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광개토왕 비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고구려사

鶴山 徐 仁 2008. 2. 25. 08:45

광개토왕비는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시 대비가에 서 있다. 1880년경 재발견된 이래 처음에는 그 독특한 서체 때문에 호사가들의 관심거리가 되어 여러 번 여러 방법으로 탁본을 만들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비의 존재가 중국학계에 알려 지면서 건립연대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으로 지금은 끊어 읽기·판독·주석·문자서법·비문진위·탁본유전 등(고구려간사;이전복외) 다방면에 걸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비문은 일인들에 의한 석회도말작전이 있었다 없었다 논란이 계속된 상태에 있다. 비를 세울 당시 일본이란 나라는 없었다. 비문에 왜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해적들을 총칭한 것이다. 일본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일본은 이로부터 250여 년이 지나서야 천지란 사람에 의해 국가형태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비문을 해석하면서 일본을 운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친일성을 갖는다.

비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비문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의 위치를 밝히고 있고, 왕세계 즉 시조왕으로부터 광개토왕까지의 왕위계승 사실을 적었으며, 광개토왕의 집정기간에 있었던 국경정비사업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왕의 왕릉을 지키는 능지기와 그가 필요시 동원해 부릴 수 있는 고장별 가구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광개토왕이 1년간 대리청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첫 수도 졸본이 지금 요양이었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시조 주몽 일행이 졸본천에 이르러 정도할 뜻을 굳히고 비류수변에 거주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졸본천과 비류수는 본류와 지류와의 관계에 있거나 아니면 독립된 하천이 근거리에 있었거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처음 정한 도성의 위치를 비류곡홀본서성산(沸流谷忽本西城山)이라 했다. 홀본은 제홀근본(諸忽根本)의 약자이고 홀(忽)은 고구려왕릉의 사당에 붙인 당호(××홀)를 말하므로 홀본은 시조왕의 사당을 말한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은 시조사당인 동명왕묘를 왕 3년에 건립했다. 고구려본기 기사 중에 주몽사당이 있는 곳을 요동성(요양)이라 하고 있으므로 요양관내에 비류곡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명왕묘는 시조사당 즉 주몽사당을 말하므로 대무신왕은 비류곡에다 주몽사당(오열홀)을 건립한 것이다. 따라서 졸본은 환인이 아니라 요동성 즉 요양임을 이 비문은 밝히고 있다.

■ 비문은 광개토왕을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명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제6대 대조대왕 이전의 역사를 믿지 않으려 한다거나 대조대왕 이후 몇 대의 왕이 생략된 것으로 보는 견해에 함구함으로서 이에 동조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비문을 검증하면 시조왕과 19대 (17세손) 광개토왕과의 사이에 단 일대를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다. 따라서 대조대왕 즉위년으로부터 차대왕 그리고 신대왕 퇴위년까지의 126년간의 왕위계승문제에 있어 1대 또는 2대의 왕이 빠졌으리라는 선입관을 갖고 고구려사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형제계승을 민중왕과 모본왕의 예에서 보이듯이 숙부와 생질간의 계승과 같은 방식으로 연구의 가닥을 잡아야 한다. 비문은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왕세계에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광개토왕은 서·북·남쪽의 광범위한 영토에 대한 국경정비사업을 완수했다.


