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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21일]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鶴山 徐 仁 2007. 12. 21. 19:51
1960년대 서독에 파견된 광부들이 송금해 온 달러는 경제개발의 밑거름이 됐다.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일할 우리나라 광부 123명이 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났다. 광부들 얼굴에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약속한 월급은 162달러50센트(기본급). 1인당 GNP가 87달러(62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실업률이 8.1%(63년)에 달하고, 2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기업이 54개(61년)밖에 안 돼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원파견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분명 돌파구였다. 중졸 이상의 학력과 20세 이상 30세 미만 그리고 탄광근무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는데, 몰려든 지원자가 2874명이었다. 8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한 사람은 367명.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20%나 됐다. 합격자는 20일간의 탄광훈련, 20일간의 독일어강습을 거친 후 다시 서독 현지에서 3개월의 적응훈련을 받아야 했다.

 

힘들게 작업장을 배정받았지만 작업도 간단치 않았다. 지하 1000미터에서 뿜어나오는 30도의 지열과 50킬로그램이나 되는 작업도구로 3년 뒤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대부분 한번 이상 골절상을 경험했다. 우려했던 탄광사고도 이듬해 1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 돌에 깔려 죽거나 탄차에 부딪혀 현장에서 죽는 사고들이 일어났다.

 

1964년 12월 차관을 구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인 광원과 1964년 11월부터 파견된 간호사를 찾아 위로의 말을 하다가 “조국이 가난해서…”라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때는 장내가 온통 울음바다로 변하기도 했다. 이렇게 파견된 광부는 1978년 서독정부가 광부수입을 중단할 때까지 줄잡아 7800명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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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山 ;

60년대 그 어려웠던 시절을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지난 날의 교훈을, 역사적 사실을 오늘의 현실에서도 제대로 조명하여 다시는 그렇게 힘든 고통의 국가사회가 되지 않도록 반성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