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까닭 / 정호승

鶴山 徐 仁 2008. 3. 21. 16:44


까닭 / 정호승


내가 아직 한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지 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송이 눈으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