국내·외 많은 고구려사 연구자들은 비문에 기록된 백잔(백제)과 신라 관련기사들을 마치 광개토왕이 정복사업을 벌렸던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킬 의도가 있었다면 훨씬 이전에 그 일을 해치우고도 남았다. 고구려는 멸망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를 [아래채에 사는 머슴] 정도로 생각하고 외적을 막는 방패로 사용했다. 백제의 경우 가끔 혼줄을 내주기는 했으나 멸망시키려는 뜻은 없었으며, 신라는 그 왕으로 능지기를 삼고 있었기 때문에 혼내줄 일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문에 기록된 왕토(往討)나 궁솔왕토(躬率往討) 등의 기사를 가지고 신라나 백제의 토벌군이 움직인 것으로 알면 크게 어긋난다. 이때 왕은 고구려의 선왕들이 묻혀 있는 지역으로 백제가 들어와 능묘지기들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정비한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문에 기록된 토벌기사를 마치 백제와 큰 전쟁을 벌린 것으로 보면 안된다. 역사기록에 써넣을 수 없는 사항이라도 아들이 아버지의 훈적을 적고자 할 때에는 이 국경정비사업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비문에 기록된 북쪽의 숙신(帛愼) 남쪽의 백제(百殘) 서쪽의 동부여(東夫餘)에 관한 기사들은 국경을 정비한 기사일 뿐 전쟁기사가 아님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남쪽 백제의 경우 남녀생구 1천이라든가 세포 1천필 등을 헌납 받았다는 기록은 선왕들의 능침을 지키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세포는 그 동안의 일을 사과하는 뜻으로 백제가 준 것을 받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또 58개 성과 700개의 촌락을 고구려가 취한 것은 선왕들이 묻혀 있는 곳을 되찾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음성·안성·양성·수원·인천·김포·통진 등지의 성과 촌락을 말한다. 이곳의 안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왕제와 대신 등 10인을 볼모로 했다.
북쪽 숙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 때 소속을 잃고 있던 300여 촌장을 안심시키고 앞으로 고구려가 잘 보호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그 곳에 관리를 두고 온 것을 말한다.
서쪽의 동부여 역시 소속감이 해이해져 있는 것을 그 소속을 확인시켜 주고 또 중앙의 관리를 그 곳에 상주시키고 돌아온 것을 기록했다.
비문에서 불공(不貢)이니 헌공(獻貢)이니 하는 기록은 고구려 중앙정부에 바쳐야 할 세금을 말하는 것이지 조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기록에 조공이라 기록한 것은 왕실간의 조공무역을 말하는 것인데 고구려는 북부여·동부여·신라·백제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광개토왕은 비문의 기사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정복활동을 활발히 한 왕이 아니라 그동안 정복되었던 지역을 착실히 국경 안으로 편입시키는 정비작업을 한 왕이다. 왕이 정비한 국경으로 서쪽은 북부여가 위치하고 있던 빠이링마오로부터 서북쪽은 숙신이 위치한 케로렌강유역의 초이발산지역, 북쪽으로는 아블로노이산맥으로부터 스타나보이산맥까지에 걸쳐 넘나들며 차지했던 읍루 지역이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 및 우리의 동해까지였으며 남쪽의 국경은 두 곳으로 하나는 한반도 남쪽 속리산까지였고 다른 하나는 중국쪽으로 영정하·상간하선까지를 정비한 것이다.

■ 비문은 또 능지기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비문에서는 능지기를 수묘인(守墓人)이라 표기하고 있다. 수묘인을 기록하면서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분류했으며 국연 30가(家) 간연 300가 모두 합해서 330가를 정해 놓고 있다. 이 국연과 간연 330가를 지금까지 연구한 사람들의 연구 결과는 세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광개토왕 한 분의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을 정해 놓은 것이라 했고(일반적 견해) 다른 하나는 약간 진전된 연구로 고국양왕(왕의 아버지)과 고국원왕(왕의 할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능을 지키는 수묘인을 정한 것이라 했으며(浜田耕策) 또 다른 하나는 조금더 진전된 연구로 광개토왕을 포함하여 국내성에 위치한 모든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을 정해 놓은 것이라 했다(김현숙;경북대학교 석사논문). 시민강좌(일조각) 참조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 집안시에 있는 묘들 중 왕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들 중 그 체제가 웅장하여 왕릉으로 보일 만한 것이 있긴 하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왕릉이 아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 산화한 고구려전사들의 무덤이고 장군들의 무덤이다. 고구려왕릉은 명당혈이 있는 고을에 단기로 모셔져 있고 진시왕릉처럼 지하에 구축되어 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에 빼앗겼다가 찾아와선 백천과 신계에 왕릉을 구축하고 그 곳에 부왕의 시신을 다시 모시고 자신의 수릉도 만들게 되면서 반도 내에서 왕릉길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후 고구려는 왕릉길지를 속리산 이북지역에서 더 많이 찾게 되었고 이들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장수왕은 개로왕을 죽이면서까지 남쪽 변경을 금강선으로 내밀었다. 장수왕릉은 고구려 중원비의 위치로 보아 지금 충북 음성에 있고, 광개토왕은 음성에 전해내려오는 거북놀이의 가사로 보거나 문자왕이 중원비 제막식을 마치고 귀경하면서 바다를 망제한 것으로 보아 동해바다에 있으며, 그 곳은 지금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앞 바다의 거북섬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안장왕은 한씨 미녀를 앞세우고 당시 오곡원이라 지칭된 지금의 김포평야를 평정하고 김포·통진에다 부왕과 자신의 능묘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등 반도 내에서 고구려는 많은 능묘길지를 찾았다. 따라서 비문에 기록된 많은 수묘인들은 이들 넓게 산재하고 있는 역대왕릉들을 지키는 능지기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시조왕으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혹은 앞으로 능묘를 쓸 가능성이 있는 지역까지를 포괄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훈적비를 세우면서 부왕이 생존시 관심을 갖고 시행한 국경정비사업을 기록했으며 또한 만 년 후에까지 고구려국가의 역대왕릉들을 변함 없이 지켜 내리게 하기 위한 원칙과 수묘인을 명기해 놓은 것이다.

■ 비문은 광개토왕이 1년간 대리청정한 사실을 적고 있다.


비문에 명기된 영락 5년 세재 을미(乙未)는 서기 395년을 말한다. 이 해로부터 5년을 후진시키면 영락 원년은 서기 391년 고국양왕 8년 신묘(辛卯)년이 된다. 그런데 고구려본기는 392년을 광개토왕 원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문으로 보면 광개토왕이 왕권을 행사한 첫 해는 부왕인 고국양왕 8년 신묘년이다. 따라서 왕은 부왕이 생존하고 있는 기간에 왕권을 행사한 것이다. 고구려본기의 기사를 분석해 보면 부왕인 고국양왕은 왕 8년에 득병하여 태자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5월에 서거하고 있다. 부왕은 혼수상태 또는 언어불능상태 등 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중환을 앓다가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고 왕의 자리는 한 시라도 비워 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광개토왕은 17세의 나이로 부왕을 대신해 왕노릇을 한 것이다. 광개토왕은 정식으로 왕이 되기 일 년 전에 왕권을 행사했다. 즉 대리청정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문이 기록하고 있는 연대는 왕 개인의 연대를 기록한 것이고 역사연대(절대연대)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락이란 왕호가 하나 더 있게 된 것이다.
이상 비문의 내용을 통해 밝혀낸 사실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어온 고구려사와 너무나도 다른 내용들이다. 첫 수도 졸본의 위치는 고구려사의 초석인데 이를 선행 연구자들은 환인으로 잘못 놓았다. 고구려의 왕세계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이 정확하고 선행 연구자들의 백가쟁명식 주장은 틀리다. 이 두 가지의 잘못된 해석은 고구려사를 놀랄 만큼 왜곡시킬 수 있다.
첫 수도 졸본이 요양이 됨으로서 유리왕의 전쟁무대가 지금 북경부근이었다는 것이 확실해 졌고, 5대 모본왕이 이 북경부근에 군대를 주둔시킨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사실이란 것이 확실해 졌다. 따라서 고구려 전성기 때(미천왕)의 서쪽 변경은 대행산맥의 뒤쪽 태원을 훨씬 넘어 후호하오테 및 빠이링마오까지였다는 사실도 확실해 진다.
비문은 능지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은 광개토왕릉 만을 지키는 사람들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시조왕으로부터 광개토왕 이후의 왕릉까지도 지켜야 할 수묘인을 기록해 놓았으며 또 광개토왕이 부왕인 고국양왕을 대신하여 1년간 대리청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이 비문은 첫 수도 졸본의 위치가 환인이 아니고 요양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고 또 고구려본기의 왕위계승 기사가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 우리가 고구려사를 잘못 알고 있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비문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로 고구려사를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 비는 태산같은 부동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http://blog.empas.com/ajirih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