은 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돼야 한다"고 격려한다.

―인문·사회계보다는 자연계에 더 비중을 두고 장학생을 선발하시지요?

"7 대 3의 비율로 자연계 학생들이 많아요. 자연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스위스에 갔더니 다들 집 앞을 화분으로 장식하고 여유 있게 사는 걸 보고 놀랐어요. 당시 1인당 4만달러가 넘었던 소득은 결국 기술발전의 덕이지요. 거기서 자극을 받았습니다. 역시 현장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연계열의 발전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업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일을 하나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1970년대 정부에서 중화학공업을 장려해 저도 국제전선이란 회사를 만들어 전선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플라스틱 사업으로 기반을 닦았으니 도약을 해보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엄청난 투자를 하고도 자리를 잡지 못해 6년 만에 실패했어요. 그거 실패하고 나서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보자고 시작한 게 애자(碍子: 전선을 지탱하고 절연하기 위해 전봇대에 다는 기구) 개발이었어요. 5년이면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원하는 수준까지 가는 데 25년 걸렸습니다. 그 후에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인 타일 공장을 지어서 애를 먹고요. 돈 벌기 정말 힘들지요."

이 회장의 자서전을 보면 한 페이지에 1970년대 삼영화학에서 생산했던 플라스틱 제품 수십 가지를 한데 모아 찍은 사진이 있다. 플라스틱 바가지와 소쿠리, 뚜껑 달린 커다란 물통, 꽃무늬가 찍힌 비닐 장판 등 한때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생활용품이다. 너무 친근해서 흑백사진을 보는데도 원래 색깔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다 '던져도 깨지지 않는 생활용품'인 플라스틱의 등장은 그 시대의 혁명이었다. 바로 이런 물건들이 이 회장이 키워낸 삼영화학그룹의 기반이 됐다.

―어렵게 벌었기 때문에 사회환원을 결심하는 일이 더 힘들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적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똥돼지같이 번 돈을 자꾸 자식들에게 주려고 애쓰지 말고 깨끗이 사회에 기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사회가 잘되는 것이니까요."

―최근엔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에게 각각 상금 100만달러(약 10억원)를 주는 '관정아시아상'도 제정하셨지요.

"장학금처럼 당장 성과가 눈에 뜨이지 않는 일에만 돈을 쓰지 말고 표시 나는 일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에서 만들었지요. 이 상의 목표는 수상자 두 사람을 살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연구하고 공부하는 풍토를 만드는 겁니다. 이 상에 도전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게 제가 바라는 것이지요."

―노벨재단과 록펠러재단을 벤치마킹 하셨습니까?

"노벨상은 1901년부터 시상했어요.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지 5년 후였는데 벌써 100여 년의 역사가 축적돼 인류 최고의 상이 됐습니다. 사실 저희 재단이 추구하는 것도 노벨재단과 같아요. 록펠러의 전기도 읽고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성공의 비결 중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신의지요. 당장 나타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결국은 신의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은행 빚을 안 지려고 노력했어요. 빚을 잔뜩 지고 있으면 직원들이 '저렇게 빚 얻어서 하는 것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또 제일 중요한 건 행동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면, 백견(百見)은 불여일고(不如一考)요, 백고(百考)는 불여일행(不如一行)입니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행동을 못 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또 비판은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욕을 먹을 줄 알아야 일인자가 될 수 있어요."

―황혼이혼 소송이 화제가 되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위자료 청구액이 1000억원이다 어떻다 해서 시끄러웠는데, 그게 1억달러예요. 그 대단한 록펠러도 이혼할 때 위자료로 500만달러를 줬다고 하던데(웃음). 아마 그 변호사가 그 이혼소송 한 건으로 일확천금을 꿈꿨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재결합하시게 됐습니까.

"한 2~3년 전부터 내자가 그럴 뜻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어요. 집사람은 평양 출신입니다. 기독교인이고 가정 풍습이 많이 다르니까 불만이 있었겠지요. 저도 잘했다고는 못합니다. 그 시절 다 거칠게 살았어요. 그러나 아이들도 많으니까 집사람이 참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주변에서 부추기고 변호사가 끼어들고 그러면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됐어요. 80이 다 된 부부에게 문제가 있다면 주변에서 풀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변호사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어요. 할 수 없이 이혼을 했다가 작년에 다시 합쳤습니다. 저도 노력하고 큰 아들 내외도 애를 썼어요. 삼영화학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같이 나갈 수 있어서 참 흐뭇했습니다."

이 회장이 "젊은 시절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자랑하는 부인 신명덕(辛明德·82) 여사도 인터뷰가 끝날 즈음 자리를 함께했다. 피부가 아기처럼 하얗고 뽀�다.

이 회장은 집을 구경시켜주다가 "요즘은 볼 줄 알아야 할 줄도 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면서, "보는 눈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서재에 앉아 자신의 수첩에 적어둔 일본의 구전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의 첫 부분을 읽어주었다.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종소리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紗羅雙樹)의 꽃 빛깔은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치를 나타낸다.

교만한 자 오래가지 않으니, 다만 봄밤의 꿈만 같고

용맹한 자도 마침내 사라지니, 한줄기 바람 앞의 티끌과 같다.'

그는 "늦가을 절간의 종소리에서 세상사의 무상함을 느끼는 경지를 이제 알 것도 같다"고 했다. 그가 읽어준 이 네 문장이 어쩌면 그가 평생 번 돈을 장학사업에 바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 집에 들어섰을 땐 "길게 말하기 어려우니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던 이 회장은 말문이 열리자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의 집을 나서는 길을 이 회장 부부가 다정하게 나란히 서서 배웅해주었다.
 

 


 
  •                                                                                                                   - 강인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